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서해안 국토종주 5, ~ 무안읍에서 불갑면사무소까지,(2018년 5월 18일) 본문
이른 새벽 무안버스터미널 뒤에 있는 서울모텔을 나선다,
2018년 5월 지금은 선거철이라 가는 곳마다 후보자 프랑카드가 붙어있는
시장골목을 나가 무안버스 터미널로 나간다,
무안버스터미널 앞 에 있는
안내를 보면 무안버스터미널은 5, 18 민중항쟁 사적지 다,
무안버스터미널 옆 무안읍내 상가지역을 따라 가는길 비는 계속해서 내린다,
무안읍내 무안농협, 무안초등학교, 무안읍사무소, 목포 무안 신안 축협등을 무안에서 오래된 마을길로 영광으로 간다,
무안읍 고절3 리와 오리지도 지나 백로 로를 따라간다, 무안은 전라남도 서부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며.
동쪽은 영산강을 경계로 나주시와 영암군, 서쪽은 신안군의 무수한 섬과 면하고, 남쪽은 목포시, 북쪽은 함평군과 접하고 있는,
인구 81,324명(2014년 9월 기준)인 2읍 7면 103개 법정리로 되어있어며 군청 소재지는 무안읍 성동리 다.
또한 무안은 노령산맥의 한 줄기가 비옥한 나주평야를 지나 전라남도 서남단에 무안반도를 형성하고
다시 여기서 갈라져 나간 해제반도와 망운반도가 있으며, 연안에 2개의 유인도와 25개의 무인도가 있다, 해발 400m
이상의 산지는 없고, 승달산, 국사봉, 감방산 등의 산과 낮은 구릉 및 평지로 이어져 있다.
무안은 백제때에는 물아혜군으로 불렸어며, 757년(경덕왕16)에 무안군으로 이름이 바뀌였어며
진성여왕 6년인 892년에는 견훤이 건국한 후 백제의 영역이였어나, 909년(효공왕13) 왕건에 의해 점령됨으로써
훗날 고려 건국의 기초를 제공한 땅이기도 하다, 사진에 보이는 마을은 무안읍 용월리 상동마을이다,
상동마을에 학마을전망대가 있다, 전망대 아래층은 화장실인데 농촌화장실 수준이 아니라
주유소 화장실 보다 더 깨끗하고 청소도 잘 되여 있었다, 이곳은 옆에있는 학 서식지인 용암 저수지를
관광하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 시설인듯 했다,
이곳은 용암저수지다, 무안읍에서 북쪽으로 약 2km 거리에 있는 곳이다,
용암저수지가 있는 이곳이 천연기념물 제 211호인 백로와 왜가리 서식지인 용월리 상동마을이며
서해안고속도로 무안 나들목에서도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다, 용암저수지와 저수지 앞 산인 청용산의 소나무 숲에는
815해방 직후부터 수천 마리의 백로와 왜가리가 날아들어 3~4월이면 동남아지역에서 월동한 백로와 해오라기
수천마리가 둥지를 튼다,
낮 에는 주로 연못 위 야산 소나무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소나무 위에는 백로가, 연못 중앙에는 해오라기가 서식한다,
이곳 학마을 주민들은 백로와 왜가리를 길조로 여긴다, 새들이 많이 찾아오면 풍년이 든다고 믿고 있다, 또 마을의 액운을 없애고
마을을 부흥시켜 준다고 믿어며 새들을 보호하는데 정성을 다 하고 있다,
용암저수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함평군이다, 학마을로 알려진 무안읍 용월리 상동마을과
함평군 엄다면의 경계가 이곳이다, 함평은 전남의 서북부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군유산, 불갑산을 경계로 하여 영광,
장성군과 인접하고, 동으로는 광주광역시, 남으로는 나주와, 무안군을 경계로 이루고 있으며 황해바다인 함평만을 서쪽에 끼고 있다.
인구는 약 35,000명 정도다.
노령산맥의 일지맥이 천주봉, 고산봉을 이루어 남으로 뻗어있고, 동부에는 장성호의 수원을 받아
광활한 월야평야를 이루고, 서남 부로는 간척지가 산재하고 대동제를 젖줄로 한 함평평야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다.
또한 하천 유역에는 월야평야로부터 흐르는 고막천(영산강 지류)과 서북부에 위치한 대동제를 시점으로 흐르는
함평천은 함평과, 학교 평야를 지나 영산강으로 합류한다, 함평읍경계 이정표가 보인다,
함평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여 굴내현과 다지현이 설치되었으며,
삼국통일 후 경덕왕 때에 굴내현은 함풍현으로, 다지현은 다기현으로 각각 개칭되어 무안군에 속했다.
고려 초에는 함풍현이 영광군의 속현으로 편입되었고, 다기현은 모평현으로 개칭되어 영광군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2)에는 함풍현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조선시대 1409년(태종9)에는 함풍현과 모평현을 합쳐 함평현으로 개칭했고 1895년 함평현에서
나주부 함평군으로 되었다가 다음해에 전라남도 함평군으로 고쳐지고. 1963년 1월 함평면이 읍으로 승격된 곳이다,
함평(咸平)이라는 이름은 조선조 태종 9년(太宗.1409)에 함풍현(咸豊縣)과 모평현(牟平縣)을 통합하면서
함풍에서 咸 자를, 모평에서 平 자를 따 咸平이라 했다. 보이는 마을은 마을은 해동마을이다,
그리고 이곳 길 옆에는 설치한지 얼마되지 않은 듯한 표지석이 세워저 있는데
표지석에는 함평읍 수호리 집단학살 희생지라 쓰여있다, 한국전쟁 전후 함평군에서 주민들이 군·경에 의해
희생된 장소임을 알리는 표지석이라고 이라고 한다,
해동마을 도로 맞은편에는 포향정(抱香亭) 이라는 표지석도 있다, 포향정(抱香亭)은
명산인 곤봉산맥이 뻗어 내린 줄기에 삼면이 산으로 둘러져 있으며 마을 앞에 노적봉으로 보이는 개봉이 위치하고
있는데 옛날 스님이 마을에 시주하러 왔다가 마을 형태를 두루 살펴보고 향기로운 보자기에 싼 형태라고 해서 포향정(抱香亭)
이라는 마을 이름을 지어주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불러오고 있다. 는 전설과 함께 마을 동북쪽 산 기슭에
소나무와 대나무숲에 둘러 쌓인 포향정(抱香亭)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수호삼거리 다, 함무길은 이제 여기서 끝나고 수호삼거리에서 부터는 24번 국도와 만난다,
수호삼거리에서 오늘쪽 방향이 함평으로 가는길이다,
함평으로 가는길 왼쪽은
수호리 평호마을이다, 24번국도에서 수호 1리 평호마을로 들어가는 길
가는길 옆 오래된 집들이 보인다,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그런 집들이다,
이곳의 주소는 함장로 1051 이다, 길 이름을 사용하는 신주소 이후 헷갈리는 점은 이 마지막에
있는 숫자는 여태까지 사용하든 지번과 같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숫자만 있는 건지다, 또한 마을은 다르지만
같은 길 이름이라 도대체 어디가 어딘인지 헷갈리는게 문제다,
그리고 이제 작은 언덕길을 올라간다, 언덕을 올라서니 아파트가 보인다,
200m 후방에는 함평군청과 장성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는 예고 안내판도 붙어 있다,
그리고 멋스러운 형태의 함평학다리고등학교 를 만난다, 학다리고등학교는 1945년에 초급증학교로 개교하여
2017년 학다리고등학교 공립 전환후 2018년 함평학다리고등학교로 개교한 학교다,
학생수는 727명(남학생468명 여학생 259명)이며 교직원은 60명인 학교다
학다리고등학교에서 군청 방향으로 첫번째 사거리는 골프고 앞 교차로다,
골프고등학교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이 그렇다, 지도에서는 골프고등학교를 찾을수가 없었다,
이제 함평군청 방향 언덕으로 올라간다, 언덕을 올라서니 함평성당이 있다, 성당앞길로
걸어오다가 성당 사진을 찍을려고 반대편으로 건너 왔다,
학다리고등학교에서 부터 직진을 해서 언덕을 지나 내려가는
일직선길 끝에 함평군청이 있다,
군청 청사 앞에는 함평읍 선거관리위원회도 있는게 보인다
함평군청을 들어가면서 오른쪽은 오래된 마을이다 보니 매우 좁은 길이다,
이 길과는 다른 이야기자만 원 삼국시대 함평은 마한의 영역에 속했다, 지금도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유적인 고인돌이 1990년말 현재 600여기(파괴, 매몰한 200여기 제외)가 군내에 분포해 있고
138기의 고분이 함평천과 고막천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三國時代)에 함평이 완전히 백제의 영역이 된 해는 아직 분명치가 않다.
학계에서는 일본 서기(書記)의 기록에 따라 영산강 유역이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24년(369)에 합병되었다고
하고 있으나 이는 불분명하며, 498년 동성왕 20년 8월에 탐라(耽羅. 濟州道)를 치기 위해 왕이 친히 무진주(武珍州. 光州)에
머물었던 이후부터 완전히 백제의 지배권에 들어 간 것으로 여겨진다.
함평읍내에 있는 함평천에 영수교가 있다, 함평천에 놓여진 다리니 함평교가 맞을텐데
영수교 인 것을 보면 함평교는 다른 곳에 있다. 영수교 하류에 있는 24번 국도가 지나가는 교량이 함평교 다,
통상적으로 지명등의 이름은 나중에 만들어지는 경우는 먼저쓰고 있는 이름과 겹치면 혼돈이 올수있기
만들어지는 순서대로 다른 이름을 붙인다,
영수교를지나 기각사거리 다음이 향교사거리다, 나는 이 사거리에서 왼쪽 대동면 방향으로 가야한다,
또한 향교사거리에서, 직진으로 조금만 더 가면 함평 향교가 있다, 함평향교는 조선시대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설립연대는 미상이며, 1597년(선조 30)함평현 남쪽 대화리에 중건하였으나 지리가 불순하다는
논의가 있어 1632년(인조 10)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과 명륜당·동재(東齋)·
서재(西齋)·전사고(典祀庫)· 양사재(養士齋)·고사(庫舍)·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등이 있다
향교사거리를 지나 완쪽 길로 대동면지역으로 들어간다, 대동면사무소는 향교사거리에 있다,
가는길 앞에 보이는 작은공원에 황금박쥐 조형물 기념비가 있다,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여 있고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이 흐르는 대동면에 세계적인 희귀종이며 환경부지정 멸종위기동물(포유류) 제 1호인 황금박쥐가 1999년 우리면
고산봉을 중심으로 집단서식 하고 있는 것이 최초로 발견된이후 개체수가 매년늘어나고 있다, 환경오염으로
멸종 되여 가고있는 황금박쥐가 이곳에 집단으로 서식하며 개체수가 늘어나는 것은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 하는 것이다, - 기념비 앞에 있는 돌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왼쪽에 나있는 인도를 타고 북으로 올라간다, 길건너 전남 직업능력 개발원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기술교육 교육기관이다,
조금 고개를 돌려 보니 지나 온 함평읍 일대가 보인다,
군청소재만되여도 저 정도는 기본이다, 그리고 함평군 전체 인구는 35,000명 정도다,
대동면은 함평군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환경이 잘 보존된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멸종위기동물 1호인 황금박쥐,국가지정 천연기념물인 먹황새, 검독수리, 수달이 서식하고 팽나무, 느티나무,
개서어나무, 줄나무(제108호)가 있으며 금산리방대형고분, 금성산성, 고인돌군락지와 함평향교, 월산사등 많은 문화유적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친환경적인 지역이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나무는 수령 200년의 느티나무 로 보호수다,
관리자는 아차동마을 이장이다,
이제 200년이나 된 느티나무가 있는 아차동 버스정류장을 지나서 다시 북쪽으로 올라간다,
그저 내가 가야하는 곳은 남쪽도 동쪽도 서쪽도 아닌 오로지 북쪽이다,
이제 길은 다음 마을로 들어가면서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삼거리와 만난다,
나는 마을길로 들어간다, 이곳은 고산동이다,
고산동마을 골목길은 이렇게 깨끗하다,
마을 골목길에서 다시 도로변에 큰 나무가 보여서 도로변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나무 뿐만이 아니라
정자까지 있다, 비가오는 날이니 잠시 정자에서 비를 피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로 간다, 보이는 나무는
350 년이나 되여, 보호수로 지정된 팽나무다, 대동면 외덕길 6에 있어며 전체적인 나무 모습은 부채형이며 용트림하는 모습이라서
이 당산나무에 제를 올리자 그 후로 마을이 번영하고 계속해서 풍년이들었다 는 전설을 간직한 나무다,
외덕마을 버스승강장 맞은편에 있는 내덕마을이 산 밑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보이는 것 만으로도 정겨운 모습이다,
내덕마을과 함평 덕산삼거리를 지나 가는길 왼쪽에는 여전히 평야지대가 따라온다
어디서 끝이 날지로 모를 넓은 평야가 괄활하게 펼처진다, 사실 지도를 확인하면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눈에 보이는 풍경은 그렇다,
함평은 일제시대(日帝時代)인 1910년 9월 10일 군에 면(面)을 두도록 하는 명문과 함께
면에 면장(面長)을 두어 판임관 대우를 한다는 규정에(법률상 처음으로 면장 지위)따라, 면이 신설되였고,
1913년 12월 29일 공포한 총독부 부령(府令) 제111호와 1914년 전남도령 2호에 의하여
1914년 3월 1일 부터 실시한 군 관할구역 조정에 따라 1906년에 편입되었던 장본, 여황, 적양면은 본양면으로 통합하여
나주군에 편입되고, 오산면은 광주군으로, 대화면은 장성군으로 각각 행정구역이 변경되였다,
또, 목포부의 엄다산(嚴多山), 신로면(新老面)을 엄다면으로 통합하고 금동(金洞), 진례(進禮), 좌촌면(佐村면)을
학교면(鶴橋面)으로 통합하여 함평군에 편입 시켰어며, 기성면과 영풍면(永豊面)을 합하여 함평면(咸平面)을 신설했고,
월악(月岳), 갈동(葛洞), 대야면(大也面)을 병합하여 월야면을 신설했다. 이 때 기성면의 일부인 향교리와
강운리를 대동면에 편입시켜 함평군은 10개면을 두게된다, 일제시대 편제는 이랬다,
오늘 비오는 날이 아니고 날씨가 맑았어면 그리고 보이는 곳이 다 잘 보였다면 어땟을까,
깨끗한 장면이라 지금보다 더 아름다웠을 것인가? 아니면 안개가 끼인 저런 전경의 묘한 아름다움은 덜했을까,
이래도 아쉽고 저래도 아쉽기만한게 여행이다, 마음껏 즐기는 여행이란 편하게 쉬여가는 방법 말고는 없겠지만 목적을 가지고
서해안 국토종주를 해야하는 일에서는 욕심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만이라도 충실해야 하는데 그 마저도 일일이
찾아본다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게 문제다, 이 마을은 고목에 정자까지 구색을 갖춘 마을로 운림촌이다,
운교리 운림(雲林)은 임진란 이전부터 도술에 밝은 운림처사가 살았다고 해서
운림촌(雲林村)이라 불렀다고 하며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씨족으로는 한양 조씨가의 맹생의 후손인 홍손(洪孫)이
큰 조카 세황(世황 1505년생)과 함께 판교에서 이주해 살았다고 전해지는 마을이다,
운교리 판교(板橋)는 단종의 폐위에 항거한 한양조씨 맹생(孟生, 문과급제)이 아우인 계생(季生)과 함께
1455년 경남으로 낙향했다가 부인 함평 이씨의 본향인 함평에 인연을 맺어 손불면 북성리 군유산하 조피골에 은둔 하다가
맹생은 판교(板橋)에 계생은 당시 대동면 매월촌(梅月村) 현 대동 저수지에 수몰된 마을에 정착했는데
계생의 후손은 뒤에 아차동으로 이거했고, 맹생의 후손은 현재 판교촌에서 주성을 이루고 있다.
맹생의 판교 입촌은 대약 1500년경이다.
그 후 함평 노씨 급 汲 (1693년생)이 1720년경에 학교면 송산에서 이주해 왔고 그 뒤 청송심씨가 입촌 했다.
마을 앞에 천이 흐르는데 비가 많이 올 때 판자로 다리를 놓아 건너다녔다 해서 마을 이름을 판교(板橋)라 했다고 한다.
또 이 마을의 남쪽을 나마지, 북쪽을 북아시라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은 1912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구판교( 板橋)라 하여 신광면에 속했다가 다시 대동면에 편입되었다
함평천 금운교에서 보는 대동저수지, 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은 함평천이다,
함평천의 시작은 이곳 운교리 대동저수지 부터다,
함평천 금운교를 건너가면 운교리 ↓ 마량마을이다, 마량(馬洋)은 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
마갈산리(馬渴山里)가 지금의 마양(馬洋)인데 그 후 1912년이나 1914년 지명에는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아 일단 이 마을은
폐촌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대동제 축제시 수몰지구인 갈구지 부락 주민 4세대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고 마을을 뒷산 형국이
목마른 말이 물을찾아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는 형국이어서 마갈뫼(馬渴山)라 부르다가 마량(馬洋)으로 마을이름을 고쳣다고한다,
이제는 운교리 대동저수지 둑을보면서 지나간다,
대동저수지는 이곳 대동면 운교리와 덕산삼거리 용현교위 연암리, 두곳이나 있다, 그냥 운교리저수지,
연암리저수지,라고 부르면 될것을 왜? 두곳을 모두 대동저수지라 부르는지, ~
이제 점점 대동면도 끝나가고 함평군 신광면으로 접어든다,
대동면처름 넓은 평지 땅들이 점차 산 구릉지 농토로 변한다, 함평군은 산 구릉지도 거의 가 농지다,
가덕삼거리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23번 국도 옆, 매산마을 길을 따라 간다,
그렇게 올라가는 길 나비 모양으로 만든 버스승강장이 보인다, 함평은 나비고 나비는 함평이다, 함평과 나비,
무슨 이유로 함평이 나비 도시가 되였을까? 함평은 농경지가 많고 풍요로운 지역이었으나 식량 증산이라는 이름으로
농약과 비료를 대량으로 살포함에 따라 자연생태계가 파괴되고 토질은 박토로 변했다.
함평군은 오염된 함평천을 아름다운 생태하천으로 복원해 환경도시로 새롭게 도약할 계기로 삼아
함평천 주변 6㎞ 구간에 유채꽃을 심고 농경지 800만여 평에 자운영을 파종했다. 또 관광산업과 친환경농업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도록 친근감을 주는 나비축제를 열어 첫해에 60만 명이 방문한 대 성공을 거두면서 친환경 도시로
발돋움 하는 계기가 된다, 이제 함평군 양서, 파충류 생태공원으로 들어간다,
그러다보니 함평군은 친환경과 관련한 생태공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는 양서, 파충류 생태공원이 있다, 양서, 파충류전시관은, 전시관과 거북관
그리고 아나콘다 관이 있다, 이곳은 신광면 가덕리 306-1 이다,
양서, 파충류, 생태공원을 지나면 길은 다시 23번 국도와 나란히 간다,
그다음 장산교를 지나고 장산교차로도 지나서 ↓ 계월마을로 들어간다, 그리고
신광면소재지가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
신광면은 함평군의 서북쪽에 위치한 중산간지대로 영광군과 6개읍면에 접해있다,
대부분의 마을이 국도 23호선과 서해안고속도로, 군유산 계곡평야를 따라 형성되어 있고, 군유산과 동정제,
대동제 등 고려시대부터 지명의 변함이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매년 대한민국 난대전과 국향대전이 개최되는
사계절 오감만족의 함평자연생태공원과 상해임시정부시설 군무장, 재무장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기념관,
동학혁명 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장경삼, 동규, 응규 삼형제의 공적을 기리는 동학혁명탑이 있다.
신광초등학교다, 1941년 4월 1일에 신광공립국민교로 개교 했다고 한다,
2018년 2월 제 93회 졸업( 총 졸업생수 7,177명)생을 배출했고, 교직원 19명에 23명의 전교생이 공부하는 학교다,
신광면 소재지를 지나서 가는길 삼거리, 생각지도 못했든 작은 공원이 있었다, 신라흥무왕 김유신장군
서군교 유허비가 세워저 있는 흥무공원이다, 흥무공원은 경주 김유신장군 묘 앞에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느닷없이 함평군
신광면 삼덕리 165번지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김유신장군과 이곳과는 어떤 연이 있는 것일까? 찾아 보았지만 자료도 없다,
왜 이곳에 흥무공원이 있는지 알길은 없지만 흥무공원 앞에서 23번국도 함영로 로 들어간다,
가는길 오른쪽에 덕현 마을이 있고,
왼쪽에는 이렇게 농촌 주택다운 멋을 풍기는 아름다운 마을도 보인다,
좌야마을로 들어간다, 좌야마을에는 625때 마을주민 전체가 몰살 당할뻔했든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 이야기는 2017년 6월 23일 전남일보에 실린 기사내용이다, 함평 신광면 삼덕리 좌야마을은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지난 1950년 이곳에 살았던 50가구 150여 명 주민들은 한 순간 북한군 부역자로 몰려 목숨을 잃을 뻔 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한 의인의
도움으로 마을 주민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벗어났다. 1~2분만 늦었어도 몰살당했을 것 이라는 주민들은 6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恩人)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다,
1950년 11월 17일, 그날은 좌야마을 진주 정씨 문중 제삿날이었다. 주민 모종렬(83ㆍ당시 16세) 씨는
당시 사건이 발생한 날짜를 정확히 기억했다. 이날 영광 불갑산에서 내려온 빨치산들은 좌야마을 어귀 세장산에 진을 쳤다.
경찰이 영광을 거쳐 함평으로 와 자신들을 소탕할 것이라는 사전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함평을 가려면 반드시 좌야마을을
거쳐야 했기에 빨치산으로서는 최적의 매복 장소였다. 그들은 도로가 놓인 다리 인근에 커다란 웅덩이를 파고, 기습공격을 준비했다.
잠시 뒤 예상대로 경찰이 다리를 지났고, 마을 일대에서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총격전으로 경찰 15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총격전은 오후 5시께 종료됐다. 안도의 숨을 내쉬던 주민들은 갑작스런 경찰의 소집령에 어리둥절했다.
당시 경찰은 예기치 못한 기습공격에 따른 대규모 사상자 발생에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빨치산의 매복이 마을 주민 중
내통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 경찰은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빨리 나오지 않으면 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겁에 질린 마을 주민들이 나오자 경찰은 마을 한 밭뙈기에 주민들을 3열 횡대로 세워놓고
기관총 1정을 앞에 설치했다. 총구는 무고한 주민들을 향해 있었다. 당시 17세였던 모선례(84ㆍ여) 씨는 경찰이
내통자를 말하라며 주민들을 윽박질렀다. 하지만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낮 동안 한바탕 난리가
있던 터에 여기서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경찰이 목소리를 높일수록 주민들의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어린 아이들은 엄마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마을 어른들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내통자가 있을리 없다는 말만으론 설득이 쉽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기관총이 불을
뿜을 듯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때 차량 한 대가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영광경찰서장이 탄 차였다. 서장은 왜 마을 주민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느냐며 부하에게 상황을 물었다. 현황을 보고 받고 한참을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산세를 보니 이 마을 사람들과는
무관한 것 같다. 총구를 돌려라.
서장의 한 마디에 경찰들은 군말없이 총을거뒀다. 죽다 살아난 주민들은 이름도 모르는 영광서장에게 고맙다고 인사를했다.
그때 살아남은 좌야마을 주민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데 그를 기리기 위해 사은비(謝恩碑)를 세우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당시 영광서장의 이름이나 행방을 아는 이가 없어 유야무야 됐다.
그러나 그때의 고마움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67년이 흐른 지금도 좌야마을엔 그 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있다.
그날 현장에서 모든 걸 지켜본 이는 이제 2~3명에 불과하지만, 이미 눈을 감은 마을 어른들은 후손들에게 언젠가 꼭 보은하라 는
유지를 남겼다. 마을 청년들은 좌야마을의 은인으로 당시 제10대 영광경찰서장인 이차동 경감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재임기간이 들어맞는데다,
이 경감이 지휘관으로 있던 경찰 병력이 6ㆍ25 발발 초기 영광을 중심으로 북한군, 빨치산을 소탕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많이 흐른만큼 이 경감의 유족이라도 접촉해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그 조차도 쉽지 않았다.
마을 청년들은 영광경찰서를 통해 이 경감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생존자 모종렬씨는 당시 영광경찰서장이 주민들을 모른 체 했다면 모두 몰살당했을 것 이라며 그때 은인이 누구인지조차 모르지만,
은혜는 꼭 갚고 싶다고했다. 긴 이야기지만 이 야기는 전남일보 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졋다,
연화제 저수지가 있다, 이곳 함평에는 넓은 들녁에 물을 대야 하기 때문에 저수지가 많이 보인다,
저수지가 없어면 이렇게 넓은 땅도 농사를 지을수 없는 땅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은 농업의 첫번째 조건이다,
나비조형물이 세워저 있고 깃발이 계양되여 있는 곳이 보인다, 이제 함평군은 이곳에서 끝이난다,
이제 몇걸음만 더가면 영광군이다, 안녕히가시라는 함평군 나비가 앙증맞게 손짓을 한다, 영광군 불갑면 땅이라는 이정표도 있다,
그리고 그 뒤 입간판에는 "만나서 영광입니다" 라고 새긴 영광군의 첫 인사가 새롭다,
불갑면으로 가는 도로는 이렇게 이어진다, 불갑면 우곡리 362 번지일대
우사도 지나가고 벽에 그린 불갑면 상사화가 그려진 곳도 지나서 불갑면사무소로 간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니 이런 마을과 교차로가 보인다, 이곳은 우곡리 일대다,
느티나무와 정자도 있고 집들도 아주 정겹게 이어저 있다, 마을 뒤 산 아래는 옜날 건물이 보이는데 민가는 아닌것
같은데 무슨 건물인지 알수는 없다, 사람이 없어니 물어볼수도 없고 지도에도 안 나온다, 우곡리 마을 표지석도 보인다,
나는 2018년 5월 18일인 오늘 이렇게 함평을 지나 영광땅으로 들어 왔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것 같은 이런 길을 따라 무작정 따라 걷는다,
그러다가 황산마을로 들어간다, 황산마을에는 버스승강장도 있다, 버스승강장 이름이 곧 마을 이름이다,
그렇게 가다보니 불갑면 소재지가 눈에 들어온다,
가는길 왼족 산 능선 아래 마을이 보인다,
불갑면 안맹리다,
길건너에 불갑반점 이라는 중국집이 있다, 불갑반점 참 오랫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예전에 중국집은 모두가 반점이였었는데 요즈음에는 반점이라는 상호를 별로볼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갑반점 옆으로도 집들이 이어저 있다,
이제 불갑면 사무소에 도착했다, 불갑면사무소 앞에 있는 주택 담장에는
꽃무릇을 살아있는 듯이 그려 놓았다,
불갑면사무소는 영광군 지역으로서 옛절인 불갑사가 있었으므로 불갑면이라 했고
황산 차반 등 50개동리를 관할해 왔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서부면의 대천동 일부와
외윤면의 구평리, 장고리의 각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15개리를 관할하고 현재에 이른다.
영광군청 소재지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8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내발자국을 기록하는 앱을 이곳에서 종료 시키고 언제올지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린다,
더욱이 버스승강장에 편하게 앉아 있다가는 못보고 그냥 지나갈 것 같은 예감에 도로에 서서 기다렸다,
다행히 30여분 되니까 불갑사에서 나오는 버스를 탈수 있었다, 무조건 영광 버스터미널로 갔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뒤에 신라호텔 사우나가 있었다,
멀리 갈 힘도 없다, 우선 저곳부터 갔다, 그리고 현금 4만원에 방을 구했다, 이집은 카드는 안된다,
카드가 안되는 이유는 간단했다, 카드결제를 하면 부가세가 떨어저 나가니 남는게 없단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영광의 첫 만남은 이랬다,
걸어서 만든 지도
https://www.tranggle.com/profile/track_view/@F952427428153617/CERT/ALL/2018/801350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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