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왕실의 희로애락을 껴안다, 경복궁후원(2011, 9, 14)조블뉴스 본문
↓ 자경전 일원,
현종(24대)의 모후인 신정왕후 조대비는 고종(26대)의 즉위에 결정적인 기여를했다,
이에 보답하여 흥선대원군은 조대비를 위한 거처를 궁 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셈세하게 만들었다,
서편 담장에도 여러 꽃 나무들과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문자들을 새겨 넣어
나이든 대비전 주인의 장수를 기원했다
1888년 재건된 자경전을 중신으로 서북쪽 ←↓ 복안당에 온돌방을 들여 겨울용 침전으로,
동쪽 ↓→ 청연루에는 누마루를 설치해 여름용 거실로 삼았고 협경당 등 여러 부속 시설을 연결시켰다
↓ 경회루가 웅장하면서 격조높은 풍류가 느껴진다면 향원정(香遠亭)에는
호사스러움 속에 정제된 아름다움이 있다, 함화당 북쪽에있는 사각형의 향원지 안에
원형의 섬이 있고 그 위에 육모지붕의 2층 정자 향원정이 있다,
↓ 조선왕조 실록에 세조 2년91456년)에 경복궁 후원에 취로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주변 연못에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향원정은 이 취로정
자리에 고종이 지은것으로 전해진다,
섬의 남쪽에 돌로 만든 교각위에 가설 되여 있는 나무다리 취향교가 있다,
원래 이 다리는 북쪽에 있었어나 한국전쟁때 파괴되여 1953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향원정 1층은 구들을 들여 난방이 가능하고 2층은 마루를 깔았어며 아래
위 층을 오르내릴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향원정은 임금이 휴식과 풍류를
즐기거나 신하들과 간소한 시회를 즐기든곳이다,
↓ 열상진원샘이다, 이 샘은 경복궁 창건 당시 (1395년)부터 있었든
왕궁의 샘으로 옜날부터 물이 맑고 차서 음료수로 이용 하였다, 글을 새긴
우물 뚜껑은 경복궁 중건(1868년)때 만든 것이다, 샘에서 솟아난 물이 두번 직각으로
꺽여서 연못으로 잔잔히 흘러 들어 가도록 만들었는데 이것은 향원지에 드리워진 정자와
꽃 나무의 그림자가 물결에 흔들리지 않고 고요히 비치도록 하기위한 것이다,
꺽어지는 수로는 둥근 돌로 만들어 흐르는물이 더욱 생기를 띠게 한다
↓ 이곳은 한국의 전기 발상지다,
이곳은 고종황제의 어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발전소를 설립하여
1887년 3월 6일 건청궁 전등에 점화하고 경복궁에 750개의 전등을 가설 점등 함으로써
이땅에 비로서 문명의 빛을 밝힌 유서 깊은 곳이다,
↓ 경복궁 중건사업이 끝난 이듬해인 1873년, 고종은 경복궁 북쪽
동산정원인 녹산과 향원정 사이에 건청궁을 건립케 하고 명성왕후가 기거하였다,
건청궁의 건축 양식은 궁궐의 침전 양식과는 달리 양반가옥 살림집을 응용하여 사랑채(장안당),
안채(곤녕합), 부속건물(복수당), 행각등으로 구성 되였는데 그 규모는
양반가옥 상한선인 99칸의 2,5배되는 250칸이다
건청궁이 건립된지 3년이 지난 1876년, 경복궁에 큰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생활공간을 옮겼어며, 1885년에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와 1896년 아관파천때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할때까지 10여년간 줄곳 이곳에서 지냈다,
1895년 을미사변때 명성왕후가 곤녕합에서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된 현장 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들어 경복궁의 건물들이 차레로 파괴 되면서
건청궁은 1909년에 철거 되여 이 자리에 조선 총독부 미술관이 지어 졌어며
한동안 국립 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 되였다, 문화재청은 건청궁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2007년 10월부터 일반인에게 공개 하고 있다,
↓ 집옥재,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8년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 기거했다, 이미 창덕궁에 지어졌든
집옥재, 협길당, 등을 1891년에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와 자신의 서재와 외국사신 접견소로 사용했다,
집옥재는 양 옆 벽을 벽돌로 쌓고 내부를 중 2층으로 만들었어며, 팔우정은 팔각형의 2층 정자다,
이 건물들은 중국통의 요소들이 많이 섞여 궐내에서는 이국적인 지역을 형성하며,
내부 복도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다
↓ 신무문이다, 이 문은 경복궁의 제일 북쪽에 있는 문으로
고종이 아관 파천때 이문을 나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을 한 문이기도 하다,
그후 고종은 다시 경복궁에 들어 오지 못하는 역사의 아픔이 녹아 있다,
이 문을 나서면 경복궁의 후원이였다, ~ (청와대앞에서 찰영)
경복궁 과 북악의 중간인 이곳은 경복궁의 후원이였다
지금은 청와대로 바뀌여 있다
↓ 신무문을 나서면 청와대 정면이 가장 잘 보인다,
노무현 정부때 부터 청와대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것을 허락 했다,
↓ 태원전은 왕과 왕비가 죽으면 빈전(殯殿)에 관을 모시고
교외에 마련된 산릉에 시신과 관을 묻은 후에는 혼전(魂殿)에 신주를 모셔
정해진 장례기간을 치룬후에 종묘로 신위를 옮겨 모시게 된다,
태원전은 경복궁의 빈전으로 문경전은 혼전으로 건립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철거를 격었고 한때 청와대 경호부대가 주둔하는등의
변화를 격었든 곳이나 2006년 이 일원의 복원공사가 마무리되여
원래의 모습을 되 찾았다,
태원전 뒷뜰, 가까운 거리에 우물이 두개나 있다,
↓ 태원전을 나와 경회루 로 가는 길에 돌아본 북악,
태원전 건물과 청와대 건물이 숲에 가려 가물거릴 정도로 뜰이 넓다,
청와대 경호부대가 주둔했든 곳이다,
↓ 경복궁 경회루, 왕실의 큰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사신을 접대하던 곳으로
1867년에 재건되였다, 높은 2 층 누마루에 올라 서쪽으로 인왕산, 동쪽으로 궁궐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며, 주위의 넓은 연못에서는 뱃놀이를 했다고 한다,
7 × 5칸 바닥면적 933m2(282평)로 현존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2층 마루는 3겹으로 구성되였는데, 중심 3칸은 천지인(天地人)을
그 바같 12칸은 일년 12달을 가장 바같의 24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하는등
동양적 우주관을 건축으로 상징했다,
중건당시에 경회루 연못에 2마리 청동 용을 넣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로1997년 준설공사 과정에서 발견되였다,
경복궁을 한바퀴 돌아 보는데 걸린 시간은 4시간 정도 걸렸다,
좀더 자세히 역사를 만나며 탐 하는 시간은 더 많이 걸릴듯 하다, 경복궁은 분명
아름답고 웅장하고 셈세하고 자랑스러운 곳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되돌아
보면 불행한 과거를 간직한 역사의 아픔도 감출수 없다,
주 / 역사적인 기록은 안내 팜프렛을 참고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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