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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역사관 - 3, 사형장, 여옥사,(2016년 11월)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3, 사형장, 여옥사,(2016년 11월)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6. 12. 3. 17:22



형무소 부지 제일 끝 높은 담장안에 있는 사형장,

사형장 내부

사형수를 저 의자에 앉혀놓고 위에 있는 밧줄을 목에 걸어 사형을 집행했다,

지하로 시신을 찾으러 들어가는 계단,


사형장 뒤 제일끝에 시신이 나가는 문이 있다,

이곳으로 몰래 시신을 옮겨 나가 몰래 내다버리는 바람에  가족이 찾을수도 없게 했다는 비밀의 문이다,
















여옥사를 끝으로 형무소 시설물은 다 돌아 본게 된다, 아래 건물은 처음 입장을 했든 고문실 등의 옥사 다,

망우는 입장할때 의 문, 즉 서대문 형무소 정문에 있다,

이곳은 들어오는 문이라서 이제는 관람객이 나가는 문으로 간다,


1919년에는 3·1운동으로 인해 수감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당시 시위관련자 1,600여 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이 수용되었다. 특히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유관순(柳寬順, 1902∼1920) 등이 독립선언과 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밖에도 일제강점기에

양한묵·강우규·안창호·여운형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된 곳이었다.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재소자에 대해 정해진 작업, 정량의 식료품 배급, 교육과 운동에 대한

 교정 규정을 가졌다. 그러나 실제로 형무소에 투옥된 독립운동가에게는 형기가 확정되기 전부터 온갖 취조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또한 옥사 내에는 겨울철에 난방이 되지 않아 동상을 입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며 동사(凍死)하는 일도 빈번했다.

여름철에는 각종 전염병으로 병사자가 속출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처우가 가혹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정치·사회문제로 관련하여 간첩 및 사상범이 많이 투옥되었다.

특히 운동권학생과 재야인사 등이 투옥되어 민주화운동의 성지(聖地)로 이해되기도 한다.

함석헌(咸錫憲)·유달영(柳達永) 등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서대문형무소 건축에 사용되였든 자재들 ,~


관람이 끝난후 나가는 문,

형무소 건물을 나가면 3호선 독립문역이 바로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