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봉화길 제6길 골내근길 上(부발역~매화교) 2024, 6, 30 본문
봉화길 제6길 골내근길은 협궤열차, 수려선(수원 - 여주)의 옛 흔적을 찾는길로, 골내근은 고구려 때 불렸던 여주의 최초 지명으로 이 일대는 남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벼농사 짓기에 최적의 지역이다,
봉화길 제 5길에서 이어가는 길이라 부발역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철로 아래 도로는 부발역 1번출구에서 연결되는 길로
여기는 부발역 뒤에 있는 죽당천삼거리다,
죽당천삼거리에 봉화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경기옛길과 제6길 골내근길, 제8길 자체방앗길(부발역~설성면행정복지센터)안내도 있다,
1930년부터 1972년 까지 수원에서 이천을 거쳐 여주를 잇는 수려선 협궤열차가 지나 다녔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는 이천과 여주일대에서 생산되는 쌀을 인천항까지 운송하기 위해서였고 해방 후에는 지역민의 사연을 가득 담은 이동수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든 협궤열차가 아니라 경강선 전철이 다닌다, 오늘은 협퀘열차 흔적을 찾아가는 골내근길 14km를 약 3시간 정도, 이곳 부발역에서 세종대왕릉까지의 길을 간다,
부발역 뒤편 죽당천 삼거리에서 약 600m 정도를 내려가다가 첫번째 다리에서 경강선 아래 암거방향으로 간다,
그리고 암거앞 왼쪽 경강선 철도옆 길을 따라 가다보면
고속철도와 전철이 지나가는 교각 아래
고속철도 교각과 경강선 전철 교각 사이길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휘여지는 길로 경강선 전철 교각 아래를 지나가면
나즈막한 산 아래길로 연결이 되는데 여기서 전철은 여주로 가고, 고속철는 충주로 가는 분기점이다,
아직은 조금 멀지만 철도차량기지가 있는 곳도 보인다,
부발읍 황무로 1990에 소재하는 한국철도공사 부발차량사업소는 2층 교각으로 설치되여 있다,
차량기지 아래로 들어가면
세종대왕릉역 11,7km 이정표가 있다, 이곳 이정표도 이제 시작이니 믿을 수 있을련지?는 조급 더 가봐야 알 것 같다,
이제는 마을길을 따라 간다,
고구마 밭도 보이는데 이천 여주 고구마는 소문난 작물이라서 고구마 농사를 짓는 밭이 많이 보인다,
고무마 밭을 지나가니 이천축산농협 섬유질 사료공장이 있는데,
이 마을길은 부발역로 101번길이다,
부발역로 101번길을 따라 가다보면 작지만 이런 공장도 있고
야산형 넓은 농토도 있다,
그리고 앞에 보이는 저 도로는 337번 국도 황무로다,
황무로 1852번 길로 337번국도 암거를 지나간다,
암거를 나가서 는 직진이다,
잠시 언덕으로 올라가서
다시 내려가면
황무로 1833번길로 연결이 되고
이길 끝 수정리 마을 회관이 보인다, 집들만 봐서는 마을회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농촌에서는 국기가 계양되여 있어면 거의 마을회관이다,
마을회관으로 왔다, 회관 옆에 봉화길 제6길 스템프함이 있다,
여기서 봉화길 - 골내근길 양화천 이라고 새겨진 스템프를 찍고
여주의 최초 지명 골내근현, 에 대한 이야기판을 읽어본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여주의 지명은 고구려 장수왕 63년(서기475년)에 골내근현(骨乃斤縣)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다,
骨乃斤縣 은 이후 통일신라 경덕왕 때 황효, 고려태조(940년)때 황려, 성종(955)때 황리. 고종(1275)때는 영의, 충렬왕(1305)때 여흥, 우왕(1388)때 다시 황려, 공양왕(1389)때 여흥으로 바뀌여 왔다,
그러다가 조선 태종(1401)때 원경황후의 내향이라 하여 여흥부로 승격시켰고 세종대왕릉(영릉)을 경기도 광주 대모산에서 여주로 옮기면서 1469년 8월 8일 천령현을 여흥부에 합하여 여흥목으로 승격 시키고 이어 8월 18일(양력 9월 23일) 여흥이 여주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수정리 마을회관을 나가는길 태극기가 걸려진 집이 보인다 오늘은 비가 오는날 임에도 국기가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집은 365일 태극기를 계양하는 집인듯 하다,
이곳 전신주에는 부발역에서 여기까지는 3,5km라고 알려준다, 몇번을 반복하는 말이지만 봉화길 사각 이정표는 믿을 수 없다, 부발역에서 이곳까지는 약 4,8km정도는 된다,
수정리 마을 버스 정류장에는 의자도 있고 수정리 마을 표지석도 있어며 나무도 한그루 있다,
이 길에서 아쉬운 점은 가는길 내내 나무가 거의없다,
구릉지에는 나무가 몇개씩은 보이는데
마을길에는 나무가 없어니 삭막해 보이기 까지한다,
옥수수도 있고 배나무도 있기는 하지만
마당이나 집 앞에 나무 몇그루만 씩만 심어면 보기도 좋을텐데,
물론 농업용 과수원은 별개다,
여기는 도로공사를 하고 있는데 마무리 단계인듯하다, 이 정도에서 이천시는 끝이나고 여주시로 접어드는데 시 경계 표식은 없지만 이천시 수정리와 여주시 양거리 마을 경계가 시 경계다,
도로포장공사는 양거리 마을길을 2차선 도로와 연결하는 공사인듯, 왼쪽으로는 용은리와 능서 그리고 직진은 가남 방향이라고 알려주는 이정표도 있는 삼거리에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는 양거1교다,
양거1교 에서는 왼쪽 양거천둑으로 가라는 시그널이 있다,
양거천둑으로 내려간다,
아까시아 등의 잡목이 자라고 있는 둑길 이제부터는 여주시 땅이니 둑길에도 나무가 있나보다,
양거1교에서 얼마되지 않는 거리에 양화천이 있다, 양화천은 이곳에서 대신천과 양거천을 합류해 흐른다, 대신천은 가남읍 행정복지센터 방향에서 흘러내려 오다가 삼근교에서 안금천을 합류하고 영동고속도로 양화교를 지나서 본두천도 합수해 흘러내려오는 큰 줄기의 천이다,
이제부터는 양화천변 둑길이다, 양화천 둑으로 들어가니
봉화길 제 6길 골내근길 여주지명에 관한 몇가지 설이라는 제목으로 신륵사 용마 설화와 관련하여 굴레끈 을 한문으로 적은 것이 골내근이다, 라는 설명과 함께
여강이 골자기 안으로 흐르는 물과 같다하여 골자기를 뜻하는 "골" 과 흐르는 물을 뜻하는 "내" 를 조합하여 '골내근" 이 되었다, 골은 우리말로 누런색을 가르킨다,
여강은 홍수때 누런 황토물이 흐른다, 내는 하천을 뜻하는 천(川)을 의미하고 근은 고을 촌(村)을 의미한다, 이를 종합하면 골내근은 누런 내가 흐르는 고을이 된다,
골내근은 신라 경덕왕때 황효(黃驍), 고려태종때 황려(黃驪), 황리(黃利)로 이름이 바뀌고 여기서 누렇다는 뜻의 고라말, 공골(公骨)은 털 빛이 누런 말(黃馬)을 가르키며 가라말, 은 검은 말(驪馬)을 가르킨다,
그리고 효(曉)와 리(利)에는 날쌔다 라는 뜻이 들어있다, 신라 신무왕때 지방 군사 조직인 10정은 기병부대였다, 그 10정 중에 골내근정이 여주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주의 지명이 말과도 관련되여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출처 : 가까이서 본 여강의 역사, - 여주문화원 2013, 15쪽)
여러개의 지천을 합류해서 흐르는 양화천도 남한강에 합류되여 소멸되지만 천(川)폭은 강처름 넓은 하천이다,
꽤나 먼거리 양화천둑길로 왔어나 이 둑길에도 나무는 한그루도 없다, 여주시에서는 둑길에 나무를 심지 않는 모양이다, 나무 타령을 계속하는 이유?는 이런길을 몇시간씩 걸어면 그늘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양화천변으로 들어와 약 1,3km정도를 내려가면 양화천 양거1호 수문이 있는곳에 매화교가 있다, 봉화길 제6길 上 기록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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