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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봉화길 제 7길 세종효종길 上(세종대왕릉역~세종산림욕장)2024, 7월 15일 본문

경기옛길(조선시대 7大路)/봉화길

봉화길 제 7길 세종효종길 上(세종대왕릉역~세종산림욕장)2024, 7월 15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4. 7. 26. 00:07

영릉(寧陵)을 참배하기 위해 임금이 걸었던 거둥길 거둥길은 왕이 선대왕의 능에서 제사를 주관하기 위해 오가던 능행길을 말한다, 여주에는 조선의 4대 임금 17대 효종대왕의 영릉(寧陵)이 위치하고 있다, 세종대왕이 후손에게 남긴 휼륭한 업적들과 그 업적의 바탕이 된 애민정신을 되새겨 볼 수 있으며, 또한 효종대왕의 북벌에 대한 의지를 느껴볼 수 있는 구간이다,

2024년 7월 14일 08시 35분 경강선 세종대왕릉역으로 왔다, 왕이 반기는역이라는 세종대왕릉역 이야기는 한글, 철도이야기를 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여주시 능서면 신지리에 세워진 역으로 2026년 경강선이 개통되면서 문을 연 역이다,

역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동쪽 약 3km 남짓 거리에 조선 4대임금인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모신 영릉이 있으며 그 옆에는 조선 17대 임금인 효종과 인선왕후의 쌍릉이 위치해 있다, 세종대왕릉역 앞에는 시내버스와 택시 승차장이 있다, 

맑고 아름다운 강가에 풍요롭고 넓은 들판이 펼처져있는 여주의 여강을 등지고 자리잡고 있는 영릉은 조선 왕릉 최초로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합장릉으로 예종(1469년) 1년 여주 북성산 아래로 세종대왕릉이 옮겨지면서 조선왕조의 국운이 100년 더 연장되었다는 명당 이야기가 있다, - 아래 사진은 자료 사진이다, -

영릉이 현재의 위치인 능서면 왕대리로 천장을 하면서 천령현이 여흥도호부와 통합되어 여주목으로 승격되었다,

봉화길은 세종대왕릉역 우측으로 연결이 되는데 역사끝 삼거리에서 길을 건너가면

택지조성중인 넓은 토지가 있는 곳

우측 경강선 철도 옆으로 올라가야 한다, 세종대왕릉역 앞 일대는 능서역세권 도시개발 구역으로 대단위 택지조성 공사중이다,

경강선 철도 옆으로 길이 없을 것 같은 곳에 철도를 따라 길게 길이 있다,

역사앞에서 약 700m~800m 정도를 가면

경강선 철도가 중부내륙고속도로 아래로 지나가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데

세종대왕릉역에서는 800m, 영릉인 세종대왕릉은 3,52km 가 남아 있는 샛길이다,

길은 이어서 중부 내륙고속도로 아래로 들어가는데 임금과 백성들이 손을 흔들고 미소로 맞아주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고속도로 아래 암거를 나가면 이렇게 보이는 민가도 있다, 외진곳에 자리한 집이지만 트럭과 승합차도 있는 집이다,

충회공 이인손 묘 안내판이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이길은 밭 둑으로 사진에 보이듯이 야자 매트도 깔아 길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지 야자매트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밭두렁을 지나가면서 오른쪽 언덕으로 보면 잔디가 잘 다듬어진 묘가 보이는데

이 묘가 충희공 이인손 묘로 문화유적지라고 한다,

밭둑길을 지나가면 이인손 비석과 재실이 있다, 이인손은 태조4년(1395)부터 세종대왕까지 한성부윤(서울시장)까지 오른 인물로, 수양대군이 단종 왕위를 찬탈하는 계유정란에 참여한 쿠데타 세력으로 2등 원종공신이 되어 우의정까지 올랐어나 수양대군과 세조로 부터 토사구팽 당하며 씁쓸하게 퇴장했던 인물이다,

이렇게 한적한 곳에 있는 이인손의 묘가 유명한 이유는 이인손 묘는 원래 세종대왕릉(英陵) 자리에 있었는데. 세조가 죽고 뒤이어 오른 예종때 세종대왕릉은 서울 내곡동 대모산기슭, 태종릉(헌릉)옆에 있었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등으로 왕실이 풍지박살이 나자 세종대왕릉을 잘못 써서 그런거라는 루머가 돌며 천장을 해야한다는 상소가 빗발치자 새로운 왕릉 물색에 나섯다.

이인손은 경기광주 이씨로 엄청 화려한 조상과 자손이 있는 가문으로. 아들 다섯명(이극배=영의정, 이극감=형조판서, 이극증=병조판서, 이극돈=우의정, 이극균=좌의정)은 모두 정승급 벼슬을 했어며 당시의 조선은 전주 이씨 왕조가 아니라 경기광주이씨 왕조라고 할 정도였다.

원래 이인손의 묘가 있었던 현재의 세종대왕릉(영릉)에서 이곳으로 묘를 옮길 때 예종의 어명으로 묫자릴 찾아 나선 지관 안효래가 찾아낸 묫 자리가 여주 영릉이다, 이인손의 묘를 파내자 유해 아래 비단에 쓰여진 글에 "이 자리의 주인이 새로 나타나면 이곳에서 연을 날려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연이 떨어지는 곳에 나의 묘를 옮겨라" 라고 적혀 있었다. 글대로 연을 날리자 연은 바람에 날려 서쪽으로 약 10리 밖에 떨어졌고 그곳이 바로 여기다. '연이 떨어졌다'고 연당 혹은 연주리라고 부르며 현재의 세종대왕면 신지리 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충희공 이인손의 묘와 사당을 지나 낮은 언덕으로 올라가면

소로(小路)가 있는데

이 도로는 능서공원길 2차선으로 경강선 철도 위로 지나가는 도로다, 

도로 건너편으로 들어간다,

농가 주택은 보이지 않지만 꽤나 넓은 농지가 있는 곳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 번도5리 마울로 가라는 안내판이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농로는 무척이나 한적한 길이다,

초록빛 넓은 들녁을 따라가는 길은 마음까지 여유로워 진다, 

여기는 여주시 세종대왕면 신지리다,

42번 국도 중부로도 지가는게 보이는 곳

신지리 들녁 끝 지점에서 나즈막한 언덕으로 올라간다,

언덕이라기 보다 낮은 경사가 있는 농로를 돌아가면

공장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 공장 건물 정문 앞

42번국도 중부대로 날개도로 아래 암거로 이어진다,

이어서 중부대로 암거로 들어가면

서여주 TG로 이어지는 날개 도로 아래 암거를 지나가는데

3개의 도로 아래 암거를 지나가면 이 마을은 반도 4리다,

이어지는길은 마을을 보면서 오른쪽으로

중부대로 옆으로 이어진다,

반도4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도 있고

잠시 도로변에 있는 마을 샛길을 따라가면

마을에서 작은 고개로 가니 왼쪽으로 세종대왕릉으로 가라는 여강길 이정표가 보인다, 

그러나 봉화길 시그널은 보이지 않아서 그냥 고개를 넘어가니 중부대로다,

중부대로 를 잠시 따라 가다가

마을 골목길로 들어간다,

이 마을이 번도 5리다,

이 마을에는 잘 지어진 별장식 주택들도 있는게 보인다,

여기서는 무조건 세종대왕릉으로 가야 한다,

이어지는 들녁으로 휘적 휘적 가다보니

왼쪽으로 중부대로 2629번길과 대왕로가 만나는 삼거리로 왔다,

여기서는 일직선으로 뻗은 대왕로를 따라 간다,

가는길 왼쪽으로는 캠핑장을하면 딱 좋을 것 같은 공터도 있고

멎은편에는 솔밭정원 이라는 식당도 있다,

서서히 높아지는 대왕로를 따라 가다가 오른쪽 구릉을보니 조금전 지나왔던 이인손 묘 와 비슷한 묘가 있는데 묘지 잔디를 잘 키울려고 지하수 수전(우물)도 2곳과 산소를 찾아온 후손들이 쉴 수 있는 탁자와 의자 셋트도 만들어 놓았다,

대왕로 언덕 제일 높은 곳 까지 올라왔다, 사실 조금전 마을 들녁을 따라오다가 도로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왼쪽길로 들어가면 세종대왕릉으로 바로 연결이 된다, 그러나 봉화길 지정길이 여기라서 

이 길로 가는데 여기는 인도가 없는 도로기는 하지만 갓길 폭이 조금은 넓은 편이다,

서서히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간다, 조금은 멀지만 가는길 왼쪽으로 건물이 있는게 보인다,

저 건물이 있는 곳이 세종대왕릉 입구다, 세종대왕 역사문화관과 매표소 건물도 보인다,

세종대왕릉 입구에서 왕릉으로 가는 길도 보인다,

세종대왕릉 교차로 앞 회전로터리로 왔다

여기서는 세종대왕릉 역사문화관과 매표소 등도 보이고

세종대왕릉 이름을 새긴 바위도 있다,

그리고 세종대왕릉 주차장이다, 넓은 터에 만들어진 주차장이라 오늘은 여유가 있다,

회전로터리를 지나서

세종대왕릉 교차로로 나간다, 여주에서 금사로 이어지는 333번국도인 영흥로다,

세종대왕교를 건너가면서 왼쪽으로 보면 자전거 도로는 개천을 따라 이어지는데

봉화길은 영흥로를 건너 

영릉근린공원으로 가야한다,

인도를 따라가다가 영릉근린공원으로 들어간다,

영릉근린공원은 세종산림욕장으로 들어가는길이라서 데크길과 의자등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데크길 끝에 봉화길 제 7길 스템프함이 있다,

여기서 세종대왕릉 스템프를 찍고 인증샷도 했다. 이 마저도 오늘의 추억을 기록하는 게 아닐까?

대륙으로 향한 북벌의 의지, 효종대왕 이야기는 1636년(인조 14년)12월 청태종이 12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처들어 왔다, 청나라 군대는 불과 5일만에 한양에 이르럿고 강화도로 피난을 가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을 했는데 그러나 이듬해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로 나가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리며 항복했다, 

삼배구고두란? 여진족이 천자를 배알할때 행하는 의식인데 한번 절하고 세번 땅에 부딪치는 것을 세번 반복하는 것이다, 인조가 성의없이 머리를 땅에 부딪치자 청태종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며 계속 다시할 것을 요구해 인조는 땅 바닥에 수십번 머리를 부딪쳣고 이로 인해 머리에는 피가 났어며 흘러내린 피가 용포를 적셨다고 전해진다,

이 치욕적인 항복 후 청나라에 8년간 불모로 잡혀있다가 귀국하여 죽은 형 소현세자를 대신해 왕위에 오른 이가 조선 17대 임금 효종으로 이곳에는 2개의 영릉이 있는데 조선 4대왕 세종대왕릉(1397~1450)과, 제17대 효종(1619~1659)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세종대왕릉은 영릉(英陵)이고, 효종대왕릉은 영릉(寧陵)으로 같은 이름이지만 세종대왕릉은 꽃부리 英자, 효종대왕릉은 편안할 寧자로 한자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