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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서해안국토종주 5-14 (무안버스터미널~영광불갑면사무소)영광흥무공원-함정리교차로(2018년 5월 18일) 본문

서해안 일주(해남 땅끝-김포)/전남·해남,영암,목포,무안,함평,

서해안국토종주 5-14 (무안버스터미널~영광불갑면사무소)영광흥무공원-함정리교차로(2018년 5월 18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6. 12. 05:30


왜 이곳에 흥무공원이 있는지 알길은 없지만

여하튼 흥무공원 앞에서 23번국도 함영로 로 들어간다,

가는길 오른쪽에 덕현 마을이 있고

왼쪽에는 이렇게 농촌주택 다운 멋을 풍기는 마을도 보인다,

그리고 삼덕삼거리다,

삼덕교차로에 있는 덕천버스정류장

삼더교차로를 지나고


계속해서 불갑면 방향으로 올라간다,

좌야마을을 지나간다, 좌야마을에는 625때 마을주민 전체가 몰살을 당할뻔했든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 이야기는 2017년 6월 23일 전남일보에 실린 기사내용이다, 함평 신광면 삼덕리 좌야마을은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지난 1950년 이곳에 살았던 50가구 150여 명 주민들은 한 순간 북한군 부역자로 몰려 목숨을 잃을 뻔 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한 의인의 도움으로 마을 주민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벗어났다. 2분만 늦었어도 몰살당했을 것 이라는 주민들은

6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恩人)을 애타게 찾고 있다.

1950년 11월 17일, 그날은 좌야마을 진주 정씨 문중 제삿날이었다. 주민 모종렬(83ㆍ당시 16세) 씨는

당시 사건이 발생한 날짜를 정확히 기억했다. 이날 영광 불갑산에서 내려온 빨치산들은 좌야마을 어귀 세장산에 진을 쳤다.
경찰이 영광을 거쳐 함평으로 와 자신들을 소탕할 것이라는 사전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함평을 가려면

반드시 좌야마을을 거쳐야 했기에 빨치산으로서는 최적의 매복 장소였다.

그들은 도로가 놓인 다리 인근에 커다란 웅덩이를 파고, 기습공격을 준비했다.

잠시 뒤 예상대로 경찰이 다리를 지났고, 마을 일대에서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갑작스런 총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사태를 지켜봤다. 수시간 뒤, 총소리가 잦아질 쯤 들려온 부상자들의 신음 소리 뿐이었다.

이 총격전으로 경찰 15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빨치산 역시 그 배수만큼 사살됐다.

총격전은 오후 5시께 종료됐다. 안도의 숨을 내쉬던 주민들은 갑작스런 경찰의 소집령에 어리둥절했다.

당시 경찰은 예기치 못한 기습공격에 따른 대규모 사상자 발생에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빨치산의 매복이 마을 주민 중

내통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 경찰은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빨리 나오지 않으면 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겁에 질린 마을 주민들이 나오자 경찰은 마을 한 밭뙈기에 주민들을 3열 횡대로 세워놓고

기관총 1정을 앞에 설치했다. 총구는 무고한 주민들을 향해 있었다. 당시 17세였던 모선례(84ㆍ여) 씨는 경찰이

내통자를 말하라며 주민들을 윽박질렀다. 하지만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면서 낮 동안 한바탕 난리가

있던 터에 여기서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경찰이 목소리를 높일수록 주민들의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어린 아이들은 엄마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마을 어른들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내통자가 있을리 없다는 말만으론 설득이 쉽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기관총이 불을 뿜을 듯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때 차량 한 대가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영광경찰서장이 탄 차였다.

서장은 왜 마을 주민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느냐며 부하에게 상황을 물었다.

현황을 보고 받고 한참을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산세를 보니 이 마을 사람들과는 무관한 것 같다.

총구를 다른 곳으로 돌려라. 경찰이 일반인들을 죽여선 안 된다. 서장의 한 마디에 경찰들은 군말없이 총을거뒀다.

죽다 살아난 주민들은 이름도 모르는 영광서장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때 살아남은 좌야마을 주민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데 그를 기리기 위해 사은비(謝恩碑)를 세우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당시 영광서장의 이름이나 행방을 아는 이가 없어 유야무야됐다.

그러나 그때의 고마움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67년이 흐른 지금도 좌야마을엔 그 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있다.
그날 현장에서 모든 걸 지켜본 이는 이제 2~3명에 불과하지만, 이미 눈을 감은 마을 어른들은 후손들에게 언젠가 꼭 보은하라 는

유지를 남겼다. 마을 청년들은 좌야마을의 은인으로 당시 제10대 영광경찰서장인 이차동 경감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재임기간이 들어맞는데다,

이 경감이 지휘관으로 있던 경찰 병력이 6ㆍ25 발발 초기 영광을 중심으로 북한군, 빨치산을 소탕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많이 흐른만큼 이 경감의 유족이라도 접촉해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그 조차도 쉽지 않았다.

마을 청년들은 영광경찰서를 통해 이 경감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생존자 모종렬씨는 당시 영광경찰서장이 주민들을 모른 체 했다면 모두 몰살당했을 것 이라며 그때 은인이 누구인지조차 모르지만,

 은혜는 꼭 갚고 싶다고했다. 긴 이야기지만 이 야기는 전남일보 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다,

이제 삼덕3리 가인정마을로 들어간다,

가인정마을은 함평군 신광면 삼덕리에 있는 마을이다,


이제 가인정 마을도 지나고

같은 삼덕 3리에 있는 원골마을로 들어간다,

원골마을 표지석이 있는 곳에는 원골버스정류장도 있다,

원골마을도 지나고

이제는 함정 2리에 있는 신광면 함정리 교차로 로 간다,

이곳도 평야지대는 아닌 산지 구릉지 지만

보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들녁이다


함정 2리 버스정류장

청계마을과 무송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다

청계마을은 500m 무송마을은 200m 지점에 있다고 마을표지석에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