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2) - 덕포진(2015년 7월 12일) 본문
덕포진 쉼터에는 덕포진 둘레길이 있는곳이기도 하다,
대명항 1,3km 지점에 있는 이곳 덕포진 둘레길은 평화누리길 구간중에서는
제일 아름다운 곳으로서, 아이들과 함께하기는 최적의 장소다,
이곳 둘레길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고 풍부한 해산물이 있는 대명항과 맑은 물이 솟아올라
공기와 접하면서 붉은색으로 변하는 홍염천이 있는 약암온천도 지근 거리에 있다,
사적 제292호. 지정면적 48,794㎡.
이곳은 돈대(墩臺)와 포대(砲臺) 및 파수청(把守廳)이 있던 곳으로,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66년(현종 7) 강화에 예속된 진이었다고 하며,
1679년(숙종 5) 강화의 광성보(廣城堡), 덕진진(德津鎭), 용두돈대(龍頭墩臺)와 함께 축성되었다.
돈대의 위치는 한성으로 통하는 바닷길의 전략요충지로서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함대와, 신미양요 때는 미국함대와 싸웠던 격전지가 이곳이다.
돈대터에서는 1874년(고종 11)에 만들어진 포와 포탄 등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화도의 광성보와 맞서 있는데, 시야가 막힌데다가 해협이 매우 좁고
물살이 빠르며 소용돌이치므로 적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돈대와 포대의 중심부에는 파수청터가 있다,
이곳은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는 동시에 포병을 지휘한 장소로 생각된다.
1980년의 발굴조사 당시 7개의 포탄과 상평통보(常平通寶) 2개가 출토되었고,
건물터에서는 주춧돌과 화덕자리가 발견되였고, 건물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추정되며,
둘레에 맞담을 쌓듯이 둘러친 석벽이 있었다.
염하(鹽河)에 흐르는 역사,
김포와 강화도 사이에 있는 물길을 염하(鹽河)라고 한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해 서해로 흐르는 물길이다. 양안 사이 거리는 1㎞ 남짓하고 물살은 거세다.
김포와 강화도 해안에는 곳곳에 해군 부대가 있었다. 김포 서쪽 해안에는 덕포진,
강화도 동쪽 해안에는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가 대대급 진영이었다.
동과 서에서 퍼붓는 포격으로 한양으로 진격하는 적을 제지할 수 있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신한 조선 왕실도 그렇게 생각했다. 착각도 어마어마한 착각이었다.
김포를 점령한 3만 청군 병력이 염하 한가운데에서 쏴댄 홍이포(紅夷砲)에 갑곶진은 초토화됐다.
서양 대포를 개량한 홍이포는 최대 사거리가 700m다. 지금 김포와 갑곶진 사이에 놓인 강화대교는 길이가 780m다.
패전 후 조선 왕실은 강화도 해안에 진과 보와 소대급 돈대를 설치하고 홍이포를 도입했다.
세월이 흘러 1866년 10월 16일 프랑스 극동 함대가 염하에 나타났다.
천주교 박해를 구실로 개항을 강요하려는 의도였다. 이번에는 군기가 빠져 있었다.
그 누구도 프랑스 군함도, 상륙하는 600명의 병사도 제지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옛 고려 궁터 강화 유수부를 점령해
11월 21일까지 한 달여 동안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를 약탈한 뒤 불을 지르고 퇴각했다.
이게 병인양요다. 전소(全燒)된 강화 유수부에는 지금 복원된 외규장각이 서 있다.
갑곶진 자리에는 갑곶돈대가 복원돼 있다.
염하(鹽河) 1871년, 신미양요
서울에서 88올림픽도로를 타고 김포로 빠지면 대명포구 가는 길이 나온다.
덕포진은 그 옆이다. 2001년 그 옆으로 초지대교가 개통됐다. 항구를 즐기고 다리를 건너 우회전하면
초지진이 나온다. 해안 도로를 따라 북상하면 덕진진이 나오고 광성보가 나온다.
1871년 6월 1일 미 아시아 함대 군함 5척이 염하에 나타났다.
5년 전 평양에서 벌어진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 습격 사건을 핑계로 개항을 요구하러 온 것이다.
광성보 포수가 홍이포를 발사했다. 덕포진,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에 있는 포 수백 문이 불을 뿜었다.
미군이 "남북전쟁 때도 그렇게 엄청난 폭격은 경험하지 못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대규모 포격이었다.
그러나 배에는 포탄은커녕 물보라도 튀지 않았다.
열흘 뒤 미 해군과 해병대는 염하를 북상하며 초지진부터 덕진진, 광성보까지 초토화시켰다.
해병대는 조선군이 퇴각한 덕진진을 무혈점령 했다. 그리고 광성보에서 최후의 전투가 벌어 졌다.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 해군 350명은 탄환이 떨어지면 창과 칼로 싸웠고 돌을 던지고 흙을 뿌렸다.
한 시간 남짓한 광성보 백병전에서 미군 3명이 전사하고 조선군은 350명 전원 전사했다.
부상당한 병사는 자기 목을 칼로 찌르거나 바다로 뛰어들었다.
전투가 끝나고서 미군은 함대를 향해 퍼붓던 포격이 불꽃놀이로 변한 이유를 알게 됐다.
조선군 대포들이 죄다 통나무 포좌에 고정돼 있는 데다 성벽에 뚫린 포문 또한 좁고 길어서
포를 조준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뜨겁던 여름날 조선군은 면과 솜을 열세 겹 덧댄
방탄복을 입고 있었다. 총알이 스치면 불이 붙었고, 미군 소총은 사정거리가 900m였으니
120m 나가는 화승 총탄 막겠다는 방탄복은 무용지물이었다.
조선군은, 맨주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은 용맹했으며 애국적이었다.
아시아 함대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가족과 나라를 위해 그처럼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은 군인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튿날 미군은 조선군 대장기(大將旗)인
수자기(帥字旗)를 함상에 싣고서 염하를 빠져나갔다.
초지진 성벽과 소나무에는 그때 포격을 맞은 흔적이 남아 있다.
광성보에는 어재연 장군과 동생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무명 병사들을
무덤 일곱 기에 모은 신미순의지총도 있다.
2000년 광성보 전사들을 기리는 광성제에서
신미양요 때 전사한 미군 매키 대위와 광성보 전투를 지휘한 어재연 장군의 후손들이
악수를 했다. 신미양요를 연구한 영남대 외국어교육원 교수 토머스 듀버네이가 주선했다.
2007년 수자기(帥字旗)도 반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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