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양화천 (4)
물흐르듯이 순리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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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우정(舞雩亭) 에서 자채방아마을 건물 앞으로 내려간다, 돌고 돌아야 하는게 물레방아인데 이곳 물레방아는 지금 파업중이다,자채방아마을의 자채(紫彩)는 붉은 빛이 감도는 벼 품종을 뜻하는 말이다,이제 舞雩亭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다, 언덕에 있는 무우정을 돌아보고 나가는 길앞에는 이렇게 보이는 건물이 있다, 양녕대군 역사관이다, 이곳에 양녕대군 역사관이 있는 이유?는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의 큰형이자 태종 이방원의 장남인 양녕대군이 이천에서 15년여간 유배 생활을 할 당시 이천군에서는 마을에 있는 개울을 쉽게 건너도록 징검다리를 놓았는데, 이것이 바로 마을 이름이 되어 군량(郡梁)리가 되었다, 임금님께 진상을 했던 자채벼가 생산되었던 이곳은 풍요로운 들판 “군들” 군량리와 양평리 일대를 양녕대군의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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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사거리에서 대월로를 버리고 한나요양원 방향으로 들어갔던 길이 다시 대월로와 만나는 지점에서는 왼쪽, 대월면 초지리 172-8번지 방향으로 들어간다,초지리 472-8 번지 케이엠텍 앞에는 도로 공사중으로 포장만하면 개통될 것다, 케이엠텍에서 조금만 더 가면 컨테이너 몇개가 있는 곳이 있는데 이곳 전신주에 걸려있는 봉화길 사각 이정표는 >>는 반대방향이다, 잘못된 것을 알고도 수정 하지않고 설치한 이유는 뭘까? 흰색으로 칠한 화살표 방향이 맞는데?이어지는 길은 도로 공사중인 곳으로 10여m를 더 가서 오른쪽 농로로 들어간다,농로 입구 부터는 인삼 밭이 이어지는 길이다,아직은 가을 걷이를 안한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들녁을 따라 간다,이 지역은 모두가 구릉지 고 언덕이다, 구릉지에는 어김없이 공장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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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천변 양거1호 수문이 있는 곳에 있는 매화교를 지나 계속해서 용은교로 내려간다, 인접에서 유입되는 수량을 모두 햡수하는 양화천 폭은 점점 더 넓어지고양화천 둑 안쪽 매화리 들녁은 평야지대를 상상할 만큼 넓고 크다,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일직선 둑길을 따라 가다가 매화리 방향으로도 살펴보고이제 가야하는 용은교도 살펴보면 까마득히 먼 거리인 것 처름 보인다,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는 용은교매화교에서 용은교까지는 약 1,5km는 되는 거리다,이제 용은교까지 내려왔다, 양화천 둑에 있는 이 작은 건물은 환경사업소 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여하튼 시청 관할 기관 건물인 듯하고인도가 따로 없는 용은교를 건너간다 이도가 없는 도로는 위험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오는 차를 마주 보면서 가야 비교적 안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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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길 제6길 골내근길은 협궤열차, 수려선(수원 - 여주)의 옛 흔적을 찾는길로, 골내근은 고구려 때 불렸던 여주의 최초 지명으로 이 일대는 남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벼농사 짓기에 최적의 지역이다,봉화길 제 5길에서 이어가는 길이라 부발역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철로 아래 도로는 부발역 1번출구에서 연결되는 길로 여기는 부발역 뒤에 있는 죽당천삼거리다,죽당천삼거리에 봉화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경기옛길과 제6길 골내근길, 제8길 자체방앗길(부발역~설성면행정복지센터)안내도 있다,1930년부터 1972년 까지 수원에서 이천을 거쳐 여주를 잇는 수려선 협궤열차가 지나 다녔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는 이천과 여주일대에서 생산되는 쌀을 인천항까지 운송하기 위해서였고 해방 후에는 지역민의 사연을 가득 담은 이동수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