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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2021년 2월 13일 고량포 와 경순왕릉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2021년 2월 13일 고량포 와 경순왕릉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1. 2. 15. 00:33

DMZ 평화누리길을 3회나 완주를 했지만 평화누리길에서

조금은 비켜있는 고량포라서 이제야 찾아 왔다, 고량포구는 625전에는

지금의 연천군이 아니라 장단군이였고,

현재의 고량포는 버스승강장 하나뿐이지만 625전 고량포구는

문산 인구 3배가 넘는 큰 도시로 화신백화점이 있었든 번창한 마을이였다,

예전 장단군 사람들은 개성으로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개성에서 고량포까지는 자전거로 1시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곳으로

그토록 번창했든 고량포구는 625 전쟁이 인적이 없는 곳으로 바꿔 놓았다,

고량포구가 번창했든 시절에는 서울 마포나루 물자와 경기

북부지역 농산물을 이곳 고량포로 실어와 개성으로 공급하든 규모가 큰 나루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 공개된 장소 외 임진강변 고량포에는 온통 지뢰라는

팻말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그런 곳이다,

연천군은 고량포구를 역사공원으로 조성해 그 시절을

돌아볼수 있도록 재연해 놓았다, 고량포구 역사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말 한마리가 등 짐을 지고있는 동상이 보인다,

이 말의 이름은 레클리스 하사다, 그냥 붙인 이름이 아니라

미군에 공식적으로 등재된 군마(軍馬)로 한국에서 아침해 라는 경주마로 활동하다가

1952년 미국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레클레스라는 이름을 얻고 전쟁터에서 활약한 말로서 사람의

도움없이 하루에 51차레나 탄약을 실어 날랏으며 이 공로로 무공훈장등 5개의 훈장을

받았어며 1959년에는 미군 최초로 말 하사관으로 진급했다고 적혀있다,

고량포구는 625전쟁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젓지만

그 시절의 영화는 역사공원에 그대로 재연되여 추억을 되살려준다,

역사공원으로 들어 가면서 보이는 돗배,

포구였어니 그 시절 돗배는 지금의 자동차 정도로 흔한게 아니였을까? 

고량포구에 있었든 과일가계 부터 어물가계와,

양장점, 연천쌀가게등등

고려인삼, 주막과 여관 등등의 모습들이 그대로 재연되여 있다,

종로에만 있는줄 알았든 유명한 화신백화점이 고량포구에

있엇다고 하니 그 시절 고량포구는 상상이 안된다, 화신백화점에 진열했든

상품들을 보니 지금보다 더 고급 스러워 보인다,

우체국이나

약방은 사람이 사는 곳이면 기본일테지만

엄청난 규모의 우시장은 그때의 영화를 보는듯 하고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먹거리가 있어야 할터

이 정도의 식당도 그 시절에는 깨나 유명한 음식점이 아니였을까,

백반과 막걸리

보는 것 만으로도 먹음직 시럽다,

자매국밥집 국밥도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듯 하다,

유독 정겨워 보이는 자전거와 우편물행낭

이 시절 우체부 아저씨들은 지금 어디서 살고 계실까?

잠을 잘수있는 여관

단기, 장기, 숙박을 다 할수 있다는 간판도 어쩐지 졍겹기만 하다,

 인삼은 개성이 원조격이니

고려인삼 상회가 있었든 것은 당연했을 것 같다,

그 시절 고량포구를 드나들었든 돗배 모형

임진강 수심이 얕아서 그때도 큰 배는 다니지 못했을 것 같았다,

이제 여기를 나가면 경순왕릉으로 간다,

1968년 1월 18일 김신조 일당 30여명이 얼어붙은 고량포를 건너

침투했든 곳으로 그 이후 더욱 경비가 강화되여 고량포의 흔적이 남김없이 지워지게 된다,

고량포구를 재연해 놓은 고량포구 역사공원이 있는 이곳은

고량포구 임진강변이다,

고량포구 역사공원 옆 도로 로 경순왕릉으로 간다,

여기서 경순왕릉은 약 400m 정도의 거리다,

경순왕은 신라 제56대 왕으로 마지막 왕이다.

성은 김, 이름은 부로 신라 문성왕 6대손이며 927년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 후백제, 고려, 통일 신라로 나누어저 있었고

후백제의 잦은 침공과 각 지방 호족들의 할거로 신라는 국가기능이 마비되는 상태였다.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고자 신하들과 큰 아들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에 귀부하였다. 이때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막내 아들

범공은 화엄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귀부후 경순왕은 태자의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받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43년 후인

고려 경종 3년(978년) 세상을 떠났다.

경순왕이 고려 경종3년(978년)에 세상을 떠나자

운구행열이 경주로 가기위해 이곳 임진강 고량포에 이르럿을때 왕실에서

왕릉은 개경100리 밖에 쓸수없다는 이유로 막아 이곳 고량포 북쪽 언덕에 자리해

신라 왕릉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능이 되였다,

경순왕릉 주차장에서 잠시 언덕을 올라가면

릉과 비각 그리고 재실로 꾸며진

경순왕릉이 있다,

비각에 보존되여 있는 비석은

1000년의 역사를 견디고 서 있지만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이라는 글자는 마모되여 보이지 않는다,

경순왕릉은 곡장은 둘렀지만

조선시대 왕릉과는 전혀 달라 보이는

그저 소박한 모습의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