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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서해안 국토종주 7 ~ 고창터미널에서 불갑면까지,(2018년 5월 20일) 본문

서해안 일주(해남 땅끝-김포)/서해안국토종주결산

서해안 국토종주 7 ~ 고창터미널에서 불갑면까지,(2018년 5월 20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7. 21. 09:24

어제 고창터미널 맞은편 숙소였든 모텔시설은 아직도 브라운관 TV와 비슷한

배나온 TV에 난방은 아예 틀지도 않았고 겨우 온수만 나오는 그런시설이였다, 고창에도 좋은 숙소는

있겠지만 내가 정한곳이 그랬다, 그래도 피곤한 몸이니 잘자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선다,

편의점 도시락으로 아침을 먹었다, 이런 아침밥이라도 먹을수 있는다는게 다행스럽다,

물론 이곳에도 24시간 운영하는 식당이나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식당은 있겠지만 식당을 찾는 일로

허비하는 시간이면 편의점 도시락이 좋을수도 있다, 오늘도 무조건 북으로 간다, 고창경철서 옆 오늘쪽 건너편에

고창여자중학교가 있다, 고창여자고등학교도 함께있지만 길에서는 중학교만 보인다,

고창여자중학교를 지나 선운프라자 아파트와 성산현대 아파트도 지나서

어제 오후내내 따라 걸었든 23번 국도로 들어간다, 그리고 앞에 보이는 15번 국도 성두교 아래로 간다, 

성두교차로와 성두삼거리를 지나서

길 건너편에 있는 현대기사 가든과 SK주유소를 보면서 올라간다,

조금은 멀지만 워커힐모텔과 건너편에 가스충전소도 있는길로 올라간다,

제 8098 예비군부대 앞을 지나서 가는길

그리고 세곡삼거리다,

이곳 삼거리는 708번 도로를 따라 신림저수지와 신림면으로 들어가는 길로 나누어진다,

가는길 도로 왼편은 신림면 부송리다,

건너편 세곡리 마을도 부송리 마을도 아직은 이른아침이라 잠에서 깨지 않은것 같다,

그리고 작산마을 버스 승강장도 지나간다, 작산마을은 30여 세대가 몰려사는 마을로 작산마을노인회관도 있다,

그다음 잠시 산을끼고 커브를 돌아가면 아주 아름다운 집 한채를 만난다,

농부는 이른 아침부터 트렉터로 논을 갈아업고 있고

맑게 개인 하늘은

지금이 봄이 아니라 가을 하늘을 연상할 만큼 높고 푸르다,

세곡삼거리와 대포리(부성) 중간에 있는 부흥버스승강장을 지나서

고창 우리페차장도 지나간다, 그리고 페차장 지나서 있는 대포리 버스승강장으로 들어간다,

대포리 버스승강장 건너편에는

 23번 국도를 따라 마을로 들어가는 골목길도 보인다,

그리고 건너편 연꽃 만나러가는 바람식당,과 신림주유소를 지나서

조금 더 위에 있는 무인텔도 건너다 본다,

평월길 신림면 벽송리 109번지 핸드메이지 건물도 지나고 조금 더 올라가다보니

평월리 경로당도 보인다, 경로당에서 조금더 위로 올라가면 갈곡천이 흐르는데 갈곡천에 있는 다리는 자포교다,

자포교도 지나서 평월 1길을 따라(23번국도 옆길) 올라간다, 23번국도에 있는 농암버스승강장

그리고 이곳에서 부터 법지리 까지 이어지는 평야는

무척이나 큰 들녁이다,

보는것 만으로 도 내가 넉넉해 지는것 같다,

큰 들녁을 따라 23번 국도 옆 길로 올라가다보니 23번 국도 아래 통로가 있다 ,

통로로 들어가서 23번 국도 반대편을 보니 가늠이 안될만큼의 넓은 땅이있다, 이곳도 작은 마을이 아니다,  

반대편 마을에서 돌아 나왔다, 그리고 앞에 있는 법지리 마을,

사진은 당겨 찍은거라 가깝게 보이지만 사실은 거리가 조금은 멀다, 

그리고 그 앞에 펼처진 넉넉한 들녁,

신림면 법지마을이라는 표지석도 보인다, 그리고 뒤에 보이는

노란색 건물은 신림초등학교다, 신림초등학교는 1928년 벽신공립보통학교로 개설된 역사가 깊은 학교로,  

2018년 현재 남교사 3명 여교사 8명 등 11분의 선생님과, 행정실직원 9명 등으로 20명의 교직원이 있어며, 학생들은

29명으로 아주 작은 농촌학교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 있는 버스승강장 이름이 장승백이 였다,

그리고 왼쪽은 법지리 오른쪽은 무림리가 있는 마을 가운데로 난 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이제부터는 법지리 평야지대가 끝나고 산지 구릉 농지들이 펼처진다, 그리고 관동버스 승강장 옆으로

 관동리로 들어가는 길도 보인다,

보이는 이곳이 관동마을 이다,

사천리 외사마을도 지나고 흥덕면으로 넘어간다,

흥덕면소재지로 들어가는 삼거리에는 내사버스승강장도 있고 길건너편에는 흥덕 장례식장도 있엇다,

그리고 사천삼거리다, 이것 삼거리에서 왼쪽도로를 따라가면 흥덕면 소재지로 가는 길이다,

사천삼거리를 조금 더 올라가면 목화교가 있는데 목화교 아래로 들어가면

23번 국도와 22번 국도가 합류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는 법성포와 선운산 고속도로 IC로 가는

22번 국도로 들어가는 도로가 있다, 그리고 건너편 흥덕주유소를지나 목화교차로도 지나가면

가는길 옆에 마을이 보이는데  이 마을이 흥덕면사무소가 있는 흥덕면 통사리다,

사진에 보이는것 처름 면사무소 주위는 썰렁해 보인다, 그래도 흥덕면소재지는 큰 마을이니

면사무소 주변은 썰렁해도 면소재지 시내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흥덕면사무소 앞, 도로 건너 마을은 동사리다

제하사거리다, 사거리 한켠에는 녹사마을 이라는 아주 큰 표지석도 세워저 있다,

제하사거리 원형 로타리 전경이다, 모처름 보는 길 위의 공원이다,

고창에 대한 안내가 모두 있는것 같은 광고물들이 보인다,

 동학농민성지 고창과 고창 하전리 바지락축제, 복분자 장어원신지 라는 안내에

한국인의 본향 고창방문을 환영합니다 라는 인사말 까지,

이곳 회전로타리에 서 이제 22번국도를 버리고 다시 23번 국도로 간다,

이곳 23번 국도는 2차선이다, 아직 이곳 23번 국도는 확장이 안되여 있다는 뜻이다,

왼쪽에는 동사리 마을도 보인다,

그리고 동사리마을 언덕에

청그린파크장 모텔과 필 모텔이 있는것도 보인다,

그리고 치이삼거리다,

이곳도 흥덕면 소재지로 들어가는 삼거리다

이곳에서 보이는 마을은 모두 흥덕면 치룡리 다,

이곳 치룡리 는 모두 언덕 구릉지를 일구어서 농사를 하고 있다,

조금더 올라가니 왼쪽농지에 큰 사이로가 보인다,

저곳은 흥덕면 교운리 7-1에 있는 태호농장이다, 이곳에서 보기에도 저 정도 농장이면 소 100두는 넘을것 같다,

드문 드문 농촌주택이 있고 축사들도 있지만

치룡리 일대는 보기만으로도 토지가 넉넉하고 평온한 마을이다,

치룡리를 지나있는 이곳은 신기삼거리다,

가운데 있는 둥근 표지석은 이곳에서 왼쪽 도로를 따라 갈수있는 마을들의 거리가 안내되여 있다,

주황과 대촌은 각각 1km, 사포 후포는 각각 2km, 뭐 이런식으로 적혀있다,

위 사진에 보이는 신기삼거리를 지나서

계속해서 부안로를 따라간다, 가는길 옆에 는 아주 큰 열무밭도 있다,

가는길에 숲속에 숨어 있는 듯한 마을도 보인다, 그다음에는 노동마을,

도로변 양쪽에 있는 노동버스승강장도 지나간다, 그리고 흥덕면 후포리 36-15 에 있는 대농주유소까지 올라왔다, 

길 옆에 있는 농가 주택들이 보이는 이곳은 흥덕면 후포리 며

맞은편은 흥덕면 신송리다,

날씨가 화창하고 좋아서 일까?

시원스럽게 펼처저 있는 들녁만으로도 영화속 장면처름 느껴진다,

더욱이 이 마을은

길가에 매놓은 개짖는 소리도 안들리는 조용한 마을이다,

어쩌다가 한대씩 지나가는

차 소리마저도 배경 음악 소리로 들릴것 같은 마을이다,

요 며칠동안 계속해서 꾸물거리든 날씨가 오늘따라 화창하게 맑아서인지,

그래서 보이는 자연이 모두 아름답게만 보이는 기분 때문인지? 여하튼 오늘 이 들녁은 아름답기만 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얼마되지 않은 곳에 남당회맹단 이 있다, 南塘會盟壇 ? 은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에 있는 조선 후기 맹단으로 혈맹단이라고도 하며, 채홍국(蔡弘國) 등 고창 지역 300여 명의 선비들이

구국의 기치로 호남의병을 창의하고자 삽혈 동맹을 하고 쌓은 맹단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채홍국, 고덕붕(高德鵬), 조익령(曺益齡), 김영년(金永年) 등이

격문을 돌려 창의(倡義)하여 92명의 의사(義士)와 500여 명의 의병이 모여, 단(壇)을 쌓은 뒤 백마(白馬)의 피를 마시며 다섯

가지의 맹약을 내걸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혈맹(血盟)했다.


이 들은 혈맹단 앞에서 훈련도 하고 군량을 모집하여 출병을 하였으며, 순천까지 적을 추격하여 큰 전과(戰果)를

올렸고,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다시 창의한 뒤 출전(出戰)하여 배풍령(培風嶺), 장등원(長嶝原)을 거쳐 부안 호벌치(胡伐峙)에서

23일간의 격전 끝에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혈맹단은 전국 유일의 충혈(忠血)이 깃든 곳으로, 유림과 유족들이 뜻을 모아

이곳에 기적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

남당회맹단 입구를 지나가는길 우측에

고창군 부안축협 전자경매 가축시장도 있다, 이제는 가축도 전자경매를 통해서 거래가 이루어 지는모양이다,

이 지역에는 열무농사를 하는 밭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일하는 분들은 별로 없고 그저 가끔 한두분만 보인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넓은 밭에서 혼자 일을 하자면 얼마나 힘이들까?

보이는 마을 전체가 열무밭이다,

열무밭이 많은 마을을 지나서 올라가다보니 길 건너에 잘지어놓은 건물 한채가 보인다, 

고창군산림조합 조경수유통센터다, 농협, 축협, 수협, 그리고 산림조합까지 다 농민이나 어민, 축산인 그리고

산림인들을 위한 조합인데, 혹시라도 조합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위해 일을하게 돠는 경우는 없는지?,

농촌곳곳에서 들리는 농민은 모두 빚더미에 올라있다는 소리는 무었일까,

열무밭을 가로 지르는 도로를 따라

구릉지에 멋스럽게 보이는 농가들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올라간다,

오른쪽에 보이는 마을은 용반리 일대다,

솔비수목원을 지나간다, 수목원 앞에는 상차림비 없는 한우직판장이라는 간판도 붙어있다, 

솔비수목원에서는 고기도 구워 먹을수 있나보다, 그리고 솔비 수목원 맞은편 들에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농작물은 자란다, 그것도 놀리는 땅은 한뼘도 보이지도 않는다, 일하는 사람은 안보이는데

농작물은 풍성한 곳 이런 모습이 우리네 농촌이다,

지금 내가 지나가고 있는 이곳 23번 국도는 서해안 곰소만과 가장 가까운 길이다,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해안에 접한 흥덕면 도로다,

이정표와 안내 간판이 여러개가 있는 이곳은 고창군과 부안군의 경계로 신덕삼거리다,

고창군 흥덕면은 여기서 끝나고 이제는 부안군 줄포면이다, 고창읍성, 고인돌유적, 선운사등

세곳의 이름으로 잘가라는 인사를 한다, 결국 다시만나자는 그런 뜻도 함께겠지만,

줄포면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반갑다,

 줄포로 들어가는길 첫마을을 만났다, 줄포면은 부안군 지역으로 乾先面(건선면)이라 하여

대동, 대중, 율지, 등 38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입상면 일부와 고부군 서면의 일부,

고창군 북일면 일부를 병합해 1931년 줄포면으로 개칭한 면이다,

줄포면은 해발고도 40m 미만의 구릉지가 대부분으로 동부 고부천 유역에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고 

줄포리에서 곰소만 쪽으로는 간척사업에 의해 확장된 땅이다, 농업이 주 산업으로 쌀, 보리, 잎담배, 고추, 무우,

수박, 복분자등이 생산되고 수산업은 거의 페업 되였다, 앞에는 서해안 고속도로가 보인다,

가는길 도로 좌측은 줄포면 우포리고 우측은 신리다,

고소도로를 지나와서 줄포면으로 가는길 좌측으로 우포리 마을을 만난다,

그리고 우포리 593-8 번지에 길게 이어진 비닐하우스가 연결되여 있는 모습도 보인다,

우측은 신리, 왼쪽이 우포리 가운데 도로를 따라 가다보니

앞에 줄포면 십리동 마을이 보인다, 십리동 마을은 도로 양쪽으로 있다,

오늘쪽은 신리 구릉지 농경지다,

농경지 언덕 너머에는 또 다른 농토가 있고 마을이 있겠지만 보이는것만 보고 지나간다,

덕성리 마을이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그러나 덕성리마을이 어디쯤인지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보이는 언덕을 넘어 가야 하나보다,

움박가든과 십리동회관 십리골설렁탕 등이 있는

줄포리 십리동마을이다,

십리동 마을은 십리골로  밤나무골의 남쪽골자기,

줄포리의 동남쪽 마을로 줄포와의 거리가 약 십리가 됨으로 십리골이라 했다는 마을이다,

구릉지 농지가 워낙 많은 곳이라 그런지 구릉지 농지의 생김새만 봐도 아름다운 그림같은 곳이다,

그동안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지만 이렇게 여러 사람이 일하는 모습을 본 건 채 몇번이 안된다,

이번에도 5~6명의 사람들이 수확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농지를 지나 있는 큰 건물이 줄포 자동차공업고등학교다

줄포자동차공업고등학교는 1951년 2월에 변산수산고등학교로 개교하여

1998년에 줄포자동차공업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취업기능강화특성화교로 거듭난 학교로

2018년 현재 교직원 27명에 학생수 152명의 학교다,

옛날에 줄포는 부안군 남부의 농산물과 수산물이 거래되던 물산의 집산지였다.

더욱이 전라남도의 법성포, 충청남도의 서천과 함께 남부 서해안의 3대 포구로서 조기잡이철에는 칠산어장과

위도근해어장에 많은 객주들이 모여조기와 젓갈류의 집산과 매출이 활발했으나 곰소만 매립으로

지금은 옛날의 영화는 찾을 수 없다.

줄포리(茁浦里)의 원래 이름은  줄래리(茁萊里)였으며,

줄래리에는 고려시대 이래로 나라의 세미(조세로 받아들인 곡식) 창고가 있었다,

조선조에는 부안의 다섯 세미창의 하나인 남창(南倉)이 있어

세곡을 저장했다가 배로 운송해 갔든 곳이다

이곳이 줄포 사거리다,

내가 정한 오늘의 일정은 이곳까지다,

줄포면 소재지 시내 길이다,

줄포사거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길 오른쪽에 있는데 줄포의 모든 상권이 모여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줄포시외버스터미널이다,

오른쪽 끝에 있는 작은 가계가 매표를 하는 곳이다, 나두 처음에 이곳을 지나 가면서도 터미널을 찾지 못했든 곳이다,

이곳 줄포역사는 고려사에도 나온다, 高麗史(고려사) 제79권 지(志)

조운(漕運) 조에 의하면 보안현의 여섭포(勵涉浦)에 대하여 勵涉浦 : 前號主乙 在希安郡 이라 기록하고 있다.

통일신라 때 보안현은 희안(喜安)이고, 주을(主乙)은 지금의 줄포다.

이 기록으로 보아 오늘의 줄포라는 땅이름은 주을(主乙), 여섭포(勵涉浦), 무포(無浦),

제안포(濟安浦), 줄포(茁浦)로 변천해 왔다, 

줄포면(茁浦面)은 백제때는 흔양매현(欣良買縣)이었고, 통일신라 때는 희안현(希安縣)이였으며,

고려시대는 보안현(保安縣)에 속해 있었다. 조선조 초에 이르러 부령현과 보안현이 병합되어 부안현이 되면서

건선방(乾先坊)이라 하고, 부안현의 오창(다섯곳의 세곡창고)인 남창(南倉)이 이곳에 있었다.


 

걸어서 만든 지도

https://www.tranggle.com/profile/track_view/@F952427428153617/CERT/ALL/2018/801378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