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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북한산성 12성문 종주 6,- 보국문에서 대동문 용암문까지 본문

국내 山行日記/서울·북한·도봉

북한산성 12성문 종주 6,- 보국문에서 대동문 용암문까지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4. 12. 22. 21:23

이제 보국문에서

산성을 따라 대동문으로 간다,

대동문(大東門)이다.

규모는 조선시대 단위로 높이 9척, 너비 10척이다.

현재의 문루는 1993년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한 것이다.

대동문성내는 북한산성 대문에서는 제일 넓은 공터가 있는 곳이다,

또한 북한산성내 에서는 유일하게 화장실도 있는 곳이다,

여기서 잠시 역사의 기록을 본다,

산성이 위치한 북한산은 지세가 매우 험준하여 방어처로서

매우 적절한 환경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중요성이

매우 높았던 지역으로 당시에도 성을 축조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132년(백제 개루왕 6)에

백제가 북한산에 성을 쌓았고, 475년에는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공격을 받아 함락되어 개로왕 이 전사하고 한성도 함락되었다고 기록되여 있다,

551년(신라 진흥왕12)에는 나, 제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백제는한강하류를 점령하고, 신라는 이 지역을 포함한

죽령 이북 10군을 점령하였다.그리고 553년에 신라가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백제의 한강하류까지 점령하고, 555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이후 603년(신라 진평왕 25)에 고구려군이 북한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661년(신라 무열왕 8)에도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이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라고 기록되여 있다,

북한산성은 우리 민족에게는 소중한 역사의 현장이다,

대동문을 지나 용암문으로 간다, 북한산성의 총 지휘소인 장대가 있는 곳이다,

북한산성에는 동, 남, 북에 하나씩 장대가 있었다,

봉성암(奉聖庵) 뒤의 시단봉(柴丹峰)에 위치한 동장대(東將臺)와

나한봉(羅漢峰) 동북쪽의 남장대(南將臺), 중성문(中城門) 서북쪽의 북장대(北將臺)등

3개의 장대 중 한 곳인 동장대(東將臺)다,

이중 최고 지휘관이 머무르는 가장 중요한 장대는 동장대였다,

동장대는 행궁을 비롯한 성의 안팎을 조망할 수 있는 지점으로서 1712년

(숙종 38)에 총융청(摠戎廳)에서 완성했다. 이 장대는 숙종이 당시 연잉군이던

영조와 함께올라 살피기도 하였던 곳 이기도 하다,

12성문 종주 길이니 동장대에서도 인증샷

북한산성의 역사는 고려시대에도 몇 차례 성을 수축하였고,

고려 8대 현종(顯宗)은 거란족 침입시에 북한산성의 계곡 중흥동에서

피난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232년 몽고 2차 침입때에는 북한산 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태조의 재궁(梓宮-왕의 시신이 담긴 관)을

이곳으로 옮긴 일도 있었다.

고려말인 1388년에는 최영장군이 북한산에 중흥성을 축조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기도 하는 등 북한산성 일대의 군사적 중요성은 지속된다,

현재 남아있는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때 쌓은 것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대외적 전란과

이괄의 난 등 대내적 위협을 겪고 수도 방위에 문제가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북한산성의 본격적인 축성에 대한 논의는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산성 축성에 대한 논의는 임진왜란이 막바지에 이르던

1595년(선조 29)부터 병자호란때 청(淸)에 인질로 끌려갔었던 효종조,

1675년(숙종 원년)과 1702년(숙종 28), 1703년(숙종 29), 1710년(숙종 36)등 여러차례

계속되다가 1711년 숙종의 결단으로 오늘날의 북한산성이 완성되였다,

여기는 용암문이다,

용암문을 나가면 북한산 도선사와 연결되는

가장짧은 거리의 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