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역사로 보는 청계천(2016년 9월 24일) 오간수문 -> 광교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역사로 보는 청계천(2016년 9월 24일) 오간수문 -> 광교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6. 9. 28. 13:16

청계천 나래교다, 오늘은 청계천 오간수문에서 광교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래교는 오간수문에서 광교방향에 있는 첫번째 다리로 어쩌다보니 청계천으로 내려가는길을 찾지못해

이곳까지 왔다, 청계천은 조선이 한양에 수도를 정하기 이전부터 자연적으로 믈길이 형성되여 있었든 곳이다,

서울은 지리적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니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곳으로 천이

형성되여야 하는게 자연의 이치가 아니든가,

자연으로 형성된 하천은 서울의 기후적 변화에 따라 봄가을에는 건조하고 여름에는 고온다습하였다,

따라서 비가 적게오는 봄가을에는 비교적 말라있는 건천(乾川)이였든 반면 여름철 우기에는 비가 조금만와도 물이

흘러 넘처 홍수가 났다, 더욱이 도심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천이라 청계천주변에는 시전행랑과 민가가 밀접해 있었다,

그래서 비가많이와서 물이넘치면 가옥이 침수되거나 다리가 유실되고 익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흔한일이였다,

조선시대 청계천

조선초기 도성건설사업과 함께 배수를 위한 물 길을 만드는 일이 매우중요하고 큰 사업이였다,

조선태종 즉위초인 1406년부터 1407년 까지 자연상태에있든 하천바닥을 처내서 넓히고 영안에 둑을 쌓아

몇차레에 걸친 정비로 하천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큰비가 올때마다 피해가 계속되자 마침내 1411년(태종11년)

하천을 정비하는 개천도감을 만들어 다음해1월부터5월까지 52800명의 인부를 들여 대대적인 공사를 실시했다,


이때 주요 하천의 양안을 돌로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의 다리를 돌다리로 만들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 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였는데

이 때의 개천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르키는 고유명사가 되였다,

태종때 개천공사가 주로 개천 본류에 대한 정비였다면 세종은 지천(支川)과 작은 세천(細川) 정비에

많은 노력을 했다, 특히 종로 남북쪽으로 들어선 시전행랑 뒤편에 도랑을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로 연결했다,

이것이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상류로 몰려들어 넘처나는것을 방지해서 도심의홍수를 예방했다, 세종 23년인1441년

에는 마전교(馬前橋)서쪽 水中에 표석을세웠다, 이 표석에 척(尺) 촌(寸) 분(分) 등의 눈금을 기둥위에 새겨

수위를 측정할수 있도록햇는데 이것이 바로 수표(水標)다,

서울을 둘러싸고있는 외수(外水)인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흐른다, 그러나 도성 한가운데를

흐르는 내수 (內水)인 청계천은 한강과는 반대로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더욱이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성 한가운데에 위치하다보니 오늘날과 같은 하수처리 시설도 없었든 시절이라 청계천에는 온갖

쓰레기와 오물들이 흘러 들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정은 풍수학상의 명당수 즉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많은 사람들이

살고있어 더러운것이 많이 생기므로 이것을 배출할 하천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적 주장이 맞서든 시절 이 논쟁에서

세종은 후자를 택해 생활하천으로 결정한다, 이로서 청계천은 조선왕조 500년동안 도성에서 출하는 많은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로서의 기능을 함으로서 도성 전체를 깨끗하게 유지할수 있었다,

태종과 세종때 조성된 개천은 이후 영조임금까지 350년동안 큰변화는 없었다,

비가와서 민가가 침수되고 다리가 유실되는 크고 작은 사고는 있엇지만 이것은 개천에서는 흔한일이다,

 더욱이 태조와 세종시 정비한 개천의 하수처리용량이 당시 도성인구 10먼명 정도가 솓아내는

하수를 처리하는데 특별한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 18세기에는 사정이 바뀐다, 임진1592년, 병자 1592년 두 차레의 전란을 격은이후

많은 유민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서울의 인구가 급증한다,1657년 약 8만명 정도이든 서울 인구가

10년후인 1669년 에는 19만명으로 늘어난다, 인구급증으로 생활하수는 개천이 감당할수 없을 정도로 크게 증가하고

더욱이 유민들은 생계를 위해 개천변에 채소밭을 경작함으로서 수로가 막혀 배수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더욱이 17, 8,세기에는 이상기온으로 태풍, 폭우, 우박, 눈, 등이 끊이지 않아 추위를 이기기 위해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사용해서 도성주변의 산들은 민둥산이 되여 조금만 비가와도 토사가 쓸려내려와 개천바닥을 메우게된다,

따라서 영조가 즉위한 1725년 경에는 토사가 쌓여 하천바닥이 평지와 같은 높이가되여 준설이 불가피한 상황이였다,

준천을 하기앞서 영조는 수차레 그 시행여부를 조정의관리와 백성들에게 물어본다음

1759년(영조35년) 준천을 관리할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영조36년 2월 18일 대역사가 시작되였다,

이때 준천은 송기교, 영도교까지 8개 구간으로 나누어 개천에 두텁게쌓인 흙을 걷어내고 개천의 깊이와 폭을예전처름

회복했어며 무너진 다리를 보수하고 상류및 지류는 물론이고 경복궁,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안에 있든

물길도 준설하여 물이 잘 흐르게 했다, 이때 모두 동원인원은 20여만명이나 되였다, 또한 준천의 시말과

장래에 해야할 일을 기록한 준천사실(濬川事實)도 편찬했다, 

이후 영조는 1773년 1760년 준천시 물자와 인력이 부족하여 시행하지못했든 개천 양안을

석축(石築)하고 양쪽 제방에 돌을 쌓아 튼튼하게하고, 꾸불 꾸불한 수로를 곧게 바로 잡았다, 또항 양안에

버드나무를심어 큰 비가와도 제방이 무너지지않게 했다,


영조가 개천준설을 위한 대역사를 시작한 것은 빈민구제 구휼의 목적도 있었다,

두차레의 전란이후 생겨를위해 도성으로 몰려든 유민들에 대한 수휼이엿다, 국가에서 이들을 구휼하기위해

도성축조나 준천과같은 큰 토목공사을 일으켜 이들을 고용하는것이다, 영조가 실시한 준천역시

5만염의 고용인력이 투입되였다, 오늘날 공공근로사업같은 것이 아니였을까,

일제강점기 시대 청계천

조선시대 북촌과 남촌의 경계였든 청계천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민족의거리 종로와

왜인들의 마을 마찌(本町)를 가르는 경계선이 된다, 결국 이것은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의 차별의 선이 되였다,

먼저 마을 이름에서 청계천북쪽은 동(洞)과 같은 전래의 마을 이름을 사용했고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청계천 남족은

혼마찌(本町, 지금의명동) 일본식 지명을 사용했다, 도로의 확장이나 주요시설물의 신축등 도시의 기반시설도

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청계천 이남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졋다,

일본은 청계천(맑은물이 흐르는 시내)을 이름값 못하는 탁계천(더러운 물이 흐르는 시내)이라 비웃었다,

1918년 일본은 청계천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청계천이 가지는 상징성이나 보건, 위생, 등 서울 사람들의 일상

생활의 중요성을 인식한 때문이 아니라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조선식민지배의 중추기관을 청계천 이북으로

이전하기 위한 사전 정비작업의 하나로 시작했다,


1825년부터 지금의 종로구 신교동에서 도렴동까지 백운동천을 비롯해 옥류동천 사직동천 등을

복개한다, 당시 복개는 하천에 ㅁ 형 하수관을 만들었다, 이로서 지천들은 물이흐르는 실개천이 아니라 하수구로 전락한다

이후 일제는 1926년 청계천을 복개해 1만평의 택지를 조성해 광통교에서 주교정까지를

철근콘크리트로 덮어서 택지와 상가 위락시설을 조성하고 1935년에는 청계천을 전면복개하여 도로를

만들고 그 위로 고가도로를 건설한다는 구상을 발표 했어며 1939년에는 청계천을 덮어 자동차전용 도로를 만드는 안이

마련되였고 1940년에는 청계천을 복개하여 위로는 전차, 밑으로는 지하철을 부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이 모든 청계천 복개구상은 일본식민정부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치달어면서

조선의 지배강화와 서울을 대륙의 병참기지로 육성하기 위함이였다,

그러나 이모든 계획들은 재정문제로 구상에 그치고 말았고 실제 복개가 이루어진것은 1937년

태펑로에서 무교동 구간이였다, 한편 일본의 청계천 정비로 청계천에 있든 많은 다리들이 수난을 격는다,

광통교는 다리옆에 전차선이 놓이게 되였고 다리는 콘크리트로 보강되여 확장되였다, 광통교 교대에는 1m가넘는 하수관이 묻혔다,

오간수문은 1908년 완전히 헐렸고, 대신 차로와 전차성로 겸용다리가 놓였다, 하량교, 영도교, 등 일부다리는 근대식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고 관수교, 주교와 같은 근대식 토목공법을 이용한 새로운 다리도 가설된다,

해방이후 청계천

1945년 해방을 즈음하여 청계천에는 토사와 쓰레기가 하천바닥을 뒤덮고 있었어며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늘어선 판자집들과 거기에서 쏟아지는 오수로 심하게 오염되여 있었다,

1949년 광통교에서 영도교까지 청계천을 준설하는 계획을 세우기는 하였지만 이 마저도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더욱이 한국전쟁이 끝난다음 생계를 위해 서울로 모여든 피난민들중 많은사람들이

청계천변에 정착하게 된다,

이들은 반은 땅위에 반은 물위에 떠 있는 판자집을 짓고 생활했다, 천변을따라 어지럽게 형성된

판자촌과 여기에서 쏟아내는 생활 하수로 청계천은 빠르게 오염되고 엄청난 양의 하수가 도심 한가운데를 흐르면서

발생하는 악취로 주변에 살고있는 주민들은 큰 고통을 받았어며 도시 전체의 이미지도 크게 손상되였다,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식민지와 전쟁을 격은 나라의 가난하고 불결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슬럼지역이 였어며 위생면에서나 도시 경관면에서 청계천을 그대로 두고는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할수도 없었다,

기초적인 생필품을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웠든 당시의 경제성장 속에서 청계천 문제를 가장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복개(覆蓋)였다,

청계천 복개(覆蓋)

1955년 광통교 상류 약 136m 복개를 시작으로 1958년 본격적으로 복개되기 시작했다,

58년 6월부터 1961년 12월 광교에서 청계 6가 동대문 운동장까지, 65년 ~ 67년 청계6가에서 청계 8가 신설동까지

70년 ~ 77년 청계 8가에서 신답철교까지 복개되고 고가도로가 건설된다, 광교에서 부터 마장동에 이르는

총길이 5,6km 폭 16m의 청계 고가도로가 67년 8월 15일에 착공되여 71년 8월 15일 개통된다,

청계천주변에 어지럽게 늘어선 판자집들은 철거되고 현대식 상가건물들이 들어섯어며

토사와 쓰레기 오수가 넘처나든 하천은 깨끗하게 단장된 아스팔트 도로로 바뀐다, 시원하게 뚫린 복개도로와

고가도로는 자동차가 쏜살같이 달렸다, 불과 몇년전만해도 서울의 가장 부끄러운 곳이였든 청계천은

근대산업화의 상징으로 울의 자랑거리가 되였다,

반면 청계천 복개로 주변에 살든 많은 사람들은 봉천동, 신림동, 상계동 등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여

또 다른 빈곤의 상징인 달 동네를 이룬다, 또한 광통교와 같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도 함께 훼손 되였다, 

지난 50년동안 청계천만큼 서울의 역사를 분명하게 농축하고 있는곳은 없다,


50년대말 쓰러기와 오수로 뒤덮힌 불결과 빈곤의 상징에서 60~70년대에는

성공적인 산업근대화로 상징되였고 80~90년대에는 공구, 인쇄, 의류, 등 도심산업의 중심지 임과 동시에

소음, 혼잡, 매연 등으로 도시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복구와 현재의 청계천

2003년 7월 1일 0시를 기해 청계고가도로 철거가 시작되었고,

복개된 청계천로 일부가 철거되면서 새롭게 태여난 청계천은 현재의 모습으로 우리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글은 서울시설공단 청계천 편을 참고하여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