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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창덕궁 선정전과 희정당, 그리고 대조전(2018년 7월 5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창덕궁 선정전과 희정당, 그리고 대조전(2018년 7월 5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7. 6. 11:35


인정전 동쪽 담장 바같에

선정전이 있다, 이 문은 선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선정전은 보물 제814호. 조선 초기에 창건되어 오랫동안 편전(便殿)으로 이용되다가

조선 후기에 내전의 희정당을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별로 활용되지 못했다. 당초에는 조계청(朝啓廳)이라는

건물이었는데 1461년(세조 7)에 선정전으로 개명했다.

선정전은 장대석으로 월대(月臺)를 쌓고, 상부를 모난 박석을 깔아 마무리하고, 양끝에 드무(넓적하게 생긴 독)를 놓았다.

월대 위에는 장대석 한벌대의 기단을 쌓고 원형의 다듬은 돌초석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내부 앞쪽에만 고주(高柱)를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면·후면과 측면 어간에는 띠살창호의 4분합을 달고, 측면 전후 툇간에는 2분합을, 동·서 전툇간과

후면 동측칸에는 2분합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선정문에서 복도각을 따라 선정전으로 이어 진다,

복도각 宣政殿

내부 어칸에는 어좌(御座)가

배설되어 있으며 그 뒤에는 일월오악병풍이 둘러져 있다. .

상부 천장에는 1단을 함입시켜 보개(寶蓋)를 만들어 장엄하고 있다. 보개는 장방형 평면의 4모서리를 모접기하고

 다포계의 공포로 장식하였다. 보개의 천판(天板)에는 군주를 상징하는 두 마리의 봉황이 구름사이를 노니는 모습으로 장식하였다.

정전인 인정전 어좌 상부도 역시 사정전과 같이 봉황으로 장식하고 있다

선정전 앞에서 본 왼쪽 담벽 바깥 과

오른쪽, 높게 보이는 건물이 인정전 (仁政殿)이다,

이제는 선정전 옆에 붙어있는 희정당을 둘러 본다, 보물 제815호. 정면 11칸, 측면 4칸의 2익공식 팔작지붕건물.

창덕궁의 편전(便殿)은 본래 선정전으로, 이 건물은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 건물을 편전으로 사용하게 된다.

건물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1496년(연산군 2)에 궁내의 수문당(修文堂)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면서

당호를 희정당이라고 바꾸면서 창덕궁의 한 건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희정당이다, 전면에서 들어가는 문은 모두 잠겨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에 창덕궁이

재건될 때 다시 지어졌으며, 다시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재건되었다. 이 때에는 인경궁(仁慶宮)의 건물을

 철거하여 그 자재로 세웠다. 1833년 또다시 소실되어 이듬해 재건되었으나 1917년에 화재로 타 버리고 1920년에 다시 세워져 오늘에 이른다.

건물이 여러 차례 불에 탔다가 재건되면서 규모도 달라지고 건물의 용도도 바뀌었는데, 처음에는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인조 때 재건될 때에는 15칸에 지나지 않았으나 뒤에 편전으로 이용되면서 규모가 늘어나 현재의 큰 건물이 되었다.

문이 잠겨 있어니 선정전과 희정당 사이로 들어간다,

들어가면서 보는 희정당 건물들의 모습들

작은 쪽문 하나까지 조금도 흐트러 짐이 없는 완벽한 궁궐 건축물이다,

희정당은 외전에 속하는 인정전, 선정전의 동쪽에, 외전건물들과는 축을 약간 달리하여 놓여 있으며,

희정당의 북쪽에는 내전의 정당인 대조전이 있다. 건물 앞의 왼쪽에 연못이 있고 작은 뜰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1920년에

재건되면서 건물 남면에 자동차의 진입을 위한 돌출된 지붕이 설치되는 등 많은 개조가 이루어졌다.

내부는 보아지가 되어 퇴량을 받게 하고, 퇴량의 내부는 고주에 결구되었다. 고주 상부는 팔각(八角)인 주두를 놓고

그 위에 사각(四角)의 재주두를 두어 대들보를 받았으며, 대들보 상부에 붙여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지붕은 각 마루를 양성하고

용두·잡상을 두었다.정면 9칸, 측면 3칸을 거실로 하고 주위는 툇간으로 하여 통로로 사용하였는데, 이 중 정면 3칸을 통칸으로 하여

응접실로 하고 서쪽은 회의실로 꾸미고 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었다.

이 건물은 1920년에 재건할 때 한식을 위주로 하면서 양식을 가미하여 응접실과 회의실은 바닥마루,

유리창문, 문 상부의 휘장, 벽체 등을 양식으로 꾸미고 양식 탁자를 놓았다. 현재 응접실 좌우에 김규진(金圭鎭)의

금강산도, 해금강도가 있다. 조선 말기와 한말에 걸친 궁궐편전의 건축형태를 남기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

사진에 보이는 오른쪽 까지가 희정당이다,

昌德宮大造殿은 창건 때인 1405년(태종 5)에 함께 지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496년(연산군 2)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지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 창덕궁 재건 때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조반정 때 또 불에 타, 1647년(인조 25)에 다시 중건되었다. 이때는 인경궁(仁慶宮)의

경수전(慶壽殿)을 철거하여 이건했고. 1833년(순조 33)에 또다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재건되었다. 1917년에도 불에 타자,

1919년에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交泰殿)을 이건(移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대조전은 수차례에 걸쳐 소실되고 재건되어, 본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현재 대조전은 선정전의 동쪽, 희정당 북쪽에 위치하여 정면에 선평문을 두고 건물 동쪽에 흥복헌(興福軒), 서쪽에 융경헌(隆慶軒)이라는

익각(翼閣)을 달고 있으며, 함광문(含光門)·청향각(淸香閣) 등과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진은 지금의 대조전 내부다,

대조전은 용마루가 없는 건물이다, 궁궐에서 용마루가 없는 건물은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그러므로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이다, 그리고 둘레에는 양심합(養心閤)·경훈각(景薰閣) 등이 있고 이들 건물 뒤로는 여러 단의 화계가 장대하게

구성되어 있다. 19세기경에는 이곳에 청기와를 덮은 2층 누각인 징광루(澄光樓), 대조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는 건물인 집상전(集祥殿)과

주변의 수많은 행각들이 있어 더욱 장려한 구성을 하였다.

대조전 내부,

대조전 동쪽에 있는 흥복헌(興福軒)이다, 태조 이성계가 1392년 새로운 왕조를 열었던 조선은 519년이 지난 1910년

8월 22일 이곳 창덕궁 흥복헌에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고 한일 병합 조약 체결로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일제에 의해 폐위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 순종은 이곳 흥복헌에서 1926년 승하했다, 이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날,

학생 중심의 항일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경술년에 당한 나라의 수치인 경술국치(庚戌國恥) 장소가 이곳이다

대조전 동 서 남 북, 사방향에 각각의 행각들이 있는데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마루를 깐 이런 형태의 방들이 있다,

- 문화재청 자료를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