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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년의 긴 시간이 숨을쉬는 창덕궁,(2018년 7월 5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613년의 긴 시간이 숨을쉬는 창덕궁,(2018년 7월 5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7. 5. 22:42


안국역 3번출구로 나가서 현대그룹 빌딩 앞으로 올라가면 

사도시(司䆃寺) 터 도 있다, 司䆃寺는궁안 창고의 쌀과 궐안의 장을 공급하는 일을 맡아보든 관청이다,

1392년(태조 1) 7월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요물고를 그대로 두었다가, 1401년(태종 1) 7월 관제개혁 때 공정고로 고쳤으며

다시 사도시로 이름을 바꾸었다.성종실록에 1478년(기록에 사도서가 나타나고, 세조가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할 무렵 본래 5품 아문이었던

사도시를 3품 아문으로 올린 것으로 보아 1478년 8월 이전에 공정고가 사도서로 바뀌었고, 그뒤 다시 사도시로 고쳐진 것 같다.

이어서 창덕궁이 있다, 돈화문이다, 보물 제383호. 태종 12년 1412년에 창건되었고, 1451년(문종 1)과

1506년(연산군 12)에 개조하여 더 크게 만들라는 왕명이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보면 처음에는 지금보다 작은 규모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는 별궁이었던 창덕궁이 점차 정궁의 구실을 하게되면서 정문을 위엄있게 만들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돈화문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우진각 지붕을 한 누문(樓門)으로.

돌계단이 있는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은 현재 아스팔트 포장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다른 궁궐의 문이 앞면 3칸인 데 비해 이 문은 2칸이 더 넓다,

한여름처름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돈화문(敦化門)으로 들어간다. 돈화문의 2층 문루가 당당하게 위용을 뽐낸다.

돈화문은 궁궐의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광해군 때 복원되여 오늘날까지 이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1609년의 일이니. 400년의 긴 시간이 숨을 쉰다. 조선시대에는 시간을 알리는 종과 북이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창덕궁의 공식 안내다, 창덕궁의 이름은 창성할 창(昌)자와 큰덕(德 )자로 이름을 붙였다,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이 1405년에 제2의 왕국으로 창건했다고 하니 그 역사가 무려 613년이다,(2018년기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1394년에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고 경복궁을 중건한다.

그후 1, 2차의 왕자의 난을 거처 1400년 11월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고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새 궁궐인 이궁을 짓는다,

경복궁이 엄연히 있는데도 새로 이궁을 짓도록 한 태종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를 짐작할 만한 뚜렸한 단서가 없으므로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태종 왕권의 정통성의 한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경복궁은 태종 자신이 정적 정도전과 이복 동생들을 죽였던 현장이다.

될 수 있으면 덮어두고 싶은 과거를 자꾸 일깨우는 경복궁으로 임어하는 것은 태종으로서는 달가운 일일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새 궁궐은 1405년(태종5) 10월 19일에 가서야 완공되었다. 이 때의 재천도로 한양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수도로서

지위를 굳히게 되었고, 조선 왕조는 본격적으로 체제를 정비할 기초를 마련하였다. 궁궐 경영의 측면에서 보자면 창덕궁의 영건은

법궁에 대해서 이궁의 완성이요, 조선왕조 최초의 법궁 과 이궁의 양궐 체제가 이루어졌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정궁인 경복궁은 방화로 잿더미가 되었으므로 전란 후 제일 먼저 경복궁을 중건해야 마땅하였으나

도참가 이국필이 풍수지리설을 내세우며, 경복궁 자리는 불길하니 창덕궁을 중건해야 마땅하다. 고 주장함에 따라 ,1607년 (선조40)에

서둘러 착수한 창덕궁의 중건은 1612년 (광해군3)에 마무리되었다. 이 사실은 (궁궐지)와 (한경지략)에 밝혀져 있다. 그 이후로 경복궁은 줄곧 폐허로

버려졌다가 1867년(고종4)에 복구된다, 그 때까지 창덕궁은 273년 동안 정궁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창덕궁도 복원된 지 불과 12년 만인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인정전만 남고 모든 정각이 불에 타 버리는 비운을 겪었고 광해군 15년의 역사도 함께 끝이난다,

잠시 창덕궁 역사를 알아 본 것을 뒤로하고 이제 돈화문을 지나 조금 걸어들어가면 오른쪽에 금천교(錦川橋)가 있다.

궁궐로 들어설 때는 어김없이 건너야 하는 궁궐의 상징처름 여겨지는 돌다리다, 창덕궁 금천교는 돈화문과 마찬가지로 궁궐의 다리

가운데는 가장 오래된 다리로 두 개의 무지개 모양 홍예(虹霓)로 아름다움을 더한다. 홍예와 홍예 사이에 하마(河馬) 형상의

석수(石獸)를 배치했다. 서울을 통틀어서 가장 오래된 다리도 이곳 창덕궁의 금천교다,

금천교의 배치는 경복궁과는 다르다. 경북궁은 건물들이 일직선상에서 좌우 대칭을 이룬다.

창덕궁은 정문인 돈화문에서 걸어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돌아야 금천교가 나온다. 그러니까 일직선상이 아니라 방향이 90도로 꺽인다,

금천교를 건너서 진선문을 들어가면 사진에 보이는 너른 마당이 있고

왼쪽에 보이는 첫번째 문이 정전의 정문인 인정문이며. 인정문을 들어가야 인정전이 있다,

앞에 보이는 문은 인정전을 거치지 않고 낙선재와 후원으로 가는 문이다,

이렇게 몇 번이나 방향을 틀어야 정전인 인정전에 다 다른다, 평지에 일직선으로

좌우에 배치한 경복궁과는 달리 산의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배치로, 건물들이 산 자락의 골짜기에 폭 안겨있다. 

인정문이다, 인정문은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3칸 인정문으로 인정전이 보인다, 이 권역은 절대 불가침의

왕의 성역이다, 광해군은 임난이후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을 재건하고 재위 15년간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재정기반의

재건과 민생 안정을 위한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후금과도 탄력있는 외교관계를 추구하여 내치와 외교면에서 많은

성과를 올린 왕이지만 서자 출신이였든 광해군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서인 무리들의 인조반정에 폐위되었다.

仁 政 殿 은 국보 제225호.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 조선 궁궐의 정전다운 격식과 의장(意匠)이 잘 갖추어져 있다.

창덕궁은 오랫동안 조선의 법궁(法宮) 구실을 하였으므로, 조정의 각종 의식이나 외국 사신의 접견이 이 건물에서 이루어졌다.

인정전의 전면에 행랑으로 둘러싸인 전정(前庭)이 있어며 이곳에 품계석(品階石)이 마련되여 있다,

인정전에서는 왕세자나 세자빈의 책봉이 있을 때, 또는 대왕대비의 주갑(周甲: 환갑) 등 경사가 있을 때

왕은 인전전에서 축하를 받았다.1405년(태종 5)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지어졌으나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을 거쳐 1804년(순조 4)에

현재의 건물이 재건되었다. 창건 당초에는 정면 3칸의 작은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세종·단종 때 개영(改營)이 있었다.

이때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재건되었으며, 다시 1803년(순조 3)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에 중건되고, 1842년(헌종 8)에 수리가 있었다. 기단 중앙의 계단 가운데 판석(板石)에는 구름 사이로 두 마리의 봉황이

새겨져 궁실(宮室)의 격식을 나타내고 있다. 12척 높이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에는 벽체 없이 사분합의 문짝과 광창을 설치하였다.

기둥 위에 짜여진 공포는 내사출목, 외삼출목으로 조선 후기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인정전 내부에는 용상(龍床) 어좌(御座)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는 오봉산일월도(五峰山日月圖 의 병풍을 쳤다.

어좌 위에는 천장에서 달아낸 보개천장을 두었는데, 정교하고 섬세한 가공이 돋보인다. 내부는 살미첨차가 모두 한데 모여

둥글둥글하게 장식된 운궁(雲宮)이 되어 내목도리나 보를 받고 있다. 중층건물이지만 내부는 하나로 터져 고주 위로는 대량을 걸고

고주 밖으로는 퇴량을 걸어 사방에 툇간을 만들었으며, 대량의 위치에 우물천장을 드리웠다. 천장 중앙에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 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 넣었다.

또한 한말에 내부시설 일부를 개조하고 전등을 가설했다. 내부 바닥은 본래 전(磚)이 깔려 있었던 것을

서양식의 쪽나무로 바꾸었으며, 창도 내부에 서양식의 들어서 여는 창을 내고 커튼을 드리웠다. 또한, 궁내에 전기를 공급하는

시설을 갖추어 여러 개의 전등을 가설하였다. 이들 새로운 시설은 황실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장식하였다.

인정전 처마는 겹처마 다.

외부는 3제공에 모두 끝이 날카롭게 위로 솟은 쇠서를 만들었다,

인정전은 두단의 월대(月臺) 위에 건축되였다,

 1단과 2단  월대(月臺) 모서리에서 무쇠로 만든 통이 있다,  이통은 지금으로  말하면 방화수 그릇으로,

목조건물이니 불이 났을때 초기 진압 목적으로 물을 담아 놓았든 통, 드무(넓적하게 생긴 독)다,

중층지붕의 각 마루에는 회반죽을 바르고

취두(鷲頭: 매 머리모양의 장식)·용두(龍頭)·잡상(雜像)을 두었다,

용마루 양성 부분에는 다섯 개의 이화문장(李花紋章)을 장식하였는데,

이것은 한말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을 새긴 것이다.

인정전에 서 인정문을 바라보면 양 쪽에 품계석(品階石)이 있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창경궁의 명정전과 함께 조선 궁궐의 세 정전 중 하나다,

건축적으로는 규모가 근정전보다는 조금 작고 건립연대는 명정전보다 뒤떨어져 중간 위치에 있다고 하겠으나,

조선왕조 역사의 주무대가 되었던 점에서는 다른 정전과는 다른 큰 의미를 가진다. 이 건물이 역사와 함께 변화되어

왔음은 내부에 꾸며진 한 말의 서양식 시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역사에 관한 내용은 문화재청 자료를 인용 하였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