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봉화길 제 7길 세종효종길 下(세종산림욕장~여주역) 2024년 7월 14일 본문
세종산림욕장에 있는 봉화길 제7길 스템프를 찍고 조선 17대 임금 효종이야기를 읽고나서
세종산림욕장을 들어간다, 스템프함이 있는 곳에서 봉화길은 산림욕장으로 해서 가는 길과 자전거길로 가는 평지 길도 있는지? 봉화길 리본이 곳곳에 걸려있다,
산림욕장으로 들어간다, 길은 왼쪽 산으로 올라 가라는 시그널이 보인다,
그리 높지않은 산길이지만 계단을 오르고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보면
곳곳에 봉화길 리본들이 걸려 있는데
이 길은 봉화길과 여강길이 함께 가는 코스인듯 하다, 여강은 여주지역에서 부르는 남한강의 원래 이름이다.
여기서 여강길에 대한 이야기를 옮기면 수천년 아름답고 맑은 물과 모래, 수 많은 철새와 물고기가 함께 공존하던 여강에 아픔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여강이 지닌 그 아름답고 고운 모래 때문이었다.
2000년 초부터 경기도는 남한강 정비(골재채취)사업을 추진했고 여주에서는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맑은 모래를 지키자는 반대 운동이 있었다.
이러한 여강 지키기 운동의 일환으로 여주환경연합과 여주한살림, 여주지역 종교성직자를 중심으로 무조건 정비사업 반대를 하기보다는 강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부터 먼저 가치를 알아보자는 의미로 여강가(남한강변)를 걷게 되었다.
이 당시에는 4대강 사업 이전이라 맑은 모래와 많은 여울, 그리고 생명을 품은 습지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처음 자연의 순례길로 택한 코스는 여주시청에서 이포대교까지 여강 하류였다.
남한강변의 숨은 길들을 연결하며 걸은 이들 덕분에 그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알려졌고, 뒤이어 해마다 지역의 학생들과 함께 본격적인 남한강 도보순례가 진행된다.
그러면서 각 마을 회관에서 숙박을 하며 남한강 자연의 아름다움을 체득했던 이 들의 입소문을 통해 여강길이 점차 알려지기 시작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4대강 사업을 추진하던 정부에 의해 여강길은 2009년에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생태탐방로 여주 여강길’로 지정된다. 경기도에서는 최초다.
여강길은 4대강 사업기간 동안 이 사업을 반대하는 수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자연보존의 순례길이 였어며. 순수한 민간 차원에서 처음 길을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그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길이다,
고개 언덕에 있는 정자에 올라 여주시내를 내려다 본다,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여주시내가 겹쳐지는 전경은 한 폭의 그림처름 아름답다, 바로 아래 샛강 건너는 양섬이 있다, 양섬에는 주차장과 양섬공원 그리고 3개의 야구장도 있다,
정자 옆으로 내려가는길
조금은 급하지만
울퉁 불퉁 하기는 해도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갈림길이 있어도 그냥 내려가는 길로 가면 된다,
먼저 지정된 여강길에 봉화길을 함께 가도록 했어니
조선시대에도 이 길을 따라 태백산사고로 다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림길은 금방 남한강변으로 내려간다,
이곳에도 정자가 있다, 정자에 올라 내려다 보는 남한강 샛강은 마치 여의도 샛강과 비슷한 느낌이다,
여주북로 세종대교가 양섬을 지나가는 교량도 보이는 이곳은
여주시 하동으로 세종산림욕장에서 이어져 오는 자전거길과도 만나는 곳이다,
남한강 양섬 샛강을 보면서 올라가는길, 며칠동안 내린 비로 물이 많아서 인지 샛강 유속이 무척 빠르고 거칠다,
양섬 끝에서 지점에서 길은 남한강으로 합류되는 소양천 변으로 이어지고 소양천에 놓여진 하리보도교를
건너 남한강 변을 따라 올라간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자전거길과 자전거길 옆 인도는 숲길이다, 여기서는 풀이난 길을 걷다가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 지기는 했어나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다, 이제는 순발력도 떨어져서 그런가 보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양섬과 양섬을 지나가는 세종대교가 보인다, 저 도로는 37번국도 여주북로다,
남한강 건너로 보이는 아파트 숲이 지금의 여주 모습인데
태백산사고로 다니셨던 우리 조상님들은 이 모습을 상상이나 하셨을까?
이 지점은 한강 하구로 부터 128km지점이라는 자전거길 이정표 기둥도 있다,
이곳 자전거길은 4대강 유역 자전거 길로 하남 팔당댐에서 부터 충주댐 까지다,
지나 온 하리보도교에서 약 1,1km 정도를 올라가면
길 건너에 한옥식 담장이 보이는데 봉화길은 이곳으로 연결이 된다,
여기는 여주 대로사(大老祠)다, 담장을 따라 대로사 출입문 쪽으로 들어간다,
대로사는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사당으로. 정조 9년(1785년) 왕명으로 지어졌다. 우암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 대학자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당쟁의 참화를 이끈 편벽한 소인이라는 극단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우암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을 바라보는 시점에 정조가 그의 사당을, 그것도 효종의 영릉을 바라보도록 서향으로 지은 데에는 효종의 죄인 이라는 '혐의'를 풀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판단이 담겨 있다고 한다,
효종이 대왕으로 받들어지는 것은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의 기치를 높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8년 동안이나 고초를 겪은 효종의 신임을 받아 북벌론의 기수로 지목된 이가 우암으로
우암의 북벌론은 그러나 양병보다는 민생의 안정, 무력보다는 군왕으로 덕을 쌓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는 점에서 효종의 실천적인 북벌론과 달랐다. 그의 존명 배청 감정은 한족의 나라는 높이고 오랑캐는 물리친다는 유교 경전 춘추(春秋)의 원리에 따라 관념적으로 형성됐기 때문이다
우암은 1659년의 유명한 기해독대에서 효종이 구체적인 북벌계획을 제시했을 때도 제왕은 먼저 자신을 닦고 가정을 다스린 뒤에야 법도와 기강을 세웠다는데 이것이 북벌의 선결조건 이라는 말 뿐이었다고 한다.
효종은 우암과 독대한 지 불과 두달 만에 급서했고 우암은 국상의 예법을 조언했는데. 이때 관이 시신보다 작은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장지 역시 수원부가 길지라는 지관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경기도 구리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곁으로 정했지만, 불과 15년 만에 석물에 틈이 생겨 빗 물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세종릉 곁 여주로 옮겨야 했다.
반대파인 남인들은 이 모두를 우암의 탓으로 돌린 것은 물론이고. 우암이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효종의 죄인으로 지탄받았다.
정조는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로 양성된 친위세력을 바탕으로 산림의 정치참여를 억제하는 강경책을 폈지만, 초반기에는 지지세력으로 포섭하고자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을 닦은 노론 중심의 산림(山林)을 중용했다.
정조가 대로사를 세운 데 이어 우암의 세 번째 회갑년인 1787년에는 북벌대의론을 칭송하는 비문을 직접 지어 대로사비를 세운 것도 노론을 향한 정치적 제스처라는 뜻이다.
건축사적으로 대로사는 18세기 익공집의 기준이 될 만큼 부재를 짜올린 수법이 완벽하다. 대로사는 조선 후기 권력투쟁의 큰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에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이다.
대로사는 조선중기의 학자이며 명신인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정조 9년 왕이 영릉릉에 참배 오셨다가 김양행 등 유신에게 명하여 건립하게 하고 대로사라 사액 하였으나 고종 10년 10월에 강한사라 개칭했다, 사당의 방향은 서쪽에 위치한 효종대왕릉을 향하고 있다, 대로사 한켠에는 대로사 비각도 있다,
대로사비(大老祠碑) 조선후기 대유학자인 송시열의 제사를 모시는 대로사의 내력을 적은 비로 대로(大老)는 송시열의 존칭이다, 정조11년 송시열 탄생 180주년을 기념해 세웠으며 정조가 직접 비명과 비문을 짓고 직접 쓴 글씨(大老祠碑)를 정교하게 새겼다,
비석에 새긴 한글자의 크기는 50cm로 상당히 큰 편이고 비의 형태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석의 몸체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 모양의 갓돌을 얹은 모양이다, 비석의 총 높이는 3,77m이고 비의 몸체 높이는 2,24m 너비 와 두께는 똑같이 66cm다,
대로사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명신(名臣)인 우암(尤庵)송시열(1607~1689)선생의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祠堂)으로 정조9년 (1785) 왕이 영녕릉(英寧陵)에 참배(參拜)오셨다가 건립한 우암의 사당이다,
사당의 방향은 서쪽에 위치한 효종대왕릉을 향하고 있다, 우암은 인조 11년(1633)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경릉참봉(敬陵參奉)을 거처 봉림대군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며 후일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효종9년(1658)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승진되어 북벌계획(北伐計劃)을 추진하기도 했다,
우의정을 거쳐 현종13년(1633)에 좌의정(左議政), 현종 15년 자의대비 복상(服喪)문제로 유배되었다가 남인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로 기용되었으며 숙종9년 1683년 봉조하가 되었고 노론의 영수가 된다, 그 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하였으며 숙종15년(1689) 왕세자 경종 책봉 문제로 상소를 했다가 제주도로 유배된다, 그 뒤 국문을 받기위해 상경 도중 남인의 책동으로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여기는 대로사앞 주차장이다,
주차장 입구 전신주에 봉화길 거리표지판이 있는데 여기서 세종대왕릉역까지는 8,1km이고 여주역 까지도 8,1km라고 붙어있다, 이정표 대로라면 봉화길 제7길은 모두 16,2km가 된다, 그러나 봉화길 제7길의 공식거리는 11km이다, 잘못 설치되여 있는 이정표는 여기 뿐만이 아니라 봉화길 전구간이 마찮가지다, 언제나 바로 잡을 수 있을까?
주자장을 지나 여주시장 방향으로 간다,
가는길 내내 이어지는 점포들은 이 일대가 모두 시장인듯 하다,
골목길 상가끝, 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밤에 불을 밝히면 더욱 멋스러 울것 같은 시장 출입문이 설치되여 있다, 글자가 떨어져 나가 잘보이지는 않지만 여주한글시장? 인가.
시장 입구에서 우암로를 따라 원형로터리인 하리교차로로 왔다,
하리교차로에서도 이어지는길은 계속 우암로를 따라 직진이다,
여주 중앙 감리교회 앞
사거리에서
도장교를 건너서 왼쪽 소양천 둑길로 들어가면
여주역 2,2km라는 이정표가 있다, 앞에 보이는 소양천 다리는 문화교다,
문화교도 지나서 계속 둑길로 가다보면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도 있고
길은 계속해서 소양천으로 이어진다,
이어지는 둑길을따라 계속해서 올라가면 연세새로운병원이 있는데
병원앞 소양교 건너편으로 가야한다,
잠시 오른쪽으로 가면 여주새로운병원 버스정류장도 있고
버스정류장 옆에 건널목이 있다, 길을 건너 다시 소양교로 올라가서
소양교 왼쪽 소양천 둑길로 올라간다,
계속해 둑길로 올라가다가
여주향교 교를 건너간다
향교 교를 건너가면 이 일대는 모두 아파트단지로 도시계획이 된 지역이다,
사거리 오른쪽 아파트앞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이지역에서 제일 먼저 지어진 여주역 LH3단지 705세대 아파트 단지가 있다,
여주역 LH3단지 아파트를 지나
378번국도 여원로 아래를 지나면 바로 오른쪽에
여주역이 있다, 여주역에도 역 이야기가 있는데 역, 도자기를 빚다 라는 제목으로
옛 여주역은 1931년 12월 수려선 개통과 함께 지금의 여주시 홍문동에서 영업을 개시 하였으며 1972년 4월 수려선과 함께 폐지되었던 역은 2016년 9월 24일 경강선 개통과 함께 여주시 교동에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여주는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천하의 명당으로 중부지방의 동맥인 남한강을 중심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고장으로
서울에서 멀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풍경과 볼거리가 많은 나들이 장소이다, 남한강을 따라 황포돗배를타고 천년고찰 신륵사 앞에서 노을과 어우려지는 강의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것은 여주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라고 안내되여 있다,
경기옛길 봉화길 제7길은 11km로 4시간 가깝게 걸렸다, 오늘로 경강선 철도역에서 역으로 연결되는 봉화길은 끝이고, 제8길과 제9길은 부발역에서 출발하고 버스로 이동하는 36km의 거리만 남았다, 이제 더위를 피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가을에 다시 찾아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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