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선유도 이야기 그리고 집으로 가는길(2009년 10월 18일) 본문
당산철교를 지나 양화대교로 가는중간에 만들어놓은 수천개의 꽃송이 탑,
노오랗게 핀 국화가 반겨준다
선유교를지나 성산대교 아래에는 거대한 물 줄기가 솟구친다,
일명 한강 월드컵 분수, 2002년 월드컵 을 기념하는 뜻에서 202m 의 물줄기를
쉼없이 하늘로 쏘아 올린다
양화대교는 지금 한강다리 조망권공사 공사중이다,
어디 양화대교 뿐이겠는가, 한강의 모든다리가 공사중인 셈이다, 아직 다 완성되지 않은
육교를 타고 양화대교에 올라서 선유도 입구로 들어선다, 여기는 주차할곳도 없고 걸어서 오기도 힘든곳이라
지금까지의 선유도는 선유교를 거쳐야 들어가게 되여 있는데, 이렇게 강변둔치에서 다리위로 올라가는
육교를 만들고 다리위에도 카페를 만들어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내려다 볼수 있도록 하는 공사는
돈은 많이 들지는 몰라도 괞찮은 아이디어다,
양화대교는 옜날 제2한강대교라 불리웠든곳으로 한강의 두번째 다리이다,
이 양화대교위에서 선유도로 들어가는 초입부터 여느공원과는 사뭇 다른 듯한 느낌을 받는다
여기에 한강물을 끌어다가 정수를해서 강남서부지역과 마포지역 주민들의
생명수를 공급했든 선유도 정수장, 세멘트구조물을 철거 하지않고 그대로 살려서
이렇게 생태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사진에 보이는 수풀밑에도 물이흐른다
인공으로 조성을 하기는 했어도 이렇게 잘꾸며 놓았으니
이것도 몇백년 지나면 후손에게는 역사가 될터,
한가로운 대나무 산책길과 갈대숲을 지나서,
단풍이 서서히 물들고 있는 능수버들길도 지난다
이섬은 어느곳이든 어떻게 앵글을 들이대든 모두가 그림이다,
정수장으로 사용할때의 물길을 지금은 데크를 깔아
무척이나 긴 의자를 만들어 놓았다
정수장 물탱크 세멘콘크리트 벽은 담쟁이 넝쿨이 붙어 자라서 단풍으로 물들어 있고
보이는 水路 마다 모두 이렇게 단장을 해놓았다
이 거대한 물탱크에서 정수한 물로 얼마나 많은 시민이 목을 축였을까,
거대한 세멘콘크리드 물탱크를 가로질러가면서 수질을 관리하든 다리인듯한
콘크리드 다리도 데크를 깔아서 산책로를 만들고
길게 뻗은 물탱크 곳곳에서 가족과 함께온 시민들이 기념사진을 찍고있다
온통 정수장의 콘크리트흔적이 가득한 섬 선유도,
이제는 그 흔적들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새로운 생태공원으로 서울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버려진 곳을 이렇게 아름답게 가꾸고 다듬는 일도 분명 이시대에 살고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라면
그것을 마다 않고 실행에 옮긴 사람들의 용기와 역사의식에 찬사를 보낸다,
‘신선이 노니는 봉우리’라는 뜻을 지닌 ‘선유봉’은 한강의 절경 가운데 하나였다.
선유봉 강가의 버드나무 숲은 꽃이 필 때는 장관을 이뤘고, 금빛 모래밭의 풍치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1741년께 양천현감을 지내며 선유봉을 가까이했던 겸재 정선은 선유봉 산수화의 대표 화가였다. 말을 탄
선비 일행이 줄지어 모래밭을 건너는 <선유봉>은 물론, <양화환도> <소악후월> <금성평사>에 나타난
수려한 선유봉과 주변의 풍경을 보면 반세기 만의 ‘천지개벽’ 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겸재 정선은 18세기 중엽 풍류객들이 찾던
선유봉의 빼어난 경치를 그림으로 남겨놓았다.
조선 영조 때 대제학을 지낸 서명응은 <보만재집> 1권에서 서강·양화진 일대(서호)의
아름다움을 ‘서호십경’으로 읊었는데, 이 가운데 으뜸으로 ‘선봉범월’(仙峰汎月), 즉 ‘선유봉 아래 물에 비친
달’을 꼽았다. 세종에게 왕위를 물리고 명산대천을 찾아 다녔던 양녕대군은 말년에 이곳에 ‘영복정’을 짓고 한가로운
삶을 즐겼다고 전한다. 황해로 부터 수백리 물길을 헤쳐 경강(한양 부근의 한강)에 들어 오던 뱃사람들과
상인들도 한강에 비친 달과 선유봉을 보고 감탄했다.
에엥 차아
저 달 뜨자 배 띄우니
선유봉이 비치누나
선유봉을 지나치니
장유들 술집에 불만 켰네
마포에다 배를 대고
고사 술을 올려주면
한 잔 두 잔 먹어보세
헤엥 차아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에서 채록된 뱃노래)
이렇듯 선유봉 풍경이 유명했던 이유는
경강에서 강화도를 거쳐 황해로 나아가는 뱃길의 길목에 있었기 때문이다
1978년부터 서울 서남부 지역에 하루 40만t(95만명 사용분)의 수돗물을 공급하던
선유 정수장은 구리시 강북 정수장이 들어서면서 2000년 12월 문을 닫았다. 쓸모없고 삭막한 3만4천평의
회색 콘크리트 덩어리였던 선유도를 ‘호텔터’로 매각하려는 계획 등이 논의되기도 했으나. 서울시는 2년 동안의
재단장 작업을 통해 2002년 4월 한국 최초의 ‘정수장 재활용 공원’을 만들어냈다. “원래의 건물 을 어느 정도
두면서 자연을 되살린다 는 재활용의 원칙을 적용해 오늘에 이른다,
시멘트 콘크리트와 철로 만든 정수장 건물은 최신식 화장실, 아이들을 위한 환경놀이터,
원형극장, 수생식물원 등으로 재탄생했다. 선유도 공원에서는 인공과 자연의 엇갈림을 볼 수 있다.
70년대 만들어진 정수장 건물의 벽과 기둥은 시간을 거듭 할수록 낡아가고 있다. 그러나 자연의 살을 파고
들었던 거친 콘크리트 사이로 지금은 자연의 새살이 돋아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있다
예전에는 섬이 아니였어 산이였지, 누가 상상 이나 할수있겠어,
산이 섬이된것을, 이제는 거기 사람이 살았다는것을 기억하는 사람조차없어, 싹쓸어갔어
흔적도없이 고향이 사라졌지, 10살까지 선유봉아래 마을에 살았든 김광수(84)할아버지의 푸념이다,
서울 양천구 양화대교 중간의 선유도는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양화리에 속한 높이 40m의 선유봉이였다,
선유봉 남북으로 10만평이나 되는 넓은 모래밭이 있어서 양평리와 양화리로 걸어다녔고
서쪽으로는 작은 양화나루가 있어 한강건너편 큰 양화나루로 배를타고 다녔다고 한다,
양평동과 선유도를 잇는 길이 469m의 활 모양 ‘선유교’
도 인간과 환경의 친화라는 선유도 공원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10만평 모래밭에 우뚝솟았든 40m의 돌산, 선유봉 주변에는 30여가구가 살았다,
주민들은 모래 땅이라 수수나 보리, 메밀을 심거나 양화나루에서 짐을 나르며 살았다,
매년 10월 선유봉 중턱 당나무(느티나무)아래에 모여 홍수가 나지않게 해달라고 당제를 드렸다,
하지만 당제는 소용이 없었고 마을 사람들은 홍수가 나면 선유봉 계곡 용화사로 피난을
떠났다고 한다,
1925년 을축년 일제는 이 마을 사람들을 양평리로 이주 시킨다,
이때부터 일제는 한강가에 뚝을 쌓고 여의도 비행장으로 가는 도로를 놓기위해 채석장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1945년까지 선유봉의 절반이상이 깨졌다, 해방이 되자 이번에는 미군이
들어와 인천으로 가는 길을 만든다며 일제와 똑같이 돌을 캐갔다,
미군이 사라지자 다시 군출신의 윤태일 서울시장이 1962년 길이 1,108m 너비 13,4m 의
4차선 제2한강교를 건설하면서 그나마 겨우 남아있든 선유봉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주변에는
3만평의 모래밭만 남았다, 한강개발이 시작되면서 선유봉 주변에 7m 높이의 세멘트 옹벽을
쳤고 한강제방도로(현, 강변도로)를 건설한다며 선유봉앞 모래를 퍼갔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영원히 사라진 선유봉,
반세기의 애환을 고스란히 딛고 일어서서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놀이터로, 도심속의
이국적인 휴식처로 산이 아닌 섬으로 다시 태여나 이제 우리곁으로 다가왔다,
양평동 한강변 갈대숲 너머로,
월드컵분수가 뿜어내는 물줄기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솟아오르는것을
바라 보면서 집으로 가는 발길을 재촉한다,
염창교 밑 목동 입구로 들어서니 어느듯 늦은 오후 시간이다,
안양천변에 억새도 흐트러지게 피여있고,
안양천 제방용 시멘트옹벽도 세월이 흐른 탓인지 넣쿨 옷으로
단장을 하고 나를 반간다, 오늘은 여의도 까지 왕복 16km를 걸었다, 주변경관을
많이 살펴 보느라 그랬는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루종일 걸은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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