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정신문화 성지 도산서원 - 3,(2016년 11월 13일) 본문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처음 세웠다.
이황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1488~1544) 과 명종(1534~1567) 그리고
선조(1552~1608)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퇴계 이황은 1551년 1월에 풍기군수를 사임하고 지금의 도산서원에서 3km 정도 떨어진
한서암 寒棲菴 동북쪽 계천 溪川 위에 계상서당 溪上書堂 을 세워 문인들을 맞아 강론을 시작했다,
1560 년에는 도산 자락에 도산서당을 완성하고 이듬해는 농운정사를 지었다, 퇴계는 설계도를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공사도 직접 지휘할 정도로 건축가로서 안목과 실력도 출중한 유학자였다,
그래서 도산서원이라 불리는 공간에는 도산서당과 도산서원이 공존한다
서원 앞 마당, 고목에도 가을은 깊숙히 내려 앉아 있다,
이곳은 낙동강가를 바라볼수 있는 이름다운곳 천연대다, 퇴계선생의 산책로였든 곳이다,
낙동강 건너편에 있는 시사단이다, 시사단은 조선 정조 때 지방별과(地方別科)를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날씨가 조금만 좋았드라면 저 물에 투영되는 가을 옷이 무척이나 아름 다웠을 텐데, ~
낙동강은 흐르는게 아니라 안동땜으로 갇혀있다, 그래서 위에 보이는 시사단도 안동땜 만수위를 감안해서 높게 올려놓은 것이다,
서원 앞 고목 ~ 연대를 알수도 없을만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천연대로 내려 가는길 ~
마주하고 있는 시사단은 1792년(정조16) 정조는 퇴계 이황(李滉)의 학덕을 추모하여
규장각 각신 이만수(李晩秀)를 도산서원에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 다음날 이곳 송림에서 어제로 과거를
보았는데 응시자는 7,000명에 달했다, 시사단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 였든 번암 채제공이 지었다, 안동땜 수몰로 송림은 없어지고
단 壇 만이 현위치에서 지상 10m 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科擧)의 자리를 표시해 두고 있다,
천원짜리 지페 뒷면에 도산서당이 새겨저 있었다,
우측에 도산서당의 평상 툇마루와 이어붙인 지붕, 툇마루 맞은편에 네모진 연못(정우당)
그리고 개방된 담장까지 볼수 있었다,
지페의 사진 도산서원은 지금과 비교 해도 변화가 없다,
그러나 왜? 바뀌였을까?
천광운영대다, 하늘과 자연의 섭리를 사색하고
심오한 참 뜻을 사색하기 위해 동편에는 천연대를 만들고 우측에는 천광운영를 만들어 산책을 하든 장소였다,
도산서원으로 들어왔든 길을따라 돌아 나간다,
단풍이 곱게 물든 낙동강가를 따라가는 길은 먼 세월속에서 다시 현 세상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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