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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에서 1400년의 역사를(2011, 7, 3)조블뉴스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금산사에서 1400년의 역사를(2011, 7, 3)조블뉴스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1. 7. 3. 23:16

 

아침부터 내리든 폭우가 잠시 멎은  2011년 7월 3일 오후 전북 김제시 금산리에 있는 금산사를 찾았다, 

금산사는 흔히 통일신라 시기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남아있는  금산사 사적의 기록에 의하여 금산사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후 금산사의 모습이 크게 부각된 것은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때 진표율사에 의한 중창 때문이라고 한다

금산사에 오르는 산길에서 모악산 금산사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처음 만난다,

일주문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며. 기둥이 일직선상의 한 줄로 늘어서 있어 일주문이라 부른다.

세속의 번뇌로부터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로 향하게 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는 문이다.
금산사 일주문은 1975년에 새로 세운 목조 맞배지붕 양식으로 되어 있다,

금산사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처음 만나는 천왕문이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 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안에는 사방에서 불법을 외호하는 사천왕상을 봉안하였다.

외호신이란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며, 동, 서, 남, 북 네 곳을 지키게 된다,

이 곳 천왕문은 1994년에 가람을 중수하면서 새롭게 조성한 곳이다,

천왕문을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웅장한 누각 건물이 보이는데 이 건물이 보제루 이다,

보제루는 앞면 7칸, 옆면 3칸의 2층 누각식 건물로서

아래층은 절 앞마당으로 오르는 계단 역할을 한다.
사찰에서 누각 건물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의 일이다.
잦은 외침에 따라 승병이 조직되고 사찰이 의승군의 결집장소가 되면서

군사적 필요에 의해 누각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보제루 건물 아래서 마주보이는 건물이 미륵전의 서쪽 즉 가람의 중심에 대적광전이 자리한다.
대적광전은 연화장 세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불로 모신 건물이다.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는 주로 이 전각을 본전으로 건립하며,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여 화엄전, 비로자나불 을 봉안 한다고 해서 비로전 이라고도 부른다,

좌측은 대적광적, 오른쪽이 금산사의 대표적인 미륵전이다,

그 앞 마당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보리수 나무,

좌측건물이 보제루 고 마주 보이는 누각은 범종각이다,

 보제루를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국보 제62호인 웅장한 규모의

미륵전이 보인다.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분의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화 한 법당이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사찰 속에 응축시킨 것이 미륵전이요,

먼 미래의 새로운 부처님 세계에서 함께 성불하자는 것을 다짐하는 참회와 발원의 장소이다.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 21년(762)부터 혜공왕 2년(766) 사이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세웠다,

안에는 미륵장륙상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남쪽 벽에 미륵과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된다.

지금의 모습은 인조 13년(1635)에 수문대사가 재건하였다.
미륵전은 용화전, 산호전(山呼殿), 장륙전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을 지녔다.

특이하게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

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미륵불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삼존불 중의 협시는 8.7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 한 분만이

모셔졌었다. 그 뒤 조선시대에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 삼존불로 봉안했는데,

1934년에 실화로 일부가 소실되었다.

 

4년만인 1938년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김복진

(金復鎭, 1901~1940)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해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미륵본존은 거대한 입상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불단 아래의 거대한 청동대좌는 정확한 조성시기를 알 수 없지만

잦은 소실과 복원의 과정에서도 오랜 세월동안 그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불상을 받들고 있는 역사의 대변자가 되는 셈이다.

본존불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왼손 역시 손가락을 조금 오므렸지만 밖을 보이게 한 시무외인이다,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과,

 적멸보궁이 고풍스러운 멋을 풍긴다,

미륵전에서 앞에서 돌아본 보제루,

뜰안에 심어저 있는 나무는 모두 보리수 다

미륵전 앞 오른쪽에 위치한 대적광전, 

송대 오층석탑앞 에서 불국의 천국을 바라본다 

미륵전 옆 계단으로 적멸보궁으로 올라 가는 방등계단 

적멸 보궁은 방등계단 옆의 옛 나한전 자리에 세워진 禮拜閣 으로

유리벽을 통하여 방등계단에 있는 사리탑에 경배하며 예불을 드리는 곳이다.
불전 내부에는 따로 불단을 차려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예는 통도사 대웅전과 같은 경우이다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즉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979년(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도라고 부른다

송대(松臺) 오층석탑에서 바라본 미륵전,

대적광전 뒤에는 나한전(앞) 과 조사전(옆)이 있다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 보물 제23호 석련대(石蓮臺)가 있다.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그앞에 있는 뽀족한 탚은 육각다층석탑으로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하며 보물 제27호이다.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적 석탑이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력하고 장식적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다

대적광전 뒤에 있는 나한전,

소승불교의 최고의 경지에 오른 나한에 대한 신앙을 하는 전각이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서 의역하여 살적(殺賊), 응공(應供), 응진(應眞)이라 한다.

살적은 수행의 적인 모든 번뇌를 항복받아 죽였다는 뜻이며,

응공은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뜻이며, 응진은 ‘진리에 상응하는 이’라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나한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主佛)로 하여 5백인을 모신 오백나한전과

16나상을 모신 응진전으로 대별된다, 원래 금산사의 나한전은 방등계단과 오층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하였기 때문에 계단예배전(戒壇禮拜殿)이라고도 불렀다.


안에는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하여 문수, 보현보살을 봉안하였다.

또한 석가여래의 여러 제자 가운데 으뜸이라고 하는 아난과 가섭을 모셨고, 16나한상과

2인의 시자상도 목조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전각이름에 걸맞게 소형의 오백나한상을

계단식의 단을 마련하여 가득히 봉안하였다 그뒤에 있는 건물이 조사전 이다, 

 나한전 계단을 내려서니 오층석탑과 미륵전이 올려다 보인다

대적광전의 우측으로 대장전과 나란히 명부전이 서 있다.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사찰 속으로 옮겨 놓은 전각이다.
이 전각 안에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고,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이라도 한다.
명부전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중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 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

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고 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고려시대의 조성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대적광전이 지금의 웅장한 규모를 갖게 된 것은 정유재란 때 절이 전소된 후

1635년 수문대사의 중창에 의해서였다.  이후 영조 52년(1776)에 금파대사의 법손인

두월장로가 중수하였고, 1926년과 1938년 미륵전 보수시에 수리되었다.

 

수문대사가 중창할 때 따로 따로 모셨던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과 여섯 보살을 함께 모심으로써 대적광전 하나로 통합해 창건했다.

금산사가 미륵전을 토대로 미륵신앙을 표방하였지만 한국불교의 이러한 통불교적

경향은 고려시대 이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마침내 대승불교의

대표적 부처와 보살을 모두 수용한 대 전각을 건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적광전의 내부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5 여래와 그 협시로서 6 보살을 봉안하였다.

5여래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서부터 아미타불.석가모니불, 노사나불 그리고 약사불이다.

6보살은 역시 왼쪽에서부터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이다.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여

연화장 세계를 상징하게 된다. 삼신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말한다

 

금산사의 대적광전에는 특이하게 5 여래 6 보살이 모셔진 것이다.

이는 한국의 불교의 특징인 통불교(通佛敎)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불타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파에 치우침이

없었고,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일찍부터 체득했던 때문이다,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둥근 모양의 보물 제23호 석련대(石蓮臺)가 있다.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이 석련대의 위치가 지금의 제자리인지 다른 자리에서 옮겨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을 감안한다면 제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려시대 이후 언젠가 절을중창하면서 석련대가 놓였던 전각은

사라지고 그 위에 봉안된 불상은 다른 전각이 새로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이 정도의 대좌가 필요했던 불상이라면 그 규모도 엄청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금산사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역시 이 대좌의 주인공은 미륵장륙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뒤따라야 한다.  즉 석련대의 조성 시기가 미륵장륙상을 봉안했던

8세기 후반과 맞아 떨어져야 하지만  이 석련대를 대개는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정확한 문헌자료가 없을 때는 작품의 양식을 통해 조성시기를 판단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석련대의 경우는 충분한 역사적 정황이 성립될 수 있으므로 통일신라 하대의

작품일 것이라는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금산사를 돌아 나오면서 보제루 아래에 서니 천왕문이 멋스럽게 보인다

천왕문을 지나 밖으로 나서면서 또하나의 문, 금강문에 이른다,

금강문은 대개 천왕문의 대문에 금강역사의 모습을 그려 놓거나,  때로는 천왕문 안에

조각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금산사와 같이 금강문을 천왕문 앞에 별도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

금강역사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대체로 불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담당하며,

인왕역사 라고도 한다. 이 신은 여래의 온갖 비밀스런 사적(事蹟)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5백의 야차신을 거느리고 현겁 천불(千佛)의 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금산사를 나와 만나는 계곡

산이 깊고 역사도 깊어서 인가, 계곡마저 아름 답다

 견휜은 892년(진성여왕 6)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光州)를 점령하고

900년(효공왕 4)에 완산주(全州)에 순행하여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왕에 오른다,

견훤은 많은 아내를 두어 10여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에서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을 특별히

사랑하여, 왕위를 그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935년 3월 견훤의 넷째 아들 금강은 신검에게 죽임을 당하고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당했다.

금산사에 석달 동안 있다가 그해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하여, 고려에 고려에 의탁한다, 그뒤 후백제는 왕건에 의하여 멸망한다,

금산사와 견훤대왕. 사람은 가고 없지만 역사는 아직도

모악산 기슭에 영원히 살아남아 있는것 같다

금산사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금산사 홈피 및 안내판을 참고하여 작성 한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