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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신미양요와 광성보(2016년 10월 3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신미양요와 광성보(2016년 10월 3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6. 10. 6. 19:24

광성보에서 지대가 제일 높은곳에 있는 광성포대로 가는길 소나무의 뿌리가 돌출되여 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수십그루의 나무가 뿌리를 들어낸채 살아가고 있다, 관리처 에서는 돌출되여 있는 나무 뿌리를

흙으로 덮어 뿌리를 보호하고 싶어도 뿌리를 덮은후 나무가 고사할수도 있어 그대로 둔다는 안내문이 있었다,

광성포대로 가는 길은 여유로운 소나무 숲길을 걷는 길이다,

육지와 섬 사이 유유히 흐르는 염하강이 보인다, 지금으로 부터 145년전 미군의 공격으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제일 먼저 상륙한 곳이 이곳에서 10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초지진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은 나루를 뜻하는 진(津)이 아니라 막을 진(鎭)이다, 그러니 초지진은 배가 들고나는

나루터가 아니라 적의 공격을 막는 군사 요새였다,

가는길 왼편에 쌍충비 전각이 보인다,

쌍충비 설명은 안내판으로 대신한다,

쌍충비 앞 낮은 곳에 있는 순미 신의총(辛未 殉義塚)이다,

1871년(고종 8년) 4월 23일 신미양요 당시 광성진에서 벌어젓든 전투에서 중군 어제연 장군과 아우 재순을 비롯한

군관, 사졸 59인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어제연 장군 형제는 고향인 충북 음성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군졸은 신원을 분간할수가없어

7기의 분묘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최후의 한명까지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물러서지 않았어니 외침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살신 호국정신을 보여준 곳이다,

보이는곳은 육지인 깊포 덕포진 손돌묘가 있는 곳이다,

초지진에서 약 5km 정도 떨어진곳에 있는 정족산성은 조선군과 프랑스군이 최후 결전을 벌인 장소다,

이곳의 정족산 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여 있었다, 조선의 관군이 목숨을걸고 프랑스군을 물리친 이유 중

하나는 무었보다 소중한 왕조실록을 지키기 위한 것이였다,

신미양요때 파괴된 광성보는 1976년에야 복구되였다, 자그마한 성곽에 불과한 초지진과는 달리

어느 도성의 대문으로도 손색이 없는 입구가 이를 앞도한다, 어제연 장군이 이끄는 주력부대가 초지진이 아니라

이곳 광성보를 최후의 결전장소로 선택한 이유를 알수있을것 같다, 안으로 들어서면

해안방어 시설인 돈대가 나온다,


하지만 수백명의 조선군사가 목숨을 걸고 외적을 막았든 곳은 이곳이 아니다,

이곳에서 해안쪽으로 수백m 더 들어간 곳에 있는 또 하나의 돈대에서 처절한 육탄전이 벌어젓다,

그곳의 이름은 손돌목돈대, 손돌목은 강화도와 육지사이 물살이 가장 빠른 바닷길을 가르킨다,

돈대에서 바다를보니 닿을듯 지척인 육지 사이 곳곳에 회오리 물결이 보인다, 이 물결도 미군의 상륙을 막지못했고 결국

조선의 군인들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죽어갔다, 이곳에서 보이는 염하강은 손돌목이다,


광성포대에서 용두돈대로 내려 가는길,

아래로 내려와서 올려다본 광성포대,


광성포대에서 내려와 광성보에 있는 마지막 돈대인 용두돈대로 들어간다,

두돈대는 병인, 신미양요때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젓든 현장이며 손돌목돈대에 속해있는 외곽 초소겸 포대다,

고종 8년(1871년)에 설치된 포대다,




용두돈대 앞 염하강의 물결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물살이 거칠다,

용두돈대를 돌아 나오면 용두돈대 입구에 있는 작은 쉼터, 

왼쪽 사진 / 손돌목돈대에서 어제연장군을 비롯한 조선군 전체가 장열히 전사했든 사진으로

흰색의 조선군 전사자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려있는 처참한 모습의 1871년 6월 11일 손돌목돈대


가운데 사진 / 무너진 성벽과 파괴된 포자, 힘없이 내려진 깃발, 즐비한 조선군 전사자 모습,

미군의 무차별 포격에 의해 파괴되고 점령당한 조선군 마지막 보루의 처참한 모습의 손돌목 돈대의 외부모습,


오른쪽 사진 / 1871년 6월 1일 미군 탐측선을 향해 최초로 포격을 시작한 용두돈대, 6월 11일 손돌목돈대의

함락과 더불어 하단에 있는 광성돈대와 해협으로 길죽하게 뻣어잇는 용두돈대도 곧 미군에 의해 함락된다,


함락직후 미군들은 광성보 전역에 설치되여 있든 군사 시설들을 모조리 불태우거나 파괴하고 각종군기들과

대포들을 전리품으로 노획한 다음 6월 12일 오전 소속 함정을타고 작약도의 기함 정박지로 철수했다,

↓ 아래 사진의 설명에 따른것임

고종은 신미양요 2년후 쌍충비를 세워 이들의 충절을 기렸다,

다행히 쌍충비는 지금도 그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 쌍충비각 앞으로 돌아와 해안산책길을 따라간다, ~

지금은 모두 공원화가 되여 있지만 약 150년전 이곳은 나라를 지키려는

선조님들의 결사항전의 장소였다, 그러니 이땅의 흙한줌 돌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것이 없을 것이다, 

안길에서 보이는 광성보 성문,

광성보 성문으로 돌아왔다, 이제 저 성문을 나가면 오늘 광성보 역사는 한동안 잋고 살겠지만~

뭔가아쉽다, 그래서 누구나 다 아는 역사지만 다시한번 역사를 찾아본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후 조선을 침공한 것은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배가 불타버렸고 선원들까지 전원 사망했기 때문에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응징하고 배상을 받을려고

두 번이나 원정 계획을 했지만 실행을 하지못했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이 막 끝난 뒤라 여력이 없었든 것이다,

미국이 망서리고 있는 틈을 타서 프랑스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몇달뒤 7척의 군함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물론 프랑스도 그해 프랑스 신부 9명이 불법 선교혐의로 처형을 당했든 명분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한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이 약탈이였다, 프랑스 군대의 약탈은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에게 패배해 달아날때까지 20여일동안 계속된다, 이 사건이 병인양요다, 이때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중이든

귀중한 서적을 비롯한 많은 보물이 프랑스로 넘어가게 된다, 이중 외규장각 도서중 일부는 2011년에야 영구대여

형식으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5년후 미국함대가 중국 상하이를 출발했다, 군함 5척에 1,200명의 군인을

태운 미군함대를 맞이한 어제연이 이끄는 조선관군은 이미 병인양요를 껵었든 터라 나름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안개속에서 초지진으로 상륙한 미군선발대 600여명은 조선의 관군과 처절한 육박전을 벌였다, 조선군과 미군의

전투는 초지진에서 4km남짓 떨어진 이곳 광성보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여기서 어제연 장군은 직접 칼을 휘두르면서 미군과 백병전늘 치렷다,

칼이 부러지자 연환을 들어 던질 정도로 최선을 다 했어나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8시간 동안 동안 지속된

전투에서 조선군은 350여명이 죽고 2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 미군은 3명전사에 10명이 부상을 당했을 뿐이다,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것으로는 전력의 차이를 극복할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뼈아픈 전투였다,


광성보에서 승리한 미군은 광성진 관아 건물을 불태우고 초지진에 주둔했다, 이때 처음으로 한반도에

미군 성조기가 펄럭이게 된다, 하지만 미군은 얼마후 자진해서 철수했다, 조선정부가 통상요구에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는 데다가 조선병사들의 결전 사항을 보면서 앞으로의 전투에 부담을 느꼇기 때문이다,

이들은 프랑스 군과는 달리 민간인 약탈은 거의하지 않았다,

 http://blog.daum.net/dsooh/1132 역사의 전적지(戰迹地) 광성보와 광성돈대,

  http://blog.daum.net/dsooh/1131  덕포진에서 울리는 노래소리?

 http://blog.daum.net/dsooh/1130   천혜의 지형을 이용해 설치한 덕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