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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서오릉 두번째 이야기(대빈묘, 홍릉, 창릉, 명릉)-(2011, 10, 31)조블뉴스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서오릉 두번째 이야기(대빈묘, 홍릉, 창릉, 명릉)-(2011, 10, 31)조블뉴스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1. 10. 31. 23:17

 대빈묘 大嬪墓,  희빈禧嬪 장씨(? ~ 1701)는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어머니이다. 어린 시절 나인으로 궁에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1686년(숙종 12) 숙원이 되었으며, 1688년(숙종 14) 왕자 윤(훗날 경종)을 낳았다.

 

이듬해 숙종이 송시열 등 서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윤을 원자로 책봉함에

따라 내명부 정1품 희빈에 올랐다. 그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인현왕후가

폐위되었고 윤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1694년(숙종 20) 서인들의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계기로 남인이 옥사를

일으켰으나 숙종이 오히려 남인을 제거하고  서인을 재집권시킨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그해 인현왕후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희빈으로 밀려났다.

 

1701년(숙종 27) 민비가 병으로 죽자, 인현왕후를 무고 했다는 서인의

탄핵을 받아 사약을 받았다. 희빈 장씨가 1701년(숙종 27) 10월 10일, 인현왕후를

무고하고 저주한 죄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장사

지냈는데, 1969년 현재의 서오릉 지구로 옮겼다. 훗날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여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에 추존하였다,

弘陵(홍릉)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 1692년 ~ 1757년,

  21대 임금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는 1692년(숙종 18) 12월 7일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태어났으며, 1704년(숙종 30) 숙종의 둘째 아들인 연잉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졌다. 1721년(경종 1) 왕위에 오른 연잉군의 형 경종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자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는데, 이와 동시에

정성왕후도 세제빈으로 봉해졌다,

1724년(경종 4) 경종이 승하함에 따라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된다.

숙종과 경종의 부인을 극진히 모시며 내명부를 지켰다. 1757년(영조 33) 2월 15일

소생없이 66세로 승하하였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행장에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왕궁 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양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 제전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여겨 기록한다.

 

 영조는 정성왕후 승하 2년 후 66세의 나이에 15세의 소녀였던

정순왕후를 다시 맞아들였으나, 한 평생을 함께 했던 정성왕후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위의 행장에 잘 드러나 있다,

弘陵(홍릉)에서  昌陵(창릉)가는길은 한적하다 못해

바람소리 마저 들리지 않는 조용한곳이다,

昌陵(창릉) 8대 예종(睿宗)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 1450년 ~ 1469년,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와의 사이에 둘째 아들로 1450년(세종 32) 1월 1일 사저에서 태어났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18세에 요절 하였을 때, 의경세자의 아들인 원손 월산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적통계승의 원칙에 맞는 것이었으나, 월산군은 불과 4세의 어린 아이 였으므로 그 해 8세가 된

세조의 둘째인 해양대군(훗날 예종)이 1457년 (세조 3) 11월 15일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1468년 9월 7일 19세의 나이에 왕위를 이어 받았다.

 성년이 되지 않아 모친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한명회, 신숙주 등의

중신이 섭정하는 원상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병약했던 예종은 재위 1년 2개월 만에 요절하였다.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각도의 병영에 속한 전답인 둔전을 일반 농민이 경작하게 하여 백성들을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나게 하는 등의 업적을 세웠다. 세조 때 입안하였던 경국대전 을

완성하였으나, 채 반포하지 못하고 1469년 11월 28일 20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했다.

예종은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이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이 지은

야사모음집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에는 예종이 부왕 세조가 세상을 떠난 것에

충격을 건강을 해쳤다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환이 생기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세조가 돌아가매 슬픔이 지나쳐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게 되어 이 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라고 했다,

창릉은 1469년에 서오릉의 영역 내의 왕릉으로는 조영된 최초의 능으로,

병풍석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봉분 주위에 난간석을 두르고 있다. 석물 배치는 일반 왕릉과

같고, 양쪽 능침 아래 중간에 정자각과 홍살문을 잇는 축의 양 옆으로 수라방,

수복방 등이 대칭하여 배치되어 있다. 정자각 왼쪽이 예종의 릉이다, 

정자각 오른쪽은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 의 릉이다, 

 안순왕후는 청천부원군 한백륜의 딸로 태어났다. 예종의 첫째 부인 장순왕후가 

세자빈의 신분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1462년 가례를 올리고, 1463년 예종의 즉위와

동시에 왕비가 되었다.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만에 승하하자 1471년(성종2)인

혜대비에 봉해지고, 1497년(연산군 3)에는 명의대비에 진봉되었다.

 

 예종과 안순왕후 사이에는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할머니 정회왕후의 뜻에 따라

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 세자에 책봉되어 왕위를 이어받지 못하였다. 안순왕후는

1498년(연산군 4) 12월 23일 승하하여 이듬해 2월 14일 부군인 예종이 잠든

창릉에 안장되었다,

 

 

  명릉 明陵 은

  조선 19대 19대 숙종(肅宗)과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민씨,

그리고 제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의 능이다,

숙종은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현종과 명성왕후의 원자로 태어났다.

 1667년(현종 8) 세자로 책봉되었고, 현종이 승하한 1674년(현종 15)에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은 46년이었다,

숙종 시대에는 당파 간의 정쟁이 극에 달하여, 붕당정치가 파경을 맞을 위기에 처했다.

숙종 즉위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남인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을 통해 대거 실각하였고,

남인을 물리치고 실세를 얻은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이 때 숙종과 중전인 인현왕후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는데,

숙종의 총애를 받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았다. 남인은 이를 기회로 삼고자

소의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추대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노론의 무리들을

처결하고,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으니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숙종은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대동법을 전국에 확대 실시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였으며, 군사제도를 정비하는 등의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720년(숙종 46) 6월 8일 경덕궁의 융복전에서

60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사료가 밝히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지만, 숙종과 인원왕후의 능이 이곳으로

정해진 연유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숙종이 하루는 평상복을 입고 민심을

살피기 위해 궐을 벗어나 어느 냇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때 냇가에서 한 젊은이가 울고있는

것이 보여 연유를 물으니, 갈처사라는 유명한 지관이 이곳에 무덤을 쓰면 좋다고 해서

땅을 파는데, 아무리 파도 물이 고이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그 지관이 장난을 쳤다고 여기고, 젊은이를 불쌍히 여겨 관청에 가서

쌀 300석을 받아올 수 있도록 적은 서신을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지관이 살고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을 찾아가 청년의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지관은 모르면 잠자코 계시오,

저 땅은 무덤자리로 들어가기도 전에 쌀 300석을 받고 명당자리로 들어가는

자리라오! 라며 따져 묻는 숙종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그의 신통함에 놀라 자신이 국왕인 것을 밝히고, 훗날 숙종이 묻힐

묘자리를 골라달라고 부탁하였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지금의 명릉 자리가

바로 신통한 지관 갈처사가 택한 입지라고 한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나란히 자리한 쌍분을 쓰고, 인원왕후의 능은

옆에 따로 있어 같은 언덕에 배치되였다, 숙종은 왕비를 세번 맞아들였는데 원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능인 익릉은 서오릉 안에 따로 있다, 사진의 왼쪽이 인원왕후

(仁元王后)릉이고,  정자각 뒤에 오른쪽은 숙종(肅宗)과 인현왕후(仁顯王后)릉이다,

조선왕릉에는 각 공간적 성격에 부합하는 건축물과 조형물이 왕릉의

전체적인 조경과 조화를 이루며 조성되여 있다, 정자각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수복방과 수라간이 있는데 수복방의 경우 건물이 남아 있거나 아니면 주춧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명릉의 수복방 주춧돌이다,

 

명릉은 홍살문 정자각 숙종과 인현왕후 릉이 일직선상에 있다,

그 좌측에 인원왕후 (仁元王后)릉이 있다, 참도는 가운데 높은곳이 신도이며,

오른쪽 낮은곳이 어도, 좌우의 제일 낮은곳이 변로 이다,

 2억 5천만 년 전부터 거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 살아온 화석나무,

중국이 고향이며 오래 살기로 유명 해서 5백살 정도는 명함도 못 내민다는 은빛

살구 모양의 씨가 있어 은행 銀杏 이란 이름이 생기고,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어며

동물처름 정충이 움직이는 희한한 나무인 은행나무 두 그루가 지금은 주차장인

명릉 앞 공터에 서 있다, 이 은행나무의 식재 년도는 알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