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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큰바위 기둥을 세워놓은 갓모습의 산이라 관악이라 했다(2015년 1월 4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서울·북한·도봉

큰바위 기둥을 세워놓은 갓모습의 산이라 관악이라 했다(2015년 1월 4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5. 1. 5. 20:31

2015년 새해 첫주일인 4일 새해 첫산행으로 관악산 연주대를 찾았다,

과천향교(果川鄕校) - 문화재자료 제9호 (과천시, 1983년 9월19일 지정)로 , 경기 과천시

중앙동 81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세운 국립교육기관이다.

과천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었졋고 숙종 16년(1690)에 과천 서이면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였다, 1944년에는 시흥향교, 안양향교, 과천향교를 통합하여 시흥향교로 불리다가

1996년에 과천향교로 복원되여 오늘에 이른다,

 

향교앞에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사단(四端)이 있다, 인의 예지란?

유학에서는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성품. 곧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로움을 이른다,

사전적 의미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4가지 마음가짐, 어짊과 의로움과 예의(禮儀)와 지혜(智慧),다,

2015년 첫날부터 매섭든 추위가 4일인 오늘은 많이 풀렸다,

장갑을 끼지 않아도 손이 시리지 않을 정도니까, 영상의 포근한 날씨다,

연주암가는길 계곡에 넘처나든 물 소리는 얼음속으로 사라지고,

연록의 푸른 빛으로 반기든 나무들도 모두 나신으로 반겨주는 연주암가는 길,

연주암으로 향하는 길답게 길가에는 나무아미타불이라 새겨진 바위도 보인다,

명산에는 명사찰이 있다고 했든가?,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과 마주하며 서울을 보호하는 산인

관악산, 이곳에는 연주암과 관악사지가 있고, 정상에는 연주대가 있는 산이다,

길이 조금 미끄럽기는 하지만 하얗게 쌓인 눈을 밟는 소리도 멋스럽다,

급할게 뭐가있을까?, 유유자적 여유를 부리며 올라간다

쌓인 눈이 아니라 꽁꽁 얼어붙은 빙판 눈이라 미끄럽다,

그래서 겨울철에는 아이젠이 항시 배낭속에 있어야 한다, 조금은 무거워서

부담이 되여도 안전을 생각하면 그게 답이다,

그렇게 휘적 휘적 산을 오르기를 약 한시간,

목탁소리와 염불 소리가 은은히 들리는, 연주암戀主庵에 도착했다,

연주암이라는 이름은 무슨 의미로 지어젓을까?

연주암으로 들어가는 길은 가파른 언덕길이다,

새로 데크계단을 만들어서 많이 편해지기는 했지만 신성스러운 곳으로 들어가는 길이

편할수만은 없어리라, 그래서 힘든 길을가는 것도 수행의 일부라한다,

연주암 대웅전앞 마당에는 오랜세월을 견디고 서있는 3층석탑과

그 좌측으로는 범종이 자리한다, 불자는 여기서 심신을 달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관악산 연주암의 의미는 다른곳과는 많이 다르다, 관악하면 연주대고 연주대가 곧 관악이니

연주암으이 종교를 초월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특별하다 할 것이다,

석탑은 고려후기에 속하는 양식으로 연주암이 고찰임은 분명하다,

신라시대에 관악사였든 이절은 고려말 조선초에 이르러 연주암으로 이름이 바뀐다.

고려가 망하자 강득룡, 서견, 남을진 등 유신들이 관악산에 은거하며 의상대에서 고려왕조를

그리워한데서 유래했다. 고려왕조나 임금을 그리워해 사모할 연(戀) 자와 왕을 뜻하는 주(主)를 써서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연주(戀主)를 관악사의 새 이름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나라와 임금을

그리는 정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이름이다,

연주암이라는 이름에 대한 또 하나의 설은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과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은 아버지 태종이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 즉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자 유랑길에 나선다, 두 대군은 관악사를 찾아 수행을 하며 왕위에 대한 미련을 떨처버리려고

하였어나 원래 관악사의 위치에서는 왕궁이 멀리 보였어므로 현재의 위치에 40칸

규모의 건물을지어 옮겨왔다고 한다,

 

이후에 사람들이 두대군의 심정을 기리는 뜻에서 의상대를 연주대로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각각 부르게 되였다는 설이다, 물론 오래되여 기록이 없다보니

어떤게 맞는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두가지 설 모두 다 소중하지 않을까,

연주암옆 조금 높은곳에 효령대군의 영정을 모시는 효령각이있다

효령대군은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로 세종의 형이자 왕위 계승자였고 조선초

불교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거론되곤 했다. 왕위를 갖지 못한 맘을 달랬던 것일까. 아니면

부처님을 향한 마음이 왕위를 미련 없이 놓을수 있게 했을까?. 모를 일이다. 다만

연주암에서 효령각을 세워 효령대군의 영정을 모신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함께 연주암에서 수행을 했는데 왜 효령각만 있을까?

아래 사진은 관악산 정상과 연주대다, 이곳은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환국한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하고 의상대였다.

관악산은 예부터 개성송악, 가평화악, 파주감악, 포천운악과 함께 경기도 오악으로

불린 곳이다. 빼어난 봉우리와 바위가 많고 검붉은 바위로 이뤄진 관악산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바위 기둥을 세워 놓은 갓 모습의 산 이라고해 갓뫼 또는 관악이라 했다.

발 아래로는 과천 지역과 한강 유역, 한양도성을 내려다 볼수 있었다,

 

연주암 중건기등 사찰 기록에 따르면 문무왕 17년(677) 의상은

관악산 꼭대기에 의상대를 세우고 그 아래 관악사를 창건했다 라고 되여있다,

그러나 의상대사가 이곳에 의상대를 건립한 이유는 부처님 가피가 두루두루 온 천하를 굽어

살피고 보듬길 바랐을게다. 기암 절벽위에 석축을쌓고 터를딱아 마련한 암자의

이름은 응진전이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에 지어진 세평 남짖한

맞배지붕으로 최근에 해체 복원했다,

보이는 능선은 사당능선이다,

이 능선을 따라가면 사당동 사당역과 연결이된다,

오늘은 사당능선을 따라 하산을한다,

연주암 뒤로 내려 뻗어있는 저산줄기는 과천으로 연결이 된다,

오늘은 저산넘어 계곡을 따라 여기까지 올라왔다,

연주대 절벽아래 조금은 넓은터는 관악사지冠岳寺址 다,

관악사지는 글자 그대로 관악사라는 절이 있었든 절 터다, 그러나 지금 절은

간곳이 없고 관악산을 찾은 많은 등산인들이 쉼터로 이용하고 있다,

관악사지에 안내되여 있는 법당지 안내판

관악사지 터 다,

관악사지에 대한 안내도 있고

불자들은 부처님전에 가면 기본적인 예절로 자신이 마련한

공양물을 올리며 항상 절을 한다. 그것은 3배이거나 108배 일수도 있다.

3배는 몸과 말과 뜻의 삼업으로 공경을 지극히하여 부처님(佛)과 진리(法)와 스님(僧)의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삼독을 없애고 이상이 없는 무아를 성취하겠다는 것이다.

9배를 하는것은 3배에서의 삼업과 삼보와 삼독의 하나하나를 맑히고

귀의하고 여의겠다는 맹세의 절이며

 

53배는 참회를 관장하는 53불에대한 경배며, 1천배는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현겁의 1천 부처님께 1배씩 절을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3천배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대겁에 출현하는 3천 부처님께 1배씩의 절을 올리는 예법이며

108배는 108 번뇌의 소멸과 관련되어 있다. 108 번뇌는 중생의 근본 번뇌로 이 108번뇌는 눈(안),

귀(의), 코(비), 혀(설), 몸(신), 뜻(의)의 육근이 색깔(색) 소리(성) 향기(향) 맛(미) 감촉(촉) 법의

육진을 상대할 때, 좋다, 나쁘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는 세 가지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육근과 육진이 서로 만날 때 생겨난다.

 

좋은것은 즐겁게 받아 들이고 나쁜 것은 괴롭게 받아들이며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에 관해서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게 방치하는 것이다.

곧 6근과 6진의 하나 하나가 부딪칠 때 좋고 나쁘고 평등하고 괴롭고 즐겁고 버리는

여섯가지 감각이 나타나기 때문에 6곱하기 6은 36, 즉 서른 여섯 가지의 번뇌가 생겨나게 된다.

이 36번뇌를 중생은 과거에도 했었고 현재에도 하고있고 미래에도 할 것이기 때문에

6곱하기 6은 36에 과거 현재 미래의 3을 곱하여 108번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108번뇌가 끊임없이 이어져서 팔만사천 번뇌망상을 이루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