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북한산行宮과 山映褸 그리고 中城(2008,4,19) 본문
↑ 실제 행궁 사진,
북한행궁은 북한산성 축성시인 조선 숙종 37년(지금부터 약 300년전인 1711년) 5월에
착수하여 이듬해 5월에 완성 되였으며 내전과 외전을 합하여 124칸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내전은 좌우상방 각2칸, 대전6칸, 사면회 18칸을 합한 28칸의 정전외에도 부속건물이 35칸이 였으며
외전은 내전과 같은 규모의 정전 28칸과 33칸의 부속건물로 구성된 비교적 웅장한 모습이였다,
평상시에는 북한산 문고를 마련하여 실록등 고문헌을 비밀리에
보관해 왔으며 역대왕 가운데 숙종과 영조가 이곳을 찾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 행궁지(行宮址)
북한산 상원봉 아래 자리한 이곳은 전란시 임시로 거처하기 위하여 건립한 북한행궁이
있든곳이다, 행궁은 전란에 대비하여 구한말 까지 관리가 계속 되여 왔으나 일제에 주권을 빼았긴후
방치 되다가 1915년 8월 집중호우시 무너져 소실 되였다,
↓ 산영루(山映褸)
험한 돌길 끊어 지자 높은 난간 나타나니 겨드랑이에 날개 돋쳐 날아 갈것 같구나
십여곳 절간 종소리 가을빛 저물어 가고 온산의 누런 잎에 물소리 차가워라
숲속에 말 매어두고 얘기 꽃 피우는데 구름속에 만난 스님 예절도 너그럽다,
해 지자 흐릿한 구름 산 빛을 가뒀는데 행주에선 술상을 올린다고 알려 오네
- 다산이 산영루를 노래한시 -
경치가 아름다워 조선시대 에는 詩會 가 자주 열린 것 으로 알려진
이 누각은 화재로 소실 되여 현재는 사진에 보이는 것과 같이 주춧돌 13개만 남아 있다,
산영루는 고양시 덕양구 북한산동 1-1번지 중흥사 밑 비석거리 앞 절벽위에
세워진 누각으로서 그 실제 모습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최근 1920년대에 찍은것으로
추정되는 산영루 사진이 공개 되면서 그 실제 모습이 확인된다,
조선시대 수많은 시인들이 아름다움을 노래한 북한산 태고사 계곡과 중흥사 계곡을 따라가 본다,
북한산 중성(中城)
전면의 성곽은 북한산성 축성 다음해인 숙종 38년(1712) 산성수비 보완대책의
일환으로 축조한 중성이다, 당시 별도의 중성을 축조한 이유는 지형이 평탄하고 취약한
대서문 방면이 적에게 뚫리더라도 병목과 같은 이 일대 계곡을 차단하여 행궁, 유영,
창고등 성내 시설물과 인명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함이였다,
성곽의 규모는 영취봉과 중봉 방향으로 약 200m에 달하며 성문으로는
홍예 형태의 중성문과 그 외에 시구문, 수문을 건립하였다, 중성문의 단층 문루는
19세기말, 수문은 1915년 8월의 홍수에 소멸된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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