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진주 진주성의 6월(2020년 6월 7일) 본문
진주성(晋州城)은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 고려시대에는 촉석성, 조선시대 이래로는 진주성 또는 진양성(晋陽城)으로도 불렸다. 현재 성내에는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 순의단, 의기사, 창렬사, 호국사 등의 시설과 유적이 있어며
고려시대 말기인 1377년 빈번한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토성으로 쌓았는데, 2년 뒤인 1379년(고려 우왕 5)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돌로 쌓는 도중 왜구의 침입이 있었고, 왜구가 퇴각한 후에야 성곽 축조를 마무리한 성이다,
제1차 진주성 전투: 1592. 10. 05~1592. 10. 10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의 기습적 공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조선군은 한동안 육상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조선 군대와 의병군이 흐트러진 대오를 가다듬고 일본군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먼저 진주성을 확보한 후 호남지역을 공략하고자 했다.
1592년 10월 5일 김시민 장군은 군사 3,800여 명으로 호소카와 등이 이끄는 일본군 2만여 명의 공격을 받아 10월 10일까지 6일간 싸워 이를 물리쳤다.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가토 미쓰야스(加藤光泰)가 선봉에 선 일본군은 수적 우세와 조총 등 신식 장비를 앞세워 공격했으나 진주목사 김시민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하여 물러갔다. 이것이 제1차 진주성전투다.
제2차 진주성 전투: 1593. 06. 22~06. 29
일본군은 1592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1593년에 7만 대군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3년 2월 진주성 공격을 명령했고, 3월 10일과 4월 22일에도 연이어 진주성을 공격하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1593년 5월 20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 공격을 위해 장수 및 부대 배치를 확정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 구로다 나가마사 · 가토 기요마사 · 시마즈 요시히로 휘하 병력 25,624명과,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휘하 병력 26,182명을 제1군, 우키타 히데이에 휘하 병력 18,882명을 제2군, 모리 테루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휘하의 병력 22,344명을 제3군으로 하여 모두 92,972명에 대해 진주성 공격에 직접 참여할 것을 명령했다.
일본군은 1593년 6월 18일 의령으로 들어갔고, 다음날 군사를 돌려 진주로 향했다. 그리고 6월 19일부터 6월 21일까지 일본군은 진주 동북쪽 마현봉(馬峴峰)에 진을 치고 진주성을 에워쌌다. 그리고 제1군, 제2군, 제3군 약 7만의 병력으로 조선군과 백성들이 있는 진주성을 포위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모리 히데모토, 깃카와 히로이에 등이 이끄는 또 다른 일본군 부대인 제4군과 제5군이 진주성을 구원하러 올 조선군에 대비하여 진주성 외곽에 진을 쳤다.
진주성 방어는 창의사 김천일의 지휘 하에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진주목사 서예원, 거제현령 김준민, 의병장 고종후, 김해부사 이종인이 각각 담당구역을 정해 일본군과 맞섰다. 외부의 조선군 지원부대가 올 것에 대비하여 2중으로 포위망을 구축한 일본군은 6월 22일 성에 접근해 공격을 시작했다. 6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8일간 진주성에서 3천여 명의 조선군과 6만여 명의 민간인 그리고 약 7만 명의 일본군 간에 벌어진 전투를 제2차 진주성 전투라고 부른다,
오랜 역사와 애환을 함께지니고 있는 지금은 유적이 되여버린 진주성을 잠시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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