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진주성(晋州城)의 6월(2020년 6월 7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0. 6. 18. 06:00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 고려시대에는 촉석성, 조선시대 이래로는 진주성 또는 진양성(晋陽城)으로도 불렸다. 진주성(晋州城)은  현재 성내에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 순의단, 의기사, 창렬사, 호국사 등의 시설과 유적이 있어며

고려시대 말기인 1377년 빈번한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토성으로 쌓았는데, 2년 뒤인 1379년(고려 우왕 5)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돌로 쌓는 도중 왜구의 침입이 있었고, 왜구가 퇴각한 후에야 성곽 축조를 마무리한 성이다

제1차 진주성 전투는 1592년 10월 5일 부터 1592년 10월 10일 까지로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의 기습적 공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조선군은 한동안 육상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조선 군대와 의병군이 흐트러진 대오를 가다듬고 일본군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먼저 진주성을 확보한 후 호남지역을 공략하고자 했다.

1592년 10월 5일 김시민 장군은 군사 3,800여 명으로 호소카와 등이 이끄는 일본군 2만여 명의 공격을 받아 10월 10일까지 6일간 싸워 이를 물리쳤다.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가토 미쓰야스(加藤光泰)가 선봉에 선 일본군은 수적 우세와 조총 등 신식 장비를 앞세워 공격했으나 진주목사 김시민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하여 물러갔다. 이것이 제1차 진주성 전투다.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이 절의 원래 이름은 內城寺 였다고 한다, 고려말기에 왜구를 막기 위해 진주성을 고쳐 쌓고 승병을 기히기 위해 창건된 것으로 생각되는 이 절은 임진왜란 때는 승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임금께서 護國寺란 이름으로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최근에 진주성을 정화하면서 일주문 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세웠으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조성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6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로  일본군은 1592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1593년에 7만 대군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3년 2월 진주성 공격을 명령했고, 3월 10일과 4월 22일에도 연이어 진주성을 공격하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1593년 5월 20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 공격을 위해 장수 및 부대 배치를 확정했다. 제 1군은 나베시마 나오시게, 구로다 나가마사,  가토 기요마사, 시마즈 요시히로 휘하 병력 25,624명과,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휘하 병력 26,182명으로 모두 51,806명으로 편성하고

제 2군은 우키타 히데이에 휘하 병력 18,882명과 

제 3군은 모리 테루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휘하의 병력 22,344명으로 하여 모두 92,972명에 대해 진주성 공격에 직접 참여할 것을 명령했다.  

일본군은 1593년 6월 18일 의령으로 들어갔고, 다음날 군사를 돌려 진주로 향했다. 그리고 6월 19일부터 6월 21일까지 일본군은 진주 동북쪽 마현봉(馬峴峰)에 진을 치고 진주성을 에워쌌다.

그리고 제1군, 제2군, 제3군 약 7만의 병력으로 조선군과 백성들이 있는 진주성을 포위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모리 히데모토, 깃카와 히로이에 등이 이끄는 또 다른 일본군 부대인 제4군과 제5군이 진주성을 구원하러 올 조선군에 대비하여 진주성 외곽에 진을 쳤다.  

진주성 방어는 창의사 김천일의 지휘 하에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진주목사 서예원, 거제현령 김준민, 의병장 고종후, 김해부사 이종인이 각각 담당구역을 정해 일본군과 맞섰다.

외부의 조선군 지원부대가 올 것에 대비하여 2중으로 포위망을 구축한 일본군은 6월 22일 성에 접근해 공격을 시작했다. 6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8일간 진주성에서 3천여 명의 조선군과 6만여 명의 민간인 그리고 약 7만 명의 일본군 간에 벌어진 전투를 제2차 진주성 전투라고 부른다,

오랜 역사의 애환을 함께 지니고 있지만 지금은 유적이 되여버린 진주성을 잠시 둘러본다,

3, 1 운동기념비도 있고

진주지구 전승비도 있다,

진주성 ㄹ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남강과 천수교도 보인다, 

진주 영남포정사 문루(晉州 嶺南布政司 門樓)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진주성에 있는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1983년 7월 20일 경남 문화재 자료 제3호 영남포정사 문루로 지정 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조선시대 경상남도 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영남포정사의 정문이다

조선 광해군 10년(1618) 병사를 지내던 남이흥이 내성의 동쪽문을 고쳐 세우고 옆에 대변루(待變樓)를 새로 지었는데, 이것이 망미루의 본래 건물이다. 후에 영남포정사라고 하였으며, 경상남도 도청을 부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도청의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망미루(望美樓)'라는 현판은 수원 유수를 지낸 서영보가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