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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파사성婆娑城 에서 2000년의 역사의 숨결을 느낀다,(2014년 12월 27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파사성婆娑城 에서 2000년의 역사의 숨결을 느낀다,(2014년 12월 27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4. 12. 27. 10:12


파사성 은 남한강 동쪽에 있는 파사산 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성으로 , 한자로는 할미파 婆 자에 춤출사 娑 자를 쓴다, 

최근 몇년동안 발굴 조사에서 삼국시대의 유구가 발견되여 축성시기가 삼국시대로 밝혀졋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 때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승군 총섭 의엄이 승군을 동원하여 3년에 걸처 옹성과 장대, 군기소까지 갖춘 성으로 수축했다고 전해진다,

파사성 들머리는

양평에서 여주로 가는 37번국도 이포보 근처에 있는 파사성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앞에 보이는 둥근 모형이 있는 다리가 이포보다,

파사성 자체가 남문과 동문이라는 두 문을 가지고 있는데, 주차장에서 바로 연결되는 문은 파사성의 남문으로.

파사성의 주 통로다. 반면에 파사성 동문으로 연결되는 통로는 천서사거리로부터 송촌리 방향으로 1㎞ 정도 들어간 뒤

좌측으로 보이는 마을을 경유해 올라간다. 오늘은 일단 파사성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잘 닦인 길을 따라 오른다.

파사성지 발굴과 보수를 위해 차량과 장비가 다니는 길로 확장된 길이다.


남문지에 이르면 고르지 못한 성벽이 칡덩굴과 잡목 속에 묻혀 있다. 튼튼한 모습을 보이는 성벽 부분도

일부 남아 있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심하게 파손된 상태다. 문지 양옆으로 8각형 돌기둥 초석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뿐,

나머지는 깡그리 문지 옆 풀 속에 돌무더기로만 남았다. 복원공사로 덧 씨워진 남문으로 들어간다,

파사성은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와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의 경계에 걸쳐있는

230.5m 높이의 파사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세워진 테뫼식(봉우리들을 둘러쌓아 성을 축조하는 방식) 산성이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길이는 943m 정도이며, 사적 제251호로 보호되고 있다. 사적지 지정면적은 3만5504㎡, 복원된 구간의

 성벽 평균 높이는 6.25m이나 1m 남짓한 낮은 높이 구간도 있다. 성내 주요 시설물로는 성문 2개소, 포루 3개소,

우물지와 수구지, 곡성지가 각 1개소, 추정 건물지 8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파사성의 유래와 장소성

한강 물줄들의 이름이 제각각이다. 강원도 정선을 지나는 한강 상류지역은 동강이고 영월을 지나면 서강이 된다,

더 하류인 충주에서는 충주강이 되고. 원주쪽에서 흘러온 또 다른 물줄기인 섬강과 만나면서 여강이 된다. 여강은 일명 황려강(騜驪江)

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황려강이란? 붉은 말과 검은 말이란 뜻이다. 물속에서 말이 나왔거나 보였다는 이야기다. 

이곳 파사성이 있는 여주를 흐르는 한강 이름은 여강이다.

그리고 이보다 조금 이래 쪽인 양평을 지나면서는 다시 양강이란 이름으로 불리다가,

그 아래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합쳐지면서 모두 한강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한강의 여주구간, 그러니까 여강에는 나루도 여러곳이 있었다.

이포나루는 ↓ 이포대교나 이포보로 부터 상류 쪽 1.5㎞ 쯤 떨어져 있었고. 다시 그 상류에 여주나루,

하류 양평 쪽에는 양수리나루 등이 있었다. 이포의 한자 표기는 梨浦다.

그러나 원래 유래는 배(梨)와는 무관한 배(舟)였다. 즉 배가 닿는 나루, 또는 배나루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자 표기가 되면서 뜻보다 소리를 취해 그렇게 바뀐 것이라 한다. 아울러 이포보다 먼저 불리던 원래의 이름은 이호(梨湖)였는데,

삼촌 세조에게 쫓겨난 어린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갈 때에 이 이호를 건넜던 것으로 전한다.

파사성의 위치는 다시 영남에서 중원 충북으로 이어진 길을 한양으로

이어주는 지점이기도 했다. 이포는 나루는 도섭( 渡涉, 요즘은 도하라는 말을 많이 쓴다)의 요지다,

파사성에서는 이 나루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었으며 쉬운 공격으로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줄 수도 있었다.

또한 여주와 이천에서 공급되는 쌀은 파사성의 군량확보에 큰 장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성에서 조망되는 주변경관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래서 일까?

고려말의 이색과 조선중기의 유성룡이 파사성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를 시로 남겻다고 한다,

아름다움의 값어치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듯 하다,

婆娑城 (파사성)

婆娑城上草芊芊 (파사성 위로 풀이 무성하고)

婆娑城下水縈廻 (파사성 아래로 물은 굽이쳐 돈다)

春風日日吹不斷 (봄바람 날마다 불어 그치지 않으매)

落紅無數飛城隈 (떨어지는 꽃잎들이 성 모퉁이에서 날린다)

道人神眼覰天奧 (도인 의엄의 뛰어난 안목이 하늘의 깊은 뜻을 읽어)

一夜昆明生刦灰 (하룻밤 사이에 무너진 파사성을 새롭게 고쳐냈구나)

金剛百萬奉指揮 (금강역사 같은 부하 백만 명이 그의 지휘를 받들어)

尺劍長嘯臨江臺 (강가 누대 옆에서 칼 잡고서 긴 휘파람을 불도다)





파사산성 정상에서 동문지로 가는길 ~ 동문지 까지는 50m 다,

여기가 동문이 있었든 자리다,


그리고 다시 파사성으로 들어온 남문지로 간다, 동문지와 남문지간 거리는 200m다,


아직도 복원공사가 진행중인곳이다, 언제 끝날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왕하는거니

 시간이 걸리드라도 제대로 복원을 했어면 하는 생각이든다, 물론 2000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는게 어렵겠지만, ~

여주 파사성은 서울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여주시나

이웃 군 소재지와는 조금 떨어진 곳이라,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불편하고. 승용차로 가야한다,

가는 경로는 막국수마을인 여주 대신면 천서4거리에서 양평방향으로 300m 떨어진곳에 파사성 주차장이 있다,

이 주차장 왼쪽 잘 딱여진 임도를 따라 약 1km 정도를 올라가면 파사성 ↓ 남문터다.

↑ 주차장에서 연결되여 성으로 들고나는 남문터는 파사성의 정문이였다,

지금 남문이 있엇든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세운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팔각 주춧돌이 있는것으로 보아 누각이나  

암문등 출입문이 있었든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남문터 안쪽에는 넓은 평지가 있고 지름이 5m나 되는 저수지

모양의 우물터에는 지금도 물이 고여 있다, ↓ 아래 사진은 주차장으로 가는 임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