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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서해안국토종주 5-10 (무안버스터미널~영광불갑면사무소)운림촌마을-함평금구동(2018년 5월 18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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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국토종주 5-10 (무안버스터미널~영광불갑면사무소)운림촌마을-함평금구동(2018년 5월 18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6. 11. 05:30


운림처사가 살았다는 운림촌 마을도 지나서

다음 마을인 판교촌으로 간다,

운림촌 마을도 운교리로

이 지역 일대는 모두 대동면 운교리다,

가는길 옆으로는

이렇게 광활한 들이 펼처저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농로도 있고,

가는길 도로변으로 는 한 두채씩 집들이 보인다,

이 지역은 운교리다,

운교리 판교(板橋)는 단종의 폐위에 항거한 한양조씨 맹생(孟生 문과급제)이 아우인 계생(季生)과 함께

1455년 경남으로 낙향했다가 부인 함평이씨의 본향인 함평에 인연을 맺어 손불면 북성리 군유산하 조피골에 은둔 하다가

맹생은 판교(板橋)에 계생은 당시 대동면 매월촌(梅月村)

현 대동 저수지에 수몰된 마을에 정착했는데 계생의 후손은 뒤에 아차동으로 이거했고

맹생의 후손은 현재 판교촌의 주성을 이루고 있다.


맹생의 판교 입촌은 대약 1500년경이다.

그 후 함평노씨 급 汲 (1693년생)이 1720년경에 학교면 송산에서 이주해 왔고 그 뒤 청송심씨가 입촌 했다.

마을 앞에 천이 흐르는데 비가 많이 올 때 판자로 다리를 놓아 건너다녔다 해서

마을 이름을 판교(板橋)라 했다고 한다. 또 이 마을의 남쪽을 나마지, 북쪽을 북아시라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은 1912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구판교( 板橋)라 하여 신광면에 속했다가 다시

대동면에 편입되었다

해운경로당이 있는데 판교마을에 왜 해운경로당일까,

운교1리 판교마을

판교마을로 들어가는 마을길

길은 이제 대동제수변으로 들어가는 길까지 왔다,

대동제수변이란 대동저수지 옆 공간에 조성한 자연생태공원을 말하는듯 했다,

다리앞 오른쪽은 대동저수지로 가는 길

함평천 금운교 앞

삼거리는 작지만 삼각형 로티리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금운교

다리위 금운교에서 보는 대동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하천

이 하천이 함평천이다, 함평천의 시작은 이곳 운교리 대동저수지 부터다,

금운교를 건너가면 운교리 마량마을이다, 마량(馬洋)은 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 마갈산리(馬渴山里)가

지금의 마양(馬洋)인데 그 후 1912년이나 1914년 지명에는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아 일단 이 마을이 폐촌된 것을 알 수 있다.

마량버스정류장

그 후 대동제 축제시 수몰지구인 갈구지 부락 주민 4세대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고

마을을 뒷산 형국이 목마른 말이 물을 찾아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는 형국이어서 마갈뫼(馬渴山)라 불렀으니

마갈로 하자고 하였으나 협의 끝에 마량(馬洋)으로 마을 이름을 붙였다.

마을 앞 하천가에 물레방아간이 생기면서 마을이 생동하였다고 하며

물방앗간 터는 말 구유터인데 물이 부어지므로 말이 물을 먹고 생동하여 마을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이 화목한 것은 말의 성질이 외면으로는 포악한 듯 하나 내면으로는 온유하여

사람을 등에 태워주는 동물인데 마을이 이런 말의 형국이라서 주민들이 화목하게 살고 있다 한다,

땅이든 이름이든 무슨일이든 이렇게 잘 꾸며놓어면 곧 그것이 전설이 된다, 

운교리 대동저수지 갑문을 보면서 지나간다,

대동저수지는 이곳 대동면 운교리와 덕산삼거리 용현교위 연암리, 두곳이나 있다,

그냥 운교리저수지, 연암리저수지,로 부르면 될것을

왜 대동면 이름을 붙여서 대동저수지라 부르는지, 초행길인 사람이라 그런가 저수지 이름이 헷갈려서

이제는 운교리 마량마을도 완전히 벗어나고

금구동으로 들어간다,

금구동에서 처음 마주하는 풍경은

마을입구에 정자가 있고, 그 뒤에 금구경로당이 있다,

약간 경사진 곳에 있는 금구동버스정류장,

부스한개가 있는 다른 곳과는 다르게 버스정류장을 마을 쉼터처름 만들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