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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서해안 국토종주 6, ~ 불갑면사무소에서 전남 영광군 끝까지,(2018년 5월 19일) 본문

서해안 일주(해남 땅끝-김포)/서해안국토종주결산

서해안 국토종주 6, ~ 불갑면사무소에서 전남 영광군 끝까지,(2018년 5월 19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7. 19. 10:54

아침 6시 잠시 영광터미널시장  및 영광 읍내를 돌아보고

영광터미널에서 불갑사로 가는 첫 차인 7시20분차를 타고 7시 35분경에 불갑면사무소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어제 버스를타고 영광 버스터미널로 나갔든

불갑면사무소 앞 농협 하나로마트가 있는 안맹삼거리로 왔다,

불갑면사무소 옆에는 수은 강항선생 기적비가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이자 애국지사 수은 강황선생은

선조 27년 (1593)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시여 박사로 승진 공조화랑으로 재직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장군 휘하로

가든중 형제와 함께 염산 앞 바다에서 일본으로 나포되여 온갖 고초를 격어면서도 선조대왕께 일본의 지리와 관제를

비롯한 내정상황을 전하므로 추앙받은 글들이 일본 국보가 되였다,


천신만고 끝에 귀국한 후에는 모든 벼슬을 마다하고 낙향하여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열중하신

선생의 서원은 불갑사 방향 1km 지점 전남 유형문화제 28호로 지정관리하고 묘소는 내산서원 뒤 편에 안치되여 있다,

불갑초교 버스승강장에서 출발 준비를 했다,

오늘 내 발자취를 기록해주는 트랭글 앱을 실행시키고. 찾아가야 하는 목적지 지도 앱도 실행한후에야

불갑초등학교 옆으로 길을 잡는다, 불갑초등학교는 1929년 11월에 불갑 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학교로 교직원 19명에(남교사 5명, 여교사 14명) 6학급 학생수 36명의 학교다 불갑초등학교 뒤 초등학교 담 끝에 보이는

건물은 불갑치안센터 다, 요즘 이름은 치안센터지만 예전에는 파출소로 부르든 곳이다,

영광군 불갑면 안맹리 100-1 에는 영광학생의 집이 있다,

영광학생의 집은 서울로치면 청소년수련원이다,

불갑면에는 국가지정 문화재가 많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불갑사 대웅전 (830호) 과

불갑사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1377호), 불갑사 불복장전적 (1470호) 석가삼존상, 16나한상복장전적 (1470-1), 지장보살상,

시왕상복장전적 (1470-2), 사천왕상, 시왕상복장전적 (1470-3) 등 주로 불갑사에 있다,

영광학생의 집에서 조금 더 북으로 가면 오룡마을이 있다,

오룡마을 옆 오사마을도 있다, 오사(五砂)는 정확한 유래(由來)는 알수 없으나

국권침탈 이전(以前)에는 까무귀 오자를 써서 조사(鳥砂)라 하였으나 국권침탈 이후에 다섯五자를 써서

오사(五砂)로 쓰고 있으며 마을의 집단이 다섯군데로 분포되어 오사(五砂)라 했다,

오사 오룡마을 앞 삼거리가 녹산삼거리,

영광으로 가는길 오른쪽에는 불갑저수지와 불갑사로

들어가는 도로가 있는데 이 도로는 불갑면사무소 앞에서 들어가는 길과 만나게 된다,

녹산사거리에 있는 밭 한가운데 있는 집 한채, 마치 섬처름 떨어저 있다,

심지여 들고 나는 길마저 안보인다, 어딘가는 있곘지만 여기에서 보기에는 그렇다, 저런집에서 살면

아파트에서 사는사람들이 걱정하는 중간층 소음 문제도 없을것 같고 살다보면 가끔은 큰 소리한번 질러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조차 없을테니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조금 심심하기는 하겠다,

오른쪽 대각선 불갑저수지 이름이 보인다, 저곳은 보이는대로 불갑저수지다,

녹산사거리에서 불갑사방향으로 들어가면 광주·전남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불갑저수지 가 있다,

이곳 녹산삼거리에서 불갑사방향으로 들어가면 불갑저수지 주변을 관광지로 조성한

수변공원이 있다, 잘 가꾸어진 화단과 시원한 물줄기를 내뿜는 인공폭포 등이 눈길을 사로잡어며 수변도로에는

형형색색의 관광용 풍력 가로등이 설치되어 관광객에게 아름다운 볼거리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보이는 길 끝은 손용재다,

순용재는 이렇게 국도가 지나가고 순용재 아래는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2터널이 지나간다,

이곳 순용재 정상은  해발 57m 다, 570m도 아닌 57m 다,

순용재고개 정상에서 잠시 내려가면 영광군 군서면이라는 표지 입간판이 세워저 있다,

순용재정상까지는 불갑면이고 이곳부터는 군서면 땅이다, ,

불갑이든 군서든 땅에 줄처놓은게 아니니 그냥 지나간다,

순용재를 다 내려와서 만나는

첫번째 삼거리 순룡리(월산, 순량) 버스승강장이 있는 곳도 지나간다,

이정표가 가르키는 왼쪽길로 들어가면

백수읍 소재지와 군서면 소재지로 들어 가는 도로가 있다, 도로에는 가로수가  주욱 이어저 있다,

보라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 보라마을은  매년 2월 당산제가 열린다,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 신(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에게 마을의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는 행사로

500여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축제다, 당산제는 농악대의 흥겨운 풍물놀이와 함께 당산에 제물을 진설하는 것으로

시작해 축문낭독, 노인회 총무의 초헌과 군서면장의 아헌, 마을주민들의 종헌으로 제관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당산제가 끝나고 농악대가 마을공동 시설인 창고, 정자,

다리 등을 돌면서 굿을 친 다음 각 가정을 방문하여 문굿․ 샘군․ 조왕군․ 마당굿 등을

집안 구석구석 돌면서 굿을 치는 지신밟기를 하는 마을축제가 열린다,

보라리는 버스승강장이 4개나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다,

군서면에서 영광으로 들어가는 방향으로 보라, 보라2리, 보라리 그리고 마을 안에도

보라버스승강장이 있을 정도로 범위가 넓다,

아직은 조금 거리가 남아 있지만 영광읍내가 보인다,

영광읍으로 들어간다, 영광의 지명과 연혁은 삼국사기 에 처음 등장하는데.

백제 때에는 무시이군(武尸伊郡) (물이군)이라 했고, 신라 35대 경덕왕 景德王 16년(757)에

대대적인 지방통치조직 개편과 군현명 개정작업으로 무령군(武靈郡)으로 개칭하여

장사(長沙), 무송(茂松), 고창(高敞)의 3현(縣)을 관할했다.

이곳부터 군서면은 끝나고 영광읍 이다, 영광군의 변천 계보는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시대 지리지 등에서 무시이군→무령군→영광군으로 일관되게 서술되고 있는 자료들이 있다,

영광읍지역 녹사리 농촌마을 도 지나서

영광 읍으로 들어진다,

이제는 영광군청이 있는 영광읍 일대가 가깝게 보인다,

녹사교차로 로 가야한다, 녹사교차로에서는 22번 국도와 23번

국도가 지나가는 도로다, 이도로 하행은 광주와 해보, 상행은 고창과 법성포다,

도양마을입구 도양버스승강장을 지나간다,

그리고 돌아 본 영광소방서와 녹사교차로

동해안 일주에이어 서해안 일주까지 하면서 언제 부터인지는 몰라도 가다가 돌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좋은건지 쓸데없는 것인지는 몰라도 분명 같은 곳인데도 보이는 전경은 다르다,

학정사거리 원형 로터리로 들어간다,

이 로터리의 공식명칭은 학정회전교차로다, 이거나 그거나 다 맞는데 궂이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일뿐

원형로터리를 건너서 계속해서 직진으로 들어간다,

결국 이길은 영광에서 가장 오래된 주,도로다, 근형퍼스트빌 아파트가 보인다, 이 지역에서는

가까운곳에 있는 처음 본 아파트다, 그래서 이름을 적었다,

해룡고등학교다,

이 학교는 1970년에 설립된 사립학교로 교직원 57명, 695명의 학생이 공부하는 학교다,

이곳 중앙로의 풍경은 처음보는 곳인데도 낮설지 않은 아주 친근한 이미지다,

옜날에는 상권이 형성되여 있었든 마을이였어니 지금은 현대식 상권지역에 밀려서

예전 영화는 추억속으로 남은 그런 모습이다

옜날마을을 느긋하게 걷다가 보니 야간에 조명을 밝혀주는 전기조명

시설이 만들어 저 있다, 이곳의 상가들은 조금전에 지나온 곳과는 전혀 다른 잘 꾸며놓은 모습들이 보인다,

 결국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단장을 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곳은 영광군청이다, 영광군으로 들어 올때 영광의 첫 인사말이 만나서 영광입니다 였다,

그러면 영광이라는 지명이 어떻게 태동되였을까? 통일신라시대 지방제도의 골격은 소위 나말여초(羅末麗初)로

지칭되는 신라말~고려초기의 격변기에 변모되어 갔다. 왕건에 의한 반도의 재통일 후 고려 현종(顯宗)대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대소의 군현체제 개편작업을 통하여 영광은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했고 당시 지방통치조직 개편으로

태조 23년(940) 무령군이 영광군(靈光郡)으로 개명 되였다.

그리고 옆에는 영광군의회가 있다, 이 주변에는 경찰서 법원, 교육지청, 우체국, 읍사무소등

모든 관공서가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곳이다,

영광에서 가장 광공서가 많은 지역을 벗어나니

다시 백년전 쯤으로 돌아간 느낌을 받는 마을모습이다, 이 길은 아직도 중앙로다,

영광군으로 들어 올때 "만나서 영광입니다"로 시작한 인사가

 "다시만날 영광을!" 이라는 슬로건으로 이별의 아쉬움을 전한다, 누군지는 몰라도

가장 친숙한 말을 가장 아름답게 사용한 재치가 돋 보인다,

영광이란 지명은 당시 중앙관청에서 정한 이름으로, 지명이나 성(姓) 등에 있어

통일 신라시기에 중국 한식(漢式)이 확산되고, 고려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합 이후 전국 군현의 개편과 함께 군현 토성을

분정(分定)하면서 한화(漢化)가 정착되었다. 지명이란 말을 풀이하면 땅(지역)에 붙은 이름이 된다,

그리고 지명은 그 지역의 지리적 특성에 따라 생성되거나 명칭이 부여되었다.

영광이란 지명을 불(佛)과 연관 짓기도 하지만 지명의 의미는 신령스런 빛의 고을로,

자연의 영묘한 빛이 반짝이는 은혜로운 지역이란 뜻을 담고 있다,

이곳은 23번 국도로 들어가는 북문교차로다,

나는 이 교차로를 건너 도로 건너편  영광으로 들어오는 차를 마주 보고 올라 가려고 한다,

차가 지나가는 순방향은 등 뒤에서 오는 차를 볼수가 없어 위험 하기 때문이다,

북문교차로에서 올라가는 길 옆에 보이는 들녁은 영광읍 연성리다,

앞에는 연성리 270번지 일대에 있는 건물 몇채가 보인다,

조금 전에 보였든 연성리 270번지 일대 주택과 창고 

이집 출입을 위해 23번국도에서 가드레일을 철거하고 진출입로 도 만들어 준게 보인다,

그리고 조금 더 멀리 보이는  연성리 성동마을

사실 저곳이 성동마을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도로에 있는 버스승강장에

성동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어니 마루어 짐작 하는것 뿐이다,

그리고 길 건너에 있는 연성리 169 -14 번지 영광레미콘 공장

저곳도 버스승강장 이름은 성동마을이다,

성동마을이 가까운 도로변 성동마을 버스정류장에서 길게 쉬면서

사람은 어디서 살건 사람들끼리 그러니까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문만 열면 마트가 있고 편의시설이 있는 곳이 가장 살기좋은 곳일거라는 생각도 해본다,

정말 그렇까?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겠지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은 그럴것이다,

그리고 성동마을 버스승강장을 이용할려면 신호등을 이용해서 건너가고 건너와야 한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는 농촌에는 나이드신 분들이 많은데 드나들기가 불편하지나 않을지 걱정스럽다,

내가 해야할 걱정도 아니고 내 일도 아닌데 왜 이런생각까지, ~

그러나 나는 오늘 이곳을 걸어간다,

누가뭐래도 오늘은 세상에서 제일  편하게 내맘대로 걷는다, 가고싶어면 가고 쉬고 싶어면 쉬고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걷고 또 걷는다, 그러다 보니 장등마을로 들어가는 교차로 까지왔다,

사실 장등마을 교차로가 어디쯤인지? 알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지만 도로 안내판에 그렇게 적혀 있다,

장등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는 한산해도 장등저수지 가 있는 마을로 뒤에는 꽤 큰 마을이 있다,

그리고 장등버스승강장 뒤 보리밭 가운데는 국산천일염 집하장도 있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그저 간이 창고다,

그 뒤로 보이는 마을은 영광읍 입석리 25번지 일대다, 

길건너 주유소 옆에는 삼성기사식당 보리밥 뷔페식당이 영업중이다,저곳으로 갈려면 저금전 에 지나온

장등교차로에서 건너 가야 하는데 이미 지나왔어니 건너다만 보고 그냥 올라간다, 조금만 돌아서가면 될텐데 왜 그냥 지나갈까?

이유는 단 하나, 먼길을 걷다보면 몇 십m를 돌아가는 것도 힘들때가 있다, 그래서 가는길 인근에 유적지가 있어도 

그곳으로 들어 갔다가 나오는 거리 때문에 그냥 지나 가는게 다반사다,

도로옆에 입석신대경로당이 보인다, 건너편에 있는 한솔가든 식당 맞은편이다,

입석신대 경로당이라는 긴 이름은 이곳 동 이름이 입석리 신대마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보니

이제는 경로당이라는 이름도 바꿔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어차피 농촌 마을 주민은 거의가

노인분들이니 그냥 마을회관이라고 해도 좋지않을까,

조금 더 올라가다가 입석 1구로 들어가는 작은 교차로도 지나고, 입석교도 지나가면

가는길 왼쪽에 조금 멀리있는 마을이 보인다, 이 마을 앞은 입석교 아래로 흐르는 묘량천이 있다,

그리고 묘량천 건너에 있는 우평리다, 우평리 마을은 넓게 퍼저있다,

앞에 보이는 마을 전체가 우평리다, 그리고 지금 내가 올라가고 있는 길건너편 마을도 우평리다,

신 도로 는 우평리 한 가운데를 지나가면서 우평리를 둘로 갈라놓았다,

마을로 들어가는 농로는 이렇게 길게 경작지와 이어저 있다,

호남지역 평야지대 농로는 모두 다 이렇다, 그래야 농사용 차도 다니고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한다,

우평교차로 다, 우평교차로에는

원형치안센터도 있고 우평리와 대마면 원흥리를 연결해주는 교차로다,

이제는 우평교차로도 지나간다, 

영광의 대표 브랜드는 영광굴비다,

이곳 영광이 왜 굴비의 대표 산지가 되였을까?

우선 지리적으로 영광은 영광군 한면 전체가 바다와 접해있다,

남쪽은 신안군 북쪽 끝 닭섬에서 부터 북으로는 고창군 구사포 해수욕장까지 길게 이어저 있다,

밥도둑이라 불리는 영광굴비가 유명해진 이유는 타지방 굴비보다 유별나게 맛이 좋아서인데

이 맜의 비결은? 굴비산지인 법성포 앞바다, 칠산바다에서 잡히는 참조기는 알이 비대할 뿐만 아니라

지방이 풍부하다는 점과 법성포의 특수한 자연환경, 지리적 기상요인 (기온 10.5도, 습도 75.5%, 풍속 4.8m/sec)과

서해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북서풍)의 영향으로 건조  조건이 월등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젓다,

또한 옛부터 전래되어 온 1년 이상 간수가 빠진 천일염으로 염장하는 제조기법이 특이하다는 점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법성포민들이 영광굴비의 전통을 지키려는 자존심은 제품의 질을 높이기위해 지속적인

노력과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위 에서도 언급한 염장법은, 타지역은 소금물에 조기를 담갔다 말리는 방법이지만 영광굴비는

1년 넘게 보관해서 간수가 완전히 빠진 천일염으로 조기를 켜켜이잰다.  법성포에서는 이 염장법을 섶간이라 하며 타 지역의

물에 담갔다 말리는 조기는 물 굴비라 부른다, 여하튼 길게 설명이 되기는했지만 함평의 나비, 영광의 굴비라는 브랜드가

서해안벨트를 따라 길게 흐른다, 서해안 대표브랜드를 오래도록 잘 발전시켜서 지역문화로 정착되였어면 좋겠다,

영광굴비를 생각하며 걷는길 도로는 점차 높아진다,

그리고 복잡하게 도로가 얽히기 시작한다, 내가 가는길이 맞을 싶을 정도다,

그리고 앞에 보이는 산을끼고 있는 아름다운 마을을 본다,

구릉지 산들에 둘러쌓인 마을은 마치 오물조물 빗어 놓은것 같다,

가는길 옆 대산면 갈마리 마을이 지근거리다,

내가 가고있는 도로는 21번 국도고 옆 도로는 원흥교차로에서 이어지는 전기차로다,

 전기차로로 이름이 붙은 이 도로는 조금 더 가다가 와탄천을 따라 영광대마 일반산업단지까지 이어지는 도로다

물론 대마면소재지로 도 연결이 된다,

하류로 흐르는 와탄천과 오른쪽 대산면 갈마리

이 곳 하천 와탄천은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과 영광군 영광읍으로 나누어 지는 경계다,

와탄천 위로 지나가는 교량은 고령 2교다, 이제 나는 영광군에서 고창군으로 들어간다,

영광이야기는 이곳에서 끝내고 이제부터는 고창군 이야기가 이어진다,

걸어서 만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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