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경기옛길 (41)
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세종대왕릉 주차장을 지나 영릉근린공원으로 왔다, 여기서 세종대왕릉 스템프를 찍고 인증샷도 했다. 이 마저도 오늘의 추억을 기록하는 게 아닐까?이곳에 있는 봉화길 이야기는 "대륙으로 향한 북벌의 의지, 효종대왕 이야기가 안내되여 있다, 1636년(인조 14년)12월 청태종이 12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처들어 왔다,청나라 군대는 불과 5일만에 한양에 이르럿고 강화도로 피난을 가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을 했는데 그러나 이듬해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로 나가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리며 항복했다,삼배구고두란? 여진족이 천자를 배알할때 행하는 의식인데 한번 절하고 세번 땅에 부딪치는 것을 세번 반복하는 것이다,인조가 성의없이 머리를 땅에 부딪치자 청태종은 소리가 나지..

붓을 세워놓은 쌈지공원을 지나가면 바로 앞에 흄관공장 흥일기업이 있다,흄관공장 끝에는 야적장도 길게 이어져 있다,가는길 오른쪽 설성천이 흐르는 이곳은 이천시 장호원읍 설성리다,이곳에도 탐스러운 넓은 들녁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이다,설성천 건너편에도 황금 들녁과 구릉지 산을 감싸고 뜨 다니는 뭉게구름이 복 스럽기만하다,가을 하늘 구름이지만 어쩜 이리도 아름다울까 지난주와 이번주 2주에 걸쳐 황금들녁과 뭉게구름을 원없이 보는 것 같아서이번 가을은 이것 만으로도단풍구경은 안가도 될 것 같다,설성천변에서 원하리로 들어왔다, 선읍1리 원하리 공동주차장? 인듯한 곳으로 가니버스정류장이 있는데 원하리(선읍1리) 버스정류장이다,이곳에서는 감곡리가 보인다, 저 산아래 아파트들은 충북 음성군 감곡면에 있는 감곡리다,이제 가..

설성산 정상으로 오른 시간이 11시 30분정도인데 마침 바람이 솔솔 불어와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설성산 정상 봉화정에서 돗자리를 펴고 길게 누워서 땀도 식히고 100년산 귀한 산삼주도 한잔씩 했다,설성산 정상 해발은 그리 높지 않아 내려다보면 바로 아래에 집들이 보인다,길게 쉬였던 설성산 정상에서 이제는 내려 가야한다, 아직도 갈길은 멀다,내림길은 미끄려질 정도로 급하다, 그라나 급한 내림길은 그리 길지는 않다,잠시만 내려가면 일반 산길 내림길이고이내 앞이 티이면서 절이 보인다, 이 절은 이천 설성산 중턱에 위치한 신흥사로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자경기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어며. 설성산성이 둥글게 에워싼 중간 지점에 있는 신흥사는 신라 내물왕(재위 356~4..

이천역에서 08시 45분, 25번 버스로 약 35분 정도 걸려서 도착한 금당1리(설성면행정복기센터)정류장에서 봉화길 제9길 봉화길 마지막 구간을 간다, 하남에서 2024년 5월 5일에 시작한 봉화길은 9월 29일인 오늘에야 끝맺음을 한다, 따라서 오늘은 경기옛길 7대를 모두 완주하는 날이다,금당1리 버스정류장에서 설성면행정복지센터로 들어간다,여태까지 한번도 와본 적이 없는 설성면행정복지센터라서다, 설성면은 장호원읍과 부발읍, 그리고 신둔, 백사, 호법, 마장, 대월, 오가면 등 2읍과 6면으로 행정구역이 나누어져 있으며, 눈처름 순수하고 별처름 빛나는 고장이라는 소개를 하는 면이다,행정복지센터 앞 골목길을 따라 봉화길 제9길을 출발한다,면사무소 옆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면나즈막한 언덕으로 이어지고가는길 옆..

앵산교를 건너 오른쪽 하천변 둑길로 올라간다, 여태까지는 양화천 오른쪽 둑길을 따라 왔는데 이제부터는 왼쪽 둑길이다,앵산교 건너 약 300m지점에서 둑길을 따라가는 직진길과 왼쪽 농지사이로 가는 농로가 있는데 여기서는 農路로 들어간다,일직선으로 길게 뻗은 농로(農路)가 있는 이곳은 이천시 설성면 수산리다, 설성면 구시리마을 회관을 지나서 부터 양화천 둑길을 시작해서약 10여km 정도는 되는 것 같은 둑길을 따라 왔어나 이제 둑길은 끝이고 農路다, 그리고 보면 봉화길 제8길의 절반 정도는 양화천 둑길이다,일직선 농로가 끝나는 지점에서는 다시 오른쪽 농로로 들어간다,여기도 한우농장이 있는데, 어김없이 개점휴업 상태다, 무슨 일들이 있는 것일까? 봉화길 8길을 따라오면서는 인삼 농사도 하는 것이 보인다, 원래..

영릉(寧陵)을 참배하기 위해 임금이 걸었던 거둥길 거둥길은 왕이 선대왕의 능에서 제사를 주관하기 위해 오가던 능행길을 말한다, 여주에는 조선의 4대 임금 17대 효종대왕의 영릉(寧陵)이 위치하고 있다, 세종대왕이 후손에게 남긴 휼륭한 업적들과 그 업적의 바탕이 된 애민정신을 되새겨 볼 수 있으며, 또한 효종대왕의 북벌에 대한 의지를 느껴볼 수 있는 구간이다,2024년 7월 14일 08시 35분 경강선 세종대왕릉역으로 왔다, 왕이 반기는역이라는 세종대왕릉역 이야기는 한글, 철도이야기를 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여주시 능서면 신지리에 세워진 역으로 2026년 경강선이 개통되면서 문을 연 역이다,역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동쪽 약 3km 남짓 거리에 조선 4대임금인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모신 영릉이 있으며 그 옆에..

양화천변 양거1호 수문이 있는 곳에 있는 매화교를 지나 계속해서 용은교로 내려간다, 인접에서 유입되는 수량을 모두 햡수하는 양화천 폭은 점점 더 넓어지고양화천 둑 안쪽 매화리 들녁은 평야지대를 상상할 만큼 넓고 크다,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일직선 둑길을 따라 가다가 매화리 방향으로도 살펴보고이제 가야하는 용은교도 살펴보면 까마득히 먼 거리인 것 처름 보인다,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는 용은교매화교에서 용은교까지는 약 1,5km는 되는 거리다,이제 용은교까지 내려왔다, 양화천 둑에 있는 이 작은 건물은 환경사업소 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여하튼 시청 관할 기관 건물인 듯하고인도가 따로 없는 용은교를 건너간다 이도가 없는 도로는 위험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오는 차를 마주 보면서 가야 비교적 안전 ..

봉화길 제6길 골내근길은 협궤열차, 수려선(수원 - 여주)의 옛 흔적을 찾는길로, 골내근은 고구려 때 불렸던 여주의 최초 지명으로 이 일대는 남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벼농사 짓기에 최적의 지역이다,봉화길 제 5길에서 이어가는 길이라 부발역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철로 아래 도로는 부발역 1번출구에서 연결되는 길로 여기는 부발역 뒤에 있는 죽당천삼거리다,죽당천삼거리에 봉화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경기옛길과 제6길 골내근길, 제8길 자체방앗길(부발역~설성면행정복지센터)안내도 있다,1930년부터 1972년 까지 수원에서 이천을 거쳐 여주를 잇는 수려선 협궤열차가 지나 다녔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는 이천과 여주일대에서 생산되는 쌀을 인천항까지 운송하기 위해서였고 해방 후에는 지역민의 사연을 가득 담은 이동수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