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능내역과 다산유적지 가는길(2020년 3월 8일) 본문
이 길은 구, 중앙선 철길이다,
지금은 폐역이 된 능내역으로 가는 길이다, 보이는 강은 팔당호다,
팔당댐이다, 팔당댐이 있는 곳은 두미협(斗迷峽)이다.
두미협곡을 지나는 한강을 두미강(斗迷江)이라 불렀고 여기에 두포(斗浦)가 있었다.
두(斗)는 용량을 재는 그릇인 말, 을 뜻한다. 옛 나루터인 두포에 들어선
오늘날의 팔당댐이 저수량을 재고 조절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사람은 산이모이고 물이 합처지는곳에 살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까, 팔당호에서부터 서해까지는 대한민국의 심장이라고 불리워도
손색이없는 수도권의 도시가 형성되고 발전되여왔다,
팔당호는 물의 천국이다. 이 물의 천국은 크게 세 권역으로 나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가 있는 능내리의 다산권, 두물머리의 양수리권, 광주권이다.
팔당호는 천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산과 산이 서로 손을 맞잡는 모습과
하늘 건너가는 구름이 그사이로 삐집고 들어오는 풍경화를 그려낸다,
강가에 말을 세우니 저 멀리로 붉은 명정이 바람에 펄럭거렸네.
물위로 구불대던 배의 돛대 그림자는 강안을 돌아 나무에 가리게 되자 다시는 볼 수가 없었네.
강가의 검푸른 먼산들은 마치 누님의 쪽진머리같고, 물빛은 누님의 화장 거울같고,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어라. -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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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1년 9월 연암이 두포에서 양평 아곡으로 떠나가는
누님의 상여가 실려있는 배를보며 읊은 시다. 세상을 뜬 누님를 그리는 동생의
절절함은. 영원히 사라져가는것, 그래서 추억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담담하게 읊었다.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만 같은 상상을 불러온다,
中央線은 일본이 조선을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경부선에 이은
조선 제2의 종관선을 건설해 경상북도, 충청북도, 강원도, 경기도등 4개 도에 걸친 내륙 일대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수탈하고, 날로 증가하는 조선, 만주, 일본 간의 여객, 화물의 수송을
원활히 할 목적으로 이 노선을 건설했다.
청량리-양평 간 52.5㎞는 1939년 4월에, 양평-원주 간 55.9㎞는 1940년 4월에,
원주-단양 간 74.3㎞는 1942년 2월에 개통되었고, 남부의 영천-우보 간 40.1㎞는 1938년 2월에,
우보-안동 간 48.9㎞는 1940년 3월에, 안동-단양 간 73.5㎞는 1942년 2월에 개통되였다,
능내역이다, 1956년에 개통되여 64년동안
문을열었든 간이역이다
능내역(陵內驛)은 2008년 12월
중앙선 광역전철 운행구간이 국수역까지 연장되면서 선로가
이설되여 자연스럽게 페역이된다,
페역이된 능내역을 대신해서 이곳에서 3,5km 정도 떨어저 있는곳에
운길산역이 신설되였다,
능내역은 페역이 되였지만 역(驛)사는 그대로 남아
옛 정취를 그대로 보여준다,
매표구앞 나무로 만든 장의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열차를 기다리며 앉았든 의자일게다,
역(驛)청사 현관문 위 벽에 높게 걸려있는 여객운임표와
열차시간표가 남아있다, 지금 우리가 돌아갈 청량리행 무궁화 열차는 18시 12분이다,
이 열차를 기다리면 언제나 올까?
역무원이 근무하든 일터인 문이 잠겨있는 사무실을 들여다 본다,
책상의자라도 몇개 놓고 그시절을 재연해놓았어면 좋았을텐데 지금은 그냥 창고다,
국수리로 달려가는 철로와
청량리로 달려가는 철로는 아직도 남아 있는데
지금 능내역에는 관광객들의 발길만 분주하다,
이제는 능내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든 사람들은 간곳이 없겠지만
그 시절을 모르는 사람들도 기차가다니든 철도라는 생각만으로도 이곳으로
와보고 싶은 장소가 되였다, 많은 사람들중 젊은이들이 대다수 인것을
보니 세상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모양이다,
능내역 이야기 안내판이 있다, 내용을 읽어보니
팔당역과 양수역 사이에 있든 능내역은 1956년 5월 역무원이 없는 무배차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했어며 2001년 신호장으로 변경되였다가 2008년 12월에
중앙선 선로가 이설되여 더이상 기차가 지나가지 않아 자연스럽게
역이 폐지되였다고 알려준다,
4대강 자전거길과 보행로가 함께하는 구, 중앙선 철길을 따라
운길산역 방향으로 간다,
몇백m 쯤 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도로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가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다산유적지는 능내역에서 약 1km 는
될것같은 거리에있다,
정약용선생의 유적지가 보인다,
정약용 선생은 1762년(임오년 영조38년) 음력 6월 16일,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사진에 보이는↓이곳)
아버지 나주정씨(羅州丁氏) 재원(載遠) 과 해남윤씨(海南尹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약용선생이 7세 때 지은 산 이라는 시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어렸을때부터 학문에 뛰났든 정약용 선생은 자신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가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이다.
정약용 선생이 두 살 되던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정약용 선생은 성호의 글을 접하고 학문을 굳히게 된다.
도르래를 이용하여 큰 물건을 들어올리는 기중기
인문뿐만이 아니라 과학에도 깊은 업적을 남기신 정약용선생,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든가,
팔당역에서 이곳까지 예빈산을 넘어 왔어니 점심으로 부대찌게
다산선생은 21세 때부터인 1783년 서울에서 관직생활을한 18년과
강진에서 유배생활을한 1801년부터 17년간을 제외하고는 주로 이곳에서 생활을했다,
이곳은 선생이 태여난 곳이자 죽어서도 잠들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운길산역으로 가야 하는데 약5,km 정도의 거리다,
느긋하게 걸어도 될거리지만 이곳에서 운길산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평일에는 버스시간이 있는데 주말에는 오고 싶어면 온다는 버스지만
기다려 보는것도 여행의 묘미 일지니 마다하지 않는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노론과 남인의 당쟁이 1801년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포항장기로 유배형을 받았고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시 강진으로 유배지가 옮겨진다.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다산유적지에서 버스를 타고 운길산역으로 가는데 2차선 도로가 꽉 막혀서
중간에 내려서 걸어간다, 트랭글앱도 껏고 카메라도 배낭에 집어 넣었어니 손에든 폰으로
사진기록을 하면서 간다, 양수리로 건너가는 구, 철교가 보인다,
철교를 건너가면 양수리다,
철교 입구에서 왼쪽 운길산역으로 간다,
운길산역사가 보인다,
중앙선은 서울에서 시작하여 경상북도 경주까지 중부내륙지방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총연장은 383.0㎞의 철도로. 우리나라의 남북을 관통하는
철도로는 경부선 다음으로 중요한 노선이다.
수도권 전철 경의, 중앙선은 경의선, 용산선, 경원선, 중앙선, 등을 경유해
문산역과 지평역에서 서울역을 잇는 수도권 전철이다.
2020년 3월 8일 팔당역에서 시작한 여정은
팔당2리 예빈산, 능내역, 다산유적지등을 거처서 이제 돌아간다,
오늘하루도 함께 해준 동료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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