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처다보는것 만으로도 현기증이 난다, - 북한산 노적봉,(2009년 6월 28일) 본문
북한산동 입구에 들어서서 아스라히 바라 보이는 노적봉으로 올라간다,
백운대, 만경대에 이어 웅장한 모습의 노적봉은 참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북한산성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중성문이 나온다,
이 중성문은 북한산성 축성 다음해인 숙종 38년 1712년에 산성수비 보완 대책으로 만든,
지금으로 치면 1차 저지선인 대서문이 뚤리면 2차 방어 성문으로 축조 되였다,
옆 무너진 성곽 계곡수문은 1915년 8월 대홍수때 허물어 졌다,
녹음이 짖게 우거진 북한산성내 계곡길은 등산을 즐기는 인파로 가득찼다,
나도 이 인파속에 떠밀려 한참을 올라가다 노적사 입구로 들어선다,
노적사입구 운하교를 건너 한적한 오솔길을 따라 노적사에 도착하니
노적사 지붕위로 장엄한 노적봉이 구름처름 걸려있다, 보는것 만으로도 숨이 턱 막힌다,
어차피 이코스로 노적봉 정상에 오르려면 암벽등반을 해야한다,
노적봉이 더없이 깨끗하여 티끌하나 없고, 만고의 청풍이 노적봉에 불어와 맑고 밝은 기운 돌아오는구나.
산영루를 던지고 험악한 산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이라 새겨져 있어
돌길을 따라 진국사 절문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구렁을 이루며 물소리 맑게 들리어라.
이 시는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가
노적사의 전신(前身)인 진국사(鎭國寺)를 읊은 것이라고 한다
노적사 대웅전 앞뜰에서 건너다 보이는 국녕사,
1712년 성능(聖能) 스님이 북한산성 도총섭이 된 이후에 승병이 머무르는
군영(軍營)으로 창건되였다는 절이 그림처름 서 있다
노적사에서 나와 왼쪽 산길로 올라간다, 초입에는 절뒤 텃밭으로 올라가는길이 나있다,
이 길이 노적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맞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따라 올라간다,
바로앞에 노적봉이 떠억하니 자리하고 있으니 길 잃어버릴 염려도 없겠지, 조금 더 올라가니 길은 끊어지고
온통 울퉁불퉁한 돌덩이만 나온다, 자세히 살펴보니 여기있는 이 돌덩이들은 땅에 솟아 올라온 바위들이 아니고
위에서 굴러 떨어져 내려온 돌이다, 노적봉에서 오랜세월 풍파를 견디다 못한 바위들이 굴러 떨어진듯 하다,
그렇게 길도 없는 돌무덤을 헤치고 암릉을 기어 올라가니 눈 앞에 나타나는
거대한 백악, 저 위 암벽에 외줄 로프에 온몸을 맏긴채 암벽등반을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점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처자보는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다 못해 아예 멎어버린다,
저 봉우리 위로 올라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백악
중턱에 서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알수없는 흥분에 휩싸인다,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리고 몇장인지 가늠할수도 없을 만큼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손이 떨린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신기하다,
한줌흙도 없는 저벼랑에 무척이나 많은 소나무들이 터를 잡고 있다, 스며들 물도, 자라는데 필요한
영양분도 없을터인데 어떻게 살아있지, 이런걸 어떻게 이해 해야 하나, 이게 자연의 힘인가, 아니면 신의 뜻인가,
그래서 그런지 암벽을 타는 사람들도 나무는 스치지도 않고 바위만 타고 올라 간다,
말이 없어도 가슴으로 통하고, 글 몰라도 뜻은 안다,
속 터지도록 품었던 노적봉, 세상사 무거운 모든 짐들 노적사 뒷뜰에 내려놓고 왔는데,
왜 이리 힘들어, 떠나는 사람 뒷모습 처럼, 말못하는 바위 있으면 글로 적어봐,
귀먹어리일지 몰라,
산중에 사람이라고는 암벽에 붙어 있는 산꾼외에는 없으니 내 맘대로다,
나도 모르게 절로 노래가 나온다, 아주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다 볼 것 없어,
정말 높이 올랐다 느꼈었는데 내려다 볼 곳 없네, 처음에는 나에게도 두려움 없었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넘어질수 있어~ 이제와 주저앉아 있을수는 없어 내가 가야할
이길에 지쳐쓰러지는 날까지 일어나 한번 더 부딪혀 보는거야 ~
이른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랴,
어차피 우리는 오늘 노적봉 정상으로 올라간다,
백운대와 인수봉이 얼굴을 들이밀고 나오는것을 보니 노적봉 정상이 가까워 지나보다 ,
아무리 높아도 하늘 하래 뫼라는데,
안간힘을 다해 마지막 암벽을 올라가니 눈 앞에 버티고 서있는 만경대
백운대도, 만경대도 노적봉 딛고서 들어서는 순간, 노적봉 이마에 움찔 머리를 찧고 만다.
누군들 피할수 있으랴, 부처님 가르침처럼 커다란 노적봉을! 노적봉에 오르지 않았다면, 삼각산 바위에 대해
아는체도 마라, 삼각산 심장이 어떻게 뛰는지 아는가?, 내 심장이 앞장서 뛴다!
그리도 당당하고 거대해 보였든 원효봉도 노적봉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북한산에서는 제일 당당하다는 염초봉, 노적에서 건너다 보니 너도 발 아래구나,
의상능선도 납작 엎드려 있고, 의상 너머 비봉과 사모바위도 반갑다고 손짓한다,
보현봉과 대남문, 문수봉, 나한봉, 나월봉, 모두가 다 손을 흔들어 반겨준다,
1929년 처음으로 영국인 아처와 매크리가 공식적 기록으로 초등을 하였다고 알려진곳,
그 이후 수많은 바위길이 인수봉에 뚫리고, 803m 인수봉 등반을 통해 멀리 히말라야의 8,000m 급
봉우리까지 거침없이 정복하는 힘의 원천이 된곳, 우리나라 산악운동의 명맥을 이어가는 곳이다,
노적에서 보이는 인수봉, 어쩜 저리도 아름다울수 있는가, 이곳에서 보니
백운대와 만경대가 인수봉의 들러리 같다
오늘은 용암문을 나가 도선사 쪽으로 내려간다,
용암문에서 도선사 까지의 하산길은 이렇게 아주 평화롭다,
그저 천천히 여유를 부리면서 가다보면 어느새 왔는지도 모르게 도선사에 들어서게 된다,
1,100년전 신라말 유명한 도승이였든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인 도선사,
오늘은 일요일이라 많은 신도들이 들락거린다, 사진 우측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빼들고 계단에 주저 앉아 한참을 쉬였다
최근에 잘 꾸며놓은 듯한 여러 조형물들,
요즘에는 가는 절마다 새로운것을 만들어 대는게 바람직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기는 지금 만들어 놓아도 몇백년 지나면 문화재가 될것이니 하나도 걱정 할것이 없겠지
절 집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알록달록한 연등, 도선사도 예외는 아니다
언제나 등뒤에 커다란 포대를 걸머지고 다니며 탁발시주를 하였고
시주한 사람에게는 한가지씩 길, 흉,에 관한 말을 해주고 탁발한 물건이 포대에 가득차면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어린아이 처름 천진하고 깨끗한 마음과 모든것을 베풀어주는
자비의 화신으로 대변되는 중국 당나라시대의 걸승, 포대화상이 천왕문과 본당 사이에 있다
우리나라 불교는 예부터 일주문과 본당 사이에 천왕문을 만들어
그림으로 또는 나무를 깍아 만든 사천왕의 조상(彫像)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선사 입구에 있는 이 문은 일주문과 천왕문 역활을 겸하고 있다, 안쪽으로 천왕문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천왕문 양쪽에 버티고 서있는 사천왕을 살펴 봤다,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수미산(須彌山)의
중턱에 있는 사왕천(四王天)의 주신(主神)인 네 명의 외호신이다,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은 검(劍),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비파(琵琶),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은 탑(塔),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용(龍), 을 들고 있는데
이 사천왕은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며,
불법(佛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神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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