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서강이 굽이쳐 흐르면서 만들어진 요새 청령포(2018년 7월 30일) 본문
영월은 단종과 관련된 역사의 땅이다.
단종의 능인 장릉이 소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본래 왕릉은 한양에서 100리 이내에 두는 것이 관례다.
그러나 조선의 왕릉 중에서 단종의 능만이 유독 한양에서 먼 곳에 위치하고 있다. 단종은 죽임을 당한 후 동강에 버려졌는데
영월의 호장이었던 엄홍도가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산자락에 암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묘의 위치조차 알 수 없었는데 100여 년이 지난 중종조에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 묘역을 정비하였고, 250여 년이 지난 숙종조에 와서야
비로소 단종으로 복위되어 무덤도 장릉이란 능호를 갖게 되였다.
단종의 슬픈 역사로 점철된 청령포는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청령포에는 구하도 라는 것이 있다. 감입곡류 하천이 큰 모양으로 형성되어 흐르다가 중간 부분이 터져 물돌이가
짧게 휘돌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청령포 하천의 모습이다. 옛날에 물길이었던 곳은 그 후로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고
하천 지형만 남게 되는데 이를 구하도라 한다. 청령포 앞의 구하도는 중요한 지리학적 의미를 갖는 지형이다.
청령포는 물돌이, 소나무 숲, 관음송, 육육봉의 기암절벽 등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은 물론 단종과 관련된 역사적 의미가 매우 깊은 장소다. 이러한 장소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2008년 문화재청에서는 청령포를 명승 제50호로 지정했다.
청령포는 영월의 서강 건너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은 육육봉이 험준한 층암절벽으로
솟아있고 주위에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마치 섬과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내륙의 깊은 산속에 위치한
이 유형(流刑)의 땅은 배를 타고 서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감옥과도 같은 곳이다.
바로 1457년(세조 3) 조선의 6대 임금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던 청령포다.
청령포는 서강이 굽이쳐 흐르면서 만들어진 요새와 같은 곳이다. 말굽처럼 휘돌아 나가는
서강의 물줄기는 오랜 세월 동안 산을 깎아 동쪽, 남쪽, 북쪽이 모두 강물로 감싸인 아주 특이한 지형을 만들었다.
슬픈 역사를 지닌 서강의 청령포는 처연하리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청령포로 들어가는 나루에서 바라보면 푸른 강물로 둘러싸인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물 건너로는 깨끗한 자갈과 흰 모래밭이 강굽이를 따라 펼쳐지고 위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가로로
길게 조성되어 푸르른 빛을 발하고 있다.
솔숲 뒤로는 험준한 지세의 육육봉이 기암괴석으로 배경을 이루고 있어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비경을 보여준다.
단종어소 마당에는 1763년(영조 39) 영조의 친필을 각자하여 세운 단묘유지비가 서 있다.
높이 162cm의 크기로 화강암 비좌 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웠다. 비석의 전면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단종이 청령포에 살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 비각
단종어소 다,
2004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당시 모습을 재현한 것으로 내부에는 인형으로 단종이 만들어져 있어 역사적 장소성을 잘 보여준다.
원통한 새 한 마리가 궁중을 나오니
외로운 몸 그림자마저 짝 잃고 푸른 산을 헤매누나
밤은 오는데 잠은 이룰 수 없고
해가 바뀌어도 한은 끝없어라
새벽 산에 울음소리 끊어지고 여명의 달이 흰 빛을 잃어가면
피 흐르는 봄 골짜기에 떨어진 꽃만 붉겠구나
하늘은 귀먹어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서러운 이 몸의 귀만 어찌 이리 밝아지는가
- 단종, 〈자규시(子規詩)〉
어린 단종의 한과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피맺힌 절규다.
단종은 어린 시절 자기를 업어주던 할아버지 세종의 인자한 모습과
집현전 학사들에게 세자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요절한 아버지 문종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을 낳고 3일 만에 돌아가신 어머니, 왕위 회복을 위해 충정을 다한
사육신의 죽음, 그리고 생이별한 아내 정순왕후의 비통한 모습이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어른거렸다.
어린 나이에 육지 속의 고도 청령포로 유배된 단종은 한없는 슬픔에 잠겼다.
참고로 이렇게 생 이별을 당한 정순왕후의 릉은 사릉이다,
http://blog.daum.net/dsooh/1409
청령포에는 단종어가,
단묘유지비, 노산대, 망향탑, 금표비 등 단종과 관련된 여러 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담 빆에서 안으로 휘여저 들어온 소나무
청령포는 특히 소나무 숲이 매우 아름답다.
창송으로 이루어진 소나무 숲은 밖에서 보는 모습도 빼어나지만 하늘을 빼곡히 뒤덮고 있는
숲 안의 풍광도 매우 청량하다.
이곳에는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된 관음송이 있다.
아주 오랜 풍상을 겪은 모습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자라 육중한 몸을 굳게 버티고 서 있는데
단종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觀), 슬픔과 울분으로 가득 찬 그의 오열(音)을 들었다고 해서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관음송은 높이가 30m에 달하는 노거수로 중간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동서로 비스듬히 자란 형태다.
수령은 약 600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단종이 유배되었을 때의 수령을 80년으로 추정하여 계산한 것이라 한다.
청령포 서측의 능선에는 노산대와 망향탑이 위치하고 있다.
단종은 층암절벽 위에 자리한 노산대에서 한양에 두고 온 왕비를 간절히 생각하며 흩어져 있는 돌을 쌓아
망향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험준한 지세의 육육봉이
기암괴석으로 절벽을 이루고 그 아래는 강이흐른다,
육육봉에서 내려가는 계단,
노산대로 간다,
노산대로 올라가는 계단
소나무 숲의 가장자리에 금표비가 서 있다,
"청령포금표" 라고 새겨진 글자가 지금도 선명하게 보인다,
이 금표비는 영조 2년(1726)에 세워진 것으로
뒷면에 동서삼백척 남북 사백구십척 차후 니생역재당금숭정구십구년 이라 음각되여 있다,
청령포의 동서 방향으로 300척, 남북으로는 490척 안에서 소나무의 벌목을 금하고 퇴적된 흙을 퍼가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457년 여름에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잠기고 말았다.
그래서 단종은 두어 달 만에 영월부사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는데 10월에 이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았다.
청령포 강 건너 나루 옆에는 단종의 유배길과 사형길에 금부도사로 왔던 왕방연의 시비가 서 있다.
그는 왕명을 수행하는 관리였기 때문에 단종에게 내려진 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은 한없는 슬픔으로 가득했다.
왕방연의 심정을 담은 그의 시
회단종이작시조(懷端宗而作時調)는 비석에 이렇게 남아있다.
千里遠遠道 천만리 머나먼 길에 美人別離秋 고운님 여의옵고
此心未所着 내 마음 둘 데 없어 下馬臨川流 냇가에 앉았으니
川流亦如我 저 물도 내 안과 같아서 鳴咽去不休 울면서 밤길을 가더라
참고문헌 / 우리 명승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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