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병자호란 (4)
물흐르듯이 순리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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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www.gg.go.kr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조선 제16대 인조는 明명과 가깝게 지내는 정책을 펼쳤다. 당시 명과 대치하고 있던 後金 후금이 1627년(인조 5년)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 정묘호란 이며, 이 전쟁을 계기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 관계를 맺었으나 두 나라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자 국호를 淸청으로 고친 후금은 순식간에 한양으로 처들어 와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당시 남한산성 내 식량은 두 달 분량도 되지 않았다. 고립 무원 상태로 버티던 조선은 강화도까지 함락되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을 스스로 걸어 나온 인조는 청의 군대가 머물고 있던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굴욕적인 협정을 맺었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울 것을 강요했는데, 그것이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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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북문에서 산성내를 바라본다, 북문과 남한산성 행궁지가 있는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와는 붙어있다, 행궁이 있는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보니 남한산성에 오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북문은 보고 갈 정도로 인기있는 성문이다, 이 문이 남한산성 북쪽에 있는 문이라 북문이라고 하지만 이 대문의 이름은 전승문이다, 이곳 북문에서는 병자호란 당시 수세에 몰려있든 조선군이 영의정이였든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과 전투를 벌였어나 전멸을 한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문이기도 하다, 법화골 전투라 불리는 이 전투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 규모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로 기록된다. 그 후 정조가 성곽을 보수하고 성문을 다시 고치면서 전쟁에 임하면 반드시 이..
2011년 8월 南漢山에 있는 山城을 찾아 간다, 신라 문무왕때 처음 성을 쌓고 주장성/晝長城 이라 했다, (동국여지승람 東國與地勝覽 에는 일장산성 日長山城 이라 기록하고 있다) 1624년 인조 2년 城 을 개축하여 1626년 공사를 마친다, 4 門 과 16 暗門 1,897개의 성가퀴, 옹성, 성랑, 우물, 샘, 등을 갖추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휴식처인 공원으로 변해 있는 남한산성 !! 그러나 城 이란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든 곳이다, 남한산성의 역사 또한 우리 민족사에서 결코 잊을수 없는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이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것을 요구하자 두 나..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된다 결국 인조14년(1636) 청나라 태종이 10만 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우리민족 역사에 가장 치욕적이고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된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조선 인조 17년(1639년) 지금의 송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