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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 - 대한민국의 혼이 살아있다,(2016년 9월 24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경교장 - 대한민국의 혼이 살아있다,(2016년 9월 24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6. 10. 1. 20:53

1938년 조선제일 건축가 김세연의 설계로 지은 건평 265평의 양식2층(지하1층) 건물로, 죽첨장이라 불리였다,

하지만 김구 선생이 경교장으로 바꿔 불렀다. 교장은 백범 김구 서거 이후, 소유주인 최창학의 유족에게로 반환되였다가,

1968년 고려병원에 인수돼 삼성생명 소유로 강북 삼성병원 부속 건물로 사용되였고 지금도 삼성소유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임시정부가 어떻게 태동되였는지? 아는 사람들은 많지가 않다,

그래서 역사를 말하려는게 아니라 임시정부의 기록을 살펴본다, 경교장은 나라를 빼앗긴 일제 강점기에 중국에서 27년간

파란만장한 항일 독립 투쟁을 전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가 해방 후 환국해서 역사적인 첫 국무회의를 개최한

장소이자, 당시 민족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이 최후를 맞은 비운의 현장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그러면 대한민국 정부의 초석이 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발족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는 중국 상하이에서 첫 수립됐다. 1919년 3월 1일  독립국’임을 선포한  3.1 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국내외 인사들이 상하이에 모여 국호를 대한민국 으로 한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임정 수립은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이뤄졌다.

임시의정원은 지금의 국회와 같은 것이다. 이 임시정부 수립에 대해 논했던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작성된 회의록이 기록자료로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3.1독립선언서가 발표된 후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많은 인사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이들 중 29명이 1919년 4월 10일 오후 10시에 프랑스조계 안에 있는

금신자로 라는 곳에 모여 회합을 가졌다. 

이들이 모여 가장 먼저 결정할 사항은 모임의 명칭이었다.

회의가 시작되면서 조소앙(1887~1958)이 본회(會)의 명칭을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이라 칭(稱)할 것 을

동의했고, 이를 신석우(1894∼1953)가 재청해 회의의 명칭은 ‘임시의정원’으로 결정됐다. 이어 의장, 부의장, 서기를

 선거해 합법적인 임시의정원이 구성됐다.  

임시의정원이 구성된 후에는 곧바로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됐다.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 였다. 이 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됐다.
회의는 국호 정부의 관제 국모원 선출 임시헌장 통과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들이 회의 명칭에 이어 결정한 것은 국호였다 

신석우가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칭하자 고 동의했고, 다른 의원들이 이를 재청했다.

이로써 국호는 대한민국 으로 결정됐다. 다음으로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하는 정부의 관제 를 결정했고,

이어 국무총리와 내무총장, 정부 각 부서의 각 원(員)을 선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임시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을 제정 통과시킴으로써

국호를 대한민국 으로 한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 육군소위 이자

주한미군방첩대 CIC요원인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한 장소 그때의 총탄자국이 유리창에 재현되여 있다,

서거당시 입고 있었든 김구주석저고리





1945년 12월 3일 경교장에서 첫 국무회의를 마친 후 경교장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앞줄 왼쪽부터 조완구 재무부장, 이시영 국무위원,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조소앙 외무부장, 신익희 내무부장.

(사진 : 경교장 복원범민족추진위)

방문객이 찍어서 보낼수 있는 기념 스탭프 우편 엽서다, 입구에 비치되여 있다,

경교장은 현재 소유자인 삼성이 서울시에 무상임대 형식으로 제공하고 있다,

이제는 국민의 품으로 돌아와 완전복원이 되여야 하는데 안타깝다,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등과 함께 건국활동 3대 장소 중 하나이기도 했든

경교장은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가 해방이후 상호간 대립관계에 있게 되면서 이화장과 쌍벽을 이루기도 했다.

일제시대 금광(金鑛) 갑부로 불리웠던 최창학(1891 ~ 1959)의 개인소유 자택이었지만 최창학이 친일(親日)

성향이 있었던 편이라 해방이전까지는 친일파 호화자택으로 비판을 받아온 곳이기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