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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서오릉 이야기(수경원, 익릉, 순창원, 경릉)-(2011, 10, 31)조블뉴스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서오릉 이야기(수경원, 익릉, 순창원, 경릉)-(2011, 10, 31)조블뉴스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1. 10. 31. 10:00

짖은 가을색이 내려 앉은 2011년 10월 28일 519년의 조선의 역사를 지닌 서오릉을 찾았다,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 받아 세계문화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협약 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곳이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조상에 대한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

조선은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했다, 그리하여 42기 능 어느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 되여있다,

 

10월말 인데도 릉의 가을은 오랜 세월의 무게를 가늠하듯 깊을대로 깊었다,

 

서오릉을 들어 서면서 오른쪽 길로 처음 만나게 되는 綏慶圓(수경원)은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묘소이다, 영빈이씨는 영조 11년 1735년에 사도세자를

낳았으며, 1764년(영조 40)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능은 경기도 고양 연희 신촌리

(현재 서울시 신촌)에 조영되었으나, 한일합병 이후인 1920년대 연희전문 학교가 인근에

개교하고  확장하면서 교내에 수경원이 위치하게 되어 1968년 6월 현재의

서오릉으로 천장하게 되여 지금의 이장소에 모셨다고 한다,

 

 

  綏慶圓(수경원) 에서 익릉 翼陵가는길,

얼마되지 않는 거리지만 깊은 가을속으로 계절 여행을 하는듯 하다,

익릉 翼陵은 조선 제 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이다, 

  인경왕후(仁敬王后)는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로 현종 12년 1671년에 세자빈이

되였고 숙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1674년 왕비가 되였다, 

  숙종 6년 1680년 20세의 나이로 경희궁 회상전에서 돌아 가시였다,

익릉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단릉이다.

정자각은 능침 언덕 아래에 있다.

현종의 숭릉 정자각과 같이 당시 유행하던 익랑이 딸려있는 것이 특이하다.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의 참도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참도 중간에 계단을 두어 지형에 따라 설치하였다,

 

정자각 안에는 제례에 사용되는 제상이 놓여저 있다,

 익릉 翼陵에 들어서면서 처음 만나게 되는 홍살문과 정자각,

그리고 능침이 일직선 상에 있다,

 

300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정자각,

 

  익릉을 뒤로 하고 순창원으로 가는길, 가을의 색이 찬란하게 빛난다,

 

 

 

 

순창원 順昌園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년 ~ 1563년,

순회세자는 13대 명종의 원자로 1551년(명종 6) 태어나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황대임의 딸과 혼담이 오갔으나 그녀가 병약하여 1년 넘게 가례를 미루자 1559년(명종 4)

윤옥의 딸로 세자 빈이 교체되어 가례를 올렸다.그러나 순회세자는 가례를 올린지

얼마되지 않아 후사도 잇지 못한 채 1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명종의 대를 이어 중종의 손자 하성군(훗날선조)이 대통을 이었다,

 

 

경릉 敬陵

 추존왕 덕종(德宗)과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의 릉이다,

덕종(德宗)1438년-1457년, 의경세자는 1438년(세종20) 9월 15일 수양대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445년(세종 27)7세때 도원군에 봉해졌으며, 아버지인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1455년(세조 1) 7월 26일

세자에 책봉되었다. 어려서 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 읽기를 즐겼으며 서예에도 능했으나 1457년 에는

병세가 악화 되어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베풀고 병의 치유를 빌었는데, 이 때 신숙주,

한명회 등도 함께 참여하여 세자의 완쾌를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20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일화에는 추존왕 덕종의 아버지 세조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 단종을 유배 보낸 후 사약을 내렸다. 따라서 늘 이에 대한 마음의 짐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세조의 업보로 인해 그의 아들 들이 단명 하였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곤 하였다.

의경세자의 죽음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세조가 영월에 귀양 보낸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마음먹고 잠이든

날 밤 그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났다.

그녀는 분노한 얼굴로 나타나 세조를 꾸짖었다.

 

너는 내 아들의 왕위를 빼앗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이제는 목숨까지 끊으려고 하는구나! 무슨 원한으로 이러는 것이냐? 

네가 나의 아들을 죽이니, 나 역시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

 

꿈에서 깬 세조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는데,

동궁의 내시가 급히 달려와 세자가 위독하다는 말을 전한다. 세조는 급히

동궁으로 달려갔지만, 의경세자는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고 한다.

추존왕 덕종(德宗)릉침은 정자각 오른쪽에 있다,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의 릉은 정자각 왼쪽에 있다,

정자각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상태 에서의 기준이다,  소혜왕후는 1437년(세종 19)

좌의정 한확의 딸로 태어났으며, 1455년 세자빈에 간택되었다. 남편인 의경세자는 20세에

요절하였는데, 아들 성종이 즉위한후 1471년(성종2)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인수왕대비가 되었다.

 

 그녀는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했으므로

세조가 효부라는 도장을 만들어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불심이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고, 부녀자의 교육을 위해 명심보감 등의 유교서적을 재편집하고 국문으로

번역해서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4월 27일 68세로 창경궁 경춘전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는 손자인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모함을 받아 폐위된 후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노하며 관련자 들에게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병상에 누워

있던 소혜왕후는 그러한 손자를 꾸짖었는데,연산군이 이에 반발하며 그녀를 머리로

받았다고 한다. 소혜왕후는 이러한 충격으로 며칠 후 승하하였다,

단종을 내치고 임금에 올랐든 세조,

아비가 아들을 가슴에 묻은 곳이라 그런지 경릉은 무척 화려하게 꾸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