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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2021년 2월 13일 숭의전과 당포성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2021년 2월 13일 숭의전과 당포성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1. 2. 16. 00:33

숭의전 입구로 왔다, 보이는 정자는 어수정이다,

고려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때 개성(송악)과 철원(태봉)을 왕래하면서

중간지점이였든 이곳에서 물을 마셧다고 해서 어수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금도 어수정 샘물은 물맛이 좋아서 약수터로 이용하고 있다,

숭의전으로 들어가는 홍살문 옆 또 하나의 작은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하마(下馬), 숭의전으로 들어가려면 이곳에서 말을 내려 걸어가야

한다는 표석이다, 지금으로 보면 차량통행 금지구역이 아닐까,

여기가 사적 223호 숭의전이다,

1397년(태조 6)에 태조의 명으로 묘(廟)를 세우고,

1399년(정종1)에는 고려 태조와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선종,

목종, 현종의 7왕을 제사지내고, 1423년(세종5)과 1452년(문종2)에 중건했다.

문종은 이곳을 숭의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외

열다섯분의 제사를 지내는 전각이다, 16분의 신위가 있다,

숭의전 앞으로 흐르는 임진강

숭의전을 나와서 옆에있는 언덕에 자리한

잠두봉으로 올라간다,

이 길은 평화누리길 11코스 이기도 하다,

숭의전옆 언덕에 있는 잠두봉이다,

이곳의 지형을 임진강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마치 누워있는

누에머리 처름 보인다고 해서 잠두봉이라 부른다,

조선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왕족 몇사람이 태조 왕건의 신위를 안전하게 보호하려고 돌로 배를 만들어

예성강입구에서 바다로 띄웠다, 바다로 나간 돌배는 임진강을 거슬러 황해도 안약까지 올라

갔다가 다시 강을따라 내려와 동이리의 한 절벽에서 멈추었다, 왕씨들은 쇠로 닻줄을

만들어 돌배에 매달아 끌고 왕의 신위를 모실만한 장소를 찾다가

잠이들었은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배는 사라지고 배를 묶었든 쇠닻줄은

썩어 없어저 버렸다, 다시 후손들은 배를 찾아 강을따라 내려 오다가 누에머리 절벽

아래 붙어 움직이지 않는 돌배를 발견했다, 왕씨후손들은 이를 하늘의 뜻이라 절벽위에 사당을짓고

태조의 신위를 모신후 숭의전이라 이름하기로 했다, 지금도 청명한 날에는 누에머리

절벽 밑에 가라앉은 돌배가 보이고 하루밤 사이에 쇠닻줄이 썩었다고 썩은쇠라

불리든 말이 오랜세월 동안에 변해 썩은소(沼)로 불린다,

전설이야 어찌 되였건

지금도 임진강 물은 유유히 아래로 흘러간다,

평화누리길은 이렇게 북으로 이어지지만

다시 숭의전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숭의전에서 2,3km 거리에 있는 당포성으로 왔다,

연천당포성(漣川 堂浦城)은 사적 제468호로 지정되여 있어며 연천 호로고루,

연천 은대리성과 함께 임진강과 한탄강이 지류와 만나 형성하는 삼각형의 대지 위에 조성된

독특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으로 임진강이 국경하천(國境河川) 역할을 했던 삼국

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귀중한 문화유적이다.

당포성은 임진강의 당개나루터 부근에서 합류하는 지천과 임진강으로

인하여 형성된 약 13m 높이의 긴 삼각형 단애(斷崖) 위에 축성되어 있으며, 입지조건과

평면형태 및 축성방법은 호로고루및 은대리성과 매우 유사하다.

당포성은 파주의 어유지리 방면에서 마전을거쳐 삭령에서

토산을거쳐 신계 방면으로 가든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양주 방면에서

북상하는 적을 방어하는데 전략적 중요성이 매우 크다. 

반면 이곳은 임진강을 건너 양주 방면으로 남하하는 적을

방어하는데도 매우 중요한 위치므로 나당 전쟁 이후 신라가 당포성

외벽에 석축벽을 덧붙여서 보강하고 계속 활용했다.

당포성은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수직 단애를 이루지 않은

동쪽에만 석축 성벽을 쌓아 막았다. 동성벽은 길이 50m, 잔존높이 6m 정도며,

동벽에서 성의 서쪽 끝까지의 길이는 약 200m에 달하며 전체 둘레는 450m 정도로

호로고루보다 약간 큰 규모다.

당포성의 동벽은 내외성의 2중성으로 구축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사결과 외성의 토루는 후대에 구축되였음이 확인되였다.

당포성에 관하여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는

전혀 언급이 없으며 유일하게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기언별집(記言別集)에

마전앞 언덕 강벽위에 옛 진루가 있는데 지금은 그 위에 총사가 있고, 그 앞의 나루를

당개라 하며 큰물이 흘러 나룻길로 통한다고 기록되어 있는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