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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서울둘레길 8코스 - 8, (빨래골 ~ 본원정사 - 2015년 3월 8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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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둘레길 8코스 - 8, (빨래골 ~ 본원정사 - 2015년 3월 8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5. 3. 8. 21:58

여기는 빨래골 탐방안내소 가 있는곳이다, 빨래골에서 궁녀들의 이야기를 떠 올리다가

다시 둘레길로 들어선다, 탐방안내소 입구의 길은 잘 꾸며진 산길로 마음마저 편안해 지는 그런 길이다,

 

 

빨래골에서 약 400m지점에 구름 전망대가 있다,

그런대도 사람들은 여기를 하늘전망대라 부른다, 흰구름길구간이니 당연히 구름전망대 일텐데

왜 그렇게 부를까?  이유는 간단했다, 전망대 이름이 안내되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내되여 있다면 잘 안보여서 그런것 같았다, 나도 못 보았어니까,..

북한산 둘레길에 하늘 전망대는 구름정원길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독바위역 앞 힐스테이트 3차 아파트를 끼고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된다,

하늘 전망대에서는 은평구가 내려다 보이고 날씨가 좋을때는 남산과 선유도 부근의 한강도 보이는 곳이다,

구름전망대에 올랐다,

북한산 인수봉과 도봉산 신선봉이 한 눈에 짜악 들어온다,

강북의 시가지도 끝이 없이 이어지고, ~

2015년 3월 8일  나도 이 자리에 있었노라

인증샷도 한장 남기고 ~

 

 

구름전망대를 내려서서 다시 우이동 방향으로 간다,

 

 

 

 

이곳은 빨래골에서 약 2km거리에 있는 수유1동 화계사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조선 인조때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던

김상현은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고국을 삼각산과 한강수로 표현하며 눈물을 흘렸다.

삼각산과 한강수는 서울의 상징이자, 궁궐이 그 사이에 있으니 나라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서울 하면 한강이요, 삼각산 하면 서울을 떠올린다.
 
화계사(華溪寺) 일주문 바로 앞까지 주택들이 들어선 도시의 절이지만 숲이 울창해 산사의 분위기를 풍긴다.

화계사는 1522년(중종 17)에 신월선사(信月禪師)가 창건한 절로 원래는 고려 때 법인대사(法印大師) 탄문(坦文)이 화계사 인근에

보덕암(普德庵)을 세우고 오랫동안 법등을 이어왔는데, 신월 선사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짓고 절 이름을 화계사라 했다.

 
화계사는 창건 때부터 왕실 가족이 참여하였다. 신월이 서평군(西平君) 이공(李公)의 도움을 받아

법당 3처(處)와 요사 50칸을 짓고  절 이름을 화계사(華溪寺)라 했는데. 100년도 지나지 않은 1618년에 화재로 전소되어

이듬해 3월 도월(道月)이 재건하였는데, 이때는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 시주를 했다고 한다.

화계사가 창건된 조선시대는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장려하는 정책을 펴던 시기였다.

그런 까닭에 조선시대 500년을 우리나라 불교의 역사에서는 가장 어두웠던 시대로 꼽는데, 흥미로운 점은

정책적으로는 불교를 탄압하였으나 실제로는 왕실에서까지 불교를 믿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서울 근교에는 화계사를 비롯해 도선사와 흥천사, 망월사 등 왕실 사람들이 드나들던 절이 꽤 많이 남아 있다.

왕실의 비호 아래 절의 특색을 살리면서 착실히 발전해온 화계사는,

특히 흥선대원군의 원찰이라 불릴 정도로 흥선대원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원군이 화계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부인 여흥 민씨가 이 절에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원군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된 일화가 이 절에 전해진다.

 

어느 여름날, 대원군이 남루한 차림으로 화계사를 찾았다.

목이 말랐는데, 때마침 느티나무 아래에서 동자승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 사발을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신기해서 연유를 물으니 만인萬印 이라는 스님이 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원군은 만인을 만나게 되었으며,

만인은 대원군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 자손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충청도 덕산德山의 가야사 伽倻寺 금탑 자리가 제왕지지 帝王之地 이니,

남연군 묘소를 그곳으로 이장하면 제왕이 될 귀한 왕손을 얻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후에 대원군이 가야사를 찾아가 돈을 써서 금탑을 허물고 그 자리에 남연군의 묘를 썼다.

본래 남연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에 있었으니, 500리나 되는 곳으로 옮긴 것이다.

 

묘를 이장한 지 7년 후인 1852년에 둘째 아들 재황을 낳았는데,

그가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이다.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대원군이 오랫동안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대원군은 절 중창을 위해 시주를 하였으며, 전각 곳곳에 자신의 글씨를 써놓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한글학회 주관으로 이희승, 최현배 등 국문학자 9인이 화계사에 기거하면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집필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화계사에서 이어지는 길은 둘레길 구간길이 있고, 구길인 지름길도 있다,

오늘은 정상적인 둘레길로 간다, 그러나 이길은 계단과 돌등으로 잘 만들어 놓았어나 조금은 가파른게 흠이다,

가파르면 힘든길이니 그게 흠이라면 흠일테지만 산길이 마냥 편하기만 하다면 그것도 재미가 덜 할게다,.

 

 

 

 

 

 

 

 

 

 

화계사에서 419 묘지로 가는 길에 본원정사()가(수유5동) 있다,

이 절에는 한국전쟁때 태고사에 불이 나서 옮겨왔다고 하는 목조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미륵불 사이인 부처님 없는 시대에 중생들을 교화하는 대비보살이다.

특히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지옥에 들어가 교화해 제도하는 보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장보살본원경》에는 지장보살이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한 서약의 내용이 있다.

즉, 지옥이 텅 비지 않는다면 결코 성불을 서두르지 않겠나이다. 그리하여 육도의 중생이 다 제도되면

깨달음()을 이루리다. 이는 한시바삐 성불하여 부처님과 같은 거룩한 모습을 갖추겠다 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세상이 다할 때까지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고 그들을 남김없이 해탈케 한 다음 부처가 되겠다는 것이다.

즉, 모든 보살과 부처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가되는 본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 이름이 본원정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