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북한산성 12성문 종주 8,- 백운봉암문(위문)에서 북문까지 본문
이제는 11번째의 문이 있는 북문으로 간다,
이곳에서 북문으로 가는길을 가파르고 험한 등로를 따라 내려갔다가 다시 북문으로 올라가야 하는 마지막 난코스다,
야심차게 12성문 종주를 시작한 사람들이 종주를 못 끝내고 그만두는 원인중 하나가
이 길에서 북문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바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약수암 자리다,
예전에는 여기서 서북밴드라는 암벽등로를 타고 염초봉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염초봉은 많은 산악인들이 유명을 달리한 곳이기도 하고, 한때는 북문에서 염초봉으로 해서 백운대로
오르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지금은 서북밴드도 염초봉도 일반 등산객의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다,
하산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다시 북문으로 올라가는길 대동사로 왔다,
이곳 대동사는 스님들이 기도정진하는 사찰로 알려저 있다, 일반 신도들이 별로 없어서인지?
아니면 정말 공부만 하는 사찰인지는 알수 없어나 여하튼 좀 적적해 보이는 절이다,
북한산성은 축성과 동시에 산성 내에 중흥사 (중흥사는 승병의 군영(軍營)이란 뜻으로 치영(緇營)이라 불렀음)
외에 12개소의 사찰을 새로 지어 승병을 분산 수용하였다, 그 12개의 사찰은 국녕사. 원각사. 부왕사. 보광사. 보국사. 용암사.
원효암. 상원사. 서암사. 노적사. 부왕사. 경흥사. 중흥사. 태고사 등으로 이중 중흥사 태고사 등 일부 사찰은 기존의 사찰
및 폐찰을 복원 또는 중창 하였으며 서암사는 고려 문인공 민지의 저택을 사찰로 중창 복원하였다.
각 각의 사찰은 모두 담당하는 지역이 있었는데
국녕사는 가사당암문과 그 일대 성벽을,
서암사는 수문과 시구문(서암문)및 그 일대의 성벽을,
원효사와 부왕사는 부왕동암문과 그 일대,
보광사는 대성문과 그 일대,
보국사는 보국문과 그 일대,
용암사는 용암문과 그 일대,
상운사는 북문과 그 일대,
원효암은 시구문에서 원효봉 일대를 수비토록 하였으며
그 밖에도 143개소의 성랑(城廊. 초소겸 막사)을 성벽 요소요소에 지어
승병을 분산 배치하여 성벽을 수비토록 해서
북한산성을 관리하도록 하는 체계로 운영되였는데
지금으로 봐도 상당히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 되였든것 같다,
11번째의 문인 북문으로 왔다,
북한산은 백두대간의 한북정맥에서 뻗어내린 서울의 진산으로 그리 높지는 않으나
수려한 산세가 사철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어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지형적인 특성으로 말미암아 북한산은 일찍부터 국방상의 요지로 인식되었다.
백제는 개루왕 5년(132)에 이곳에 산성을 쌓아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 방어의 거점이자 북방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이때 처음 산성이 들어선 이래 북한산은 삼국시대에는 이해가 상충하는 삼국의 각축장 이기도 했다.
고구려는 장수왕 63년(475) 이곳을 점령함으로써 백제의 의도를 꺾고 남진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고,
신라는 진흥왕 12년(551) 백제와 맺은 동맹을 어기고 여기를 차지하여 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고려시대에는 11세기 초 거란의 침략이 있자 태조의 재궁(梓宮)을 이곳으로 옮긴 뒤 산성을 증축한 바 있고,
1232년(고종19)에는 이곳에서 몽골군과 격전을 치르기도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또한 북한산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 하여
여기에 도성 방위를 위한 외곽성을 축조하게 된다.
이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북한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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