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남편에게 사약을 내린 시숙부 세조보다 53년을 더 살았다는 정순왕후(2017년 12월 12일) 본문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 인근에있는 사릉은 비운의 왕인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1440~1521)의 능이다. 과거에는 일반인들에게 공개했어나 방문객이 적어 비공개 왕릉이였다가
2013년 1월 1일부터 태강릉의 강릉, 동구릉의 숭릉과 함께 공개하고 있다,
조선 제 6대 왕이자 문종의 아들로 이름은 홍위. 인 단종은1452년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죽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병약했던 문종은 자신이 죽기 전 황보인, 김종서 등에게 세자의 보필을 부탁했다.
짧은 재위 기간 중에도 <고려사>를 비롯한 다수의 서책을 반포했다.
그러나 1453년 숙부 수양대군이 군국의 모든 권리를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1455년 한명회 등의 강요에 더이상 견디지 못하여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비는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다, 이곳 사릉은 정순왕후의 릉이다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이 거의 훼손 없이 남아 있는 예는 세계적으로 조선 왕릉이 유일하다.
조선 왕릉은 무려 42기나 된다. 태조 이래 왕위를 공식적으로 이어받은 사람은 27명에 불과하지만, 왕후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사망했어도 사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도 왕릉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42기의 왕릉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과 후릉을
제외한 40기를 2008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했고 단 1년 만에 유네스코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했다.
이면 도로변 주차장에서 사릉으로 들어 가는 정문
왼쪽에 있는 부스는 릉 근무자가
매표소에서 구입한 표를 검수하고 안내를 해주는 안내소겸 검표소 다,
이곳에는 많은 소나무가 있다, 이곳의 소나무는
태백산맥 능선(강원도 삼척시)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소인 준경묘와 영경묘의 낙락장송 후손 소나무 묘목이라고 한다,
1999년에는 사릉에서 재배된 묘목을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에 옮겨심어
단종과 정순왕후가 그간의 아쉬움을 풀고 애틋한 정을 나누도록 했다. 이때 사용된 소나무를 정령송(精靈松)이라 부른다,
이곳 사릉에 잠든 정순왕후의 처음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세종 22년(1440)에 태어나 15세 때 한 살 어린 단종과 가례를 치러 왕비로 책봉되었다.
사실 이 결혼은 단종이 즉위한 지 만 1년이 되는 날 수양대군과 양녕대군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왕비를 고른 후 단종에게
거의 반 강제로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한 것이다. 결혼한 이듬해인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자 정순왕후는 의덕왕대비가 되면서 역경의 시련이 몰아친다
그러나 세조의 왕위 찬탈은 과거 세종, 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의 일부 학사 출신들에게 심한 저항을 받았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의 유신들은 무관인 유응부, 성승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할 것을 모의했다.
그들은 세조 1년(1455) 명의 책명사(冊命使)가 조선에 온다는 통보를 계기로 창덕궁에서 연회를 베풀 때 거사할 것을 계획했는데, 마침 이날 세조
제거의 행동책을 맡은 별운검(임금이 거둥할때 운검을 차고 임금의 좌우에서 호위하든 임시벼슬)이 갑자기 폐해져 실행하지못했다,
그러자 계획이 탄로되었음을 두려워한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내용을 누설하고, 다시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고변해
주동자인 사육신과 연루자 70여 명에게 그야말로 피바람이 몰아친다. 이들 모두가 처형되면서 단종 복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상왕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된 후 죽임을 당한다. 단종이 유배되자 정순왕후는 부인으로 강봉되고
나중에는 관비로까지 곤두박질친다,
사릉 정문에서 얼마 되지않은 거리에 홍살문과 정자각이 보인다,
여타 왕릉처럼 홍살문이 있고 참도를 통해 정자각으로 들어가는데, 이곳의 참도는 정자각까지 이어지지 않고
중간에 중단되어 있다. 정자각은 맞배지붕으로 배위청이 짧아서 전체 건물의 모습이 정(丁)자형보다 정사각형이라는 느낌을 준다.
단종왕비 정순왕후 사릉 비문각
1698년 숙종에 의해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자
송 씨도 정순왕후로 복위되었으며, 신위는 창경궁에 모셔져 있다가 종묘의 영녕전에 안치되었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공경함이 바르다 는 뜻으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붙였다
정(丁)자각 이다,
왕릉의 건축물은 봉분을 비롯해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 재실등 매우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당연 으뜸은 정자각이다, 정자각이란 위에서 내려다보면 丁자 모양으로 생긴 집이라는 뜻으로
실제 건물은 - 자형태지만 그 앞쪽 가운데 지붕을 내여서 행랑같이 만든 형식이다,
정자각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혼령은 어디에 있을까? <국조오례의> 에서는 정자각을 침전이라 규정했다, 침전이란 혼령이 일상적으로 기거하는 곳을 가르킨다,
침은 묘(廟)와 상대되는 공간이다, 묘가 제향 등의 공적인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라면 침(寢)은 일상적으로 기거하는 곳이다, 이것은 생활공간과
업무공간이 구분되였든 생시 모습을 모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혼령은 평소에 무덤에 있을까? 정자각에 있을까?
정자각의 문을 열면 가운데 큼직한 제상이 있고, 그 뒤에 평상의 자리가 있다, 제향때 혼령이 임하는 곳이다,
그 뒤쪽 벽에는 여닫이 문이 있는데 이를 신문(神門)이라 한다, 제향때 신문을 열면 대개 봉분이 보이게 되여 있다,
정자각과 봉분사이 에는 신교(新橋)와 신로(新路)가 있다, 신이 오가는 다리와 길이라는 뜻이다,
이에 의하면 평소 혼령은 현궁에 기거하였다가 제향때면 정자각으로 오는 구성으로 짜여 있다,
침전이라기 보다 제향 공간으로 이해된다, 이는 유교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시신을 떠나지 못하는 혼령의 속성이 반영된 것 일수 있다,
건물은 산자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죽은자의 공간이다, 우리는 공간을 통해서 혼령의 존재를 확인할수 있다,
그렇기에 건축은 보이지 않는 것을 짓는 것이다,
단종과 4년간의 짧고 애틋한 결혼 생활을 한 두 사람 사이에는 후손도 없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사사된 후 64년 동안 그를 기리다 82세로 정업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자신을 왕비로 간택했다
결국엔 폐비로 만들고, 남편에게 사약을 내린 시숙부 세조보다 53년을 더 살았다. 또 세조의 후손이며 시 사촌인 덕종과 예종,
시 조카 성종, 시손 연산군의 죽음까지 지켜보면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정순왕후에게는 원수나 다를바없는 시숙부 세조의 왕릉은
이곳 사릉에서 15km 정도 거리에 있는 운악산 자락 광릉에 있다, 세조는 1468년 재위 13년 만에 죽었다.
그 13년 권력을 위해 빼앗은 목숨이 너무 많았다,
왕릉을 답사할 때 많은 사람이 불평하는 것 중의 하나는 능침을 공개하지 않아 왕릉 주위를 먼 곳에서 보거나
능침 인근에서 헛돌다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문화재청에서도 이런 문제점을 감안해 일부 왕릉(선조의 목릉, 숙종의 명릉,
세조의 광릉 등)은 능침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다. 이곳 사릉 정순왕후의 릉도 능침 가까이 갈수가 없었다,
사릉은 대군부인 예로 장사 지낸 뒤 왕후 능으로 추봉되었으므로 다른 능에 비해 단출하게 꾸며져 있다.
능원의 좌향은 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을 바라보는 계좌정향(癸坐丁向) 형태다. 능침을 3면 곡장이 둘러싸고 있으나
병풍석과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았으며 봉분 앞에 석상 1좌, 석상 양측에 망주석 1쌍을 세웠다. 봉분 주위에는 석양, 석호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아랫단에는 문인석, 석마 각 1쌍과 장명등이 있다. 장명등은 숙종 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장릉(단종)에 있는
장명등과 더불어 조선 시대 최초의 사각 장명등으로 평가된다.
조선 시대 모든 능역에는 사가의 무덤을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사릉에는 사가의 무덤이 몇 기가 남아 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중종은 정순왕후가 사망하자, 단종 때부터 7대의 왕을 거친 그녀를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돌아가실 당시에는 왕후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장을 치렀다. 능을 조성할 처지가 아니므로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가
출가한 집안에서 장례를 주도했다. 해주 정씨 가족 묘역 안에 정순왕후를 안장하고 제사를 지내
아직도 사가의 무덤이 남아 있는 것이다.
조선 왕릉의 능침은 기본적으로 도래솔(무덤가에 죽 둘러선 소나무)이 둘러싸고 있는데 사신사의 현무를 나타낸다.
현무는 소나무의 수피가 오래되면 검은색으로 변하고 두껍게 갈라져 거북 등 같은 모습이 되는 것에서 연유한다. 지금도 봉분을 중심으로 한
능침 공간에는 소나무가 절대적 우세를 나타내며 잘 보존되고 있다. 이 소나무들이 단종의 능인 장릉 쪽을 향해 고개 숙여 자란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 왕릉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참도가 이어지는데 사릉은 참도가 정자각까지 이어지지 않고 중간(아래사진)에 끊어저 있다,
사릉은 왕릉보다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사업소 묘포장으로 더 유명하다,
나오면서 돌아본 사릉은 단출하고 소박한 릉이다,
오른쪽 소나무 숲에는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 정씨가(鄭氏家) 묘역이 있다,
지금은 이곳 사릉을 찾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19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64년을 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정순왕후의 삶을 기억하는 사람들조차 없다는 뜻일까?
↓ 이 길은 릉에서 재실로 가는 길이다,
재실이다,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참봉등 관리가 이곳에 상주하면서 능역을 돌보았다, 주요시설로는 재실외에 향을 보관하든 안향청,
제례업무를 주관하는 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행랑채 등이 있어며 단청은 하지 않았다, 고 써여 있다,
문은 닫혀 있어나 댓돌이 4개인 것으로 미루어 방이 4칸인듯 보인다,
단종의비 정순왕후에 대한 못다한 이야기
염치는 있었든 것일까? 세조는 정순왕후를 노비로 내리면서 신분은 노비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는
명을내려 정업원으로 보냈다. 정업원은 조선 초기 슬하에 자식이 없는 후궁이나 결혼 후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아야 했던
왕실의 여인들이 기거 하던 곳이다. 정업원 바로 옆에는 비구니들이있는 청룡사가 있는데 고려 말 공민왕의 비인 혜비가 망국의
슬픔을 안고 스님이 되어 머물던 곳이다. 태조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도 이곳에서 비구니로 살았고, 정순왕후 역시
이곳에서 스님으로 머물렀다는 설도 있다.
정순왕후는 정업원에서 시녀들과 함께 살면서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 생계를 부담하기 위해 제용감에서 심부름하던 시녀의 염색 기술을 도와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다. 당시에는 지치라는 식물의 뿌리를 이용해 비단에 물을 들였다. 정순왕후가 염색업을 하던 골짜기를 자줏골이라 불렀다,
현재 한성대학교 후문 부근에 있으며 지봉 이수광 선생이 지봉유설 을 저술한 초가삼간 비우당(庇雨堂)에 당시의 흔적이 있다.
정순왕후가 염색하던 곳을 자주동샘(紫芝洞泉)이라고 하는데 정순왕후가 이곳에 와서 단종이 억울하게 죽은 영월쪽을 향해
명복을 빌며 비단 빨래를 하면 저절로 자주색 물감이 들었다고 한다. 비우당 옆에는 원각사가 있는데 단종의 넋을 천도하는 도량이다.
위 내용은 과학문화유산답사기 및 안내문을 참고하여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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