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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백운봉암문에서 대동문 산성입구로(2018년 9월 23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서울·북한·도봉

백운봉암문에서 대동문 산성입구로(2018년 9월 23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9. 23. 23:16


백운대를 내려와서 백운봉 암문을 들어가서 계단을 내려 간다,

그리고 계단 끝 좌우 갈림길에서 왼쪽 만경대 허리길을 따라 노적봉으로 간다,

잠시 가다가 동라보면 백운대로 가는 약수릿지 와

그뒤로 조그만하게 보이는 염초봉 일대 그리고 안부에는 대동사도 보이고 그 옆으로 원효봉도 보인다,

그리고 그 위쪽으로 보이는 백운대

올려다보기에도 현란한 저곳 백은대(836,5m)가 서을의 진산인 북한산 주봉이다,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노적봉 방향으로

앞에 보이는 노적봉 동봉과 서봉,

노적봉도 비탐이라 갈수가 없다, 그리고 노적봉이 언제 열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북한산 비탐 구간중 노적봉과 형제봉 구간은 개방을 할때도 된것

같은데 왜 계속 기약없이 통제만 해놓아야 하는지?  자연을 보호하겠다는

 명분만으로 무조건 묶어 놓아야만 하는 이유를 알수 없다,

만경대 우회길은 만경대 허리를 휘감아 가는 길이다,

그러다보니 생각보다 많이 거친길이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데크계단

설치를 많이 해 놓아서 길은 생각보다 많이 개선되였다,

노적봉으로 가는 만경대 우회길을 따라가면서 전면에 보이는

보현봉과 대남문 일대가 보인다, 그리고 남장대터와 문수봉 일대, 나한봉과 나월봉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사진에는 편안하게 보이는 계단길이지만

계단이 설치 되지않았을때는 깨나 까다로운 길이였든 곳이다, 오늘은 외국인들이 많이 보인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계단길, 이 계단을 다 내려서면

노적봉 아래 갈림길이 보인다,

예전에 우리는 이 지점을 노적봉 삼거리라 불렀었다,

이곳 노적봉 삼거리에 이정목이 서 있다,

갈림길은 아니지만 가는 곳의 방향과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복이다,

이른 단풍인가 아니면 돌연변이 인가?

벌서 단풍이 피여났다, 한 가닥의 단풍 이지만 색갈이 무척이나 곱다,

노적봉 삼거리에서 지척인 거리에 있는 용암문으로 왔다,

이 용암문으로 나가면 도선사와 연결이된다, 

그리고 용암문 주변에 붙어있는 각종 알림판 들이 있다,

용암문을 지나 북한산 성길을 따라 동장대 방향으로 간다,

용암문 100여m 정도의 거리에 북한산성대피소 건물이 있다,

비록 지금은 방치되여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북한산성내 대피소 자리도 지나서 간다,



북한산성곽도 이제는 복원 한지도

제법 되다보니 넝쿨이 자라면서 찬란하게 변해저 가는게 보인다,




동정대다, 이곳 장대는 북한산성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장대라 부른다,

장대란 성내의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만든 용도로 일대에서는 제일 높은 곳에 세웠다,

동장대로 올라온 성곽길을 내려다 보며 찍은 사진이다,

북한산성 동쪽에 위치한 장대라고해서

동장대(東將臺)라고 이름이 붙은 이곳에서 조망되는 북한산 일대

그리고 북한산성에는 3개의 장대가 있엇다,

이곳 동장대와 문수봉 뒤 남장대, 그리고 노적봉 앞 북장대가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소멸되고 이곳 동장대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금위영의 장수가 주둔했다.

용암문에서 직선거리로 직선거리로 650m 떨어져 있으며, 해발고도는 586.m다.

이곳 동장대도 1996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 복원하였다.

기단은 정방형의 이중구조를 갖춘 중층 건물이다.

외부기단은 가로·세로 5.5m의 장방형으로 장주형 초석 12개를 배치했고, 내부 기단은

가로 세로 2.8m의 정방형으로 기단을 만들고 원형 초석 4개를 배치했다

동장대도 지나간다,

그리고 대동문으로 왔다, 대동문(大東門)은 북한산성의 성문이다,

북한산성에는 수문과 시구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13개의 성문이 있다, 1711년 축성당시 12성문이든 것이

중성문 건축으로 13 성문이 된후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이는 북한산성 관련 문헌에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중 북한지에서 만 14성문으로 기록되여 있어 이로 인해 13성문설과 14성문 설, 등 다양한

주장들이 쏟아저 나와 오늘날까지 혼란이 계속 되고 있다,

북한지를 저술한 사람은 북한산성 축성때부터 30년간을 승려들을 지휘하여

축성과 수비임무를 총괄했든 팔도 도총섭 성능이다, 도리(道里), 연혁(沿革0, 산계(山溪),

성지(城地), 등 총 14권 조목으로 나누어 북한산성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어 이 책을 빼놓고는 북한산성을

논할수도 없을만큼 그 영향력이 막강함에도, 혼란을 부추키는 주인공이 되였어니 아이러니다,

대동문에 있는 이정표는 4곳을 가르킨다, 결국 대동문 사거리인 셈이다,

오늘은 대동문 앞 으로 하산을 해서 산성탐방지원센터 로 간다,

대동문 맞은편으로 해서 산성 탐방지원센터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거나 거칠지도 않은 능선길처름 비교적 완만한 길로, 이곳에서 산성입구 까지는 4,5km다,


이런 길을 따라 북한산성 계곡으로 내려가면

산성행궁터로 가는길이다,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에서 37km 거리에 있는 이곳은

북한산성 행궁권역이다, 북한산성 행궁(北漢山城 行宮)은 상원봉 아래에 위치했어며 실제로

사용된 적은없다. 산성입구에서 중성문을 지나 남쪽 골짜기로 진입해 동장대가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도성의 방위 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북한산성을 축성하고 임금이

거처할 수 있는 행궁을 만들었고.숙종 37년(1711)에 착수하여 이듬해 5월 완공했다. 

행궁의 규모는 내전 정전이 28칸, 외전 정전이 28칸, 부속건물 68칸 등 총 124칸에 이르며,

내전 정전은 좌우 상방이 각각 2칸, 대청이 6칸, 사면에 퇴가 18칸이며, 부속건물로 좌우 행각방이 9칸, 청이 5칸, 중문이 1칸,

대문 3칸, 수라간이 5칸, 중문이 1칸, 측소 2칸으로 이루어졌다. 외전 정전은 내전 정전과 체제가 같다.

부속건물로 대문 3칸, 북협문 1칸, 외북장중문 1칸, 외행각방 12칸, 루 4칸, 청 4칸이 있고

헛간이 2칸, 중문 2칸, 외대문 3칸, 북변외대문 1칸이 있다. 평상시에는 행궁에 북한산 서고를 마련하여

고문헌을 비밀리에 보관하였으며, 숙종과 영조가 이곳을 찾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외전이 있었던 곳은

수해로 지반이 유실되었으나 내전이 있었던 지역은 기단석과 계단, 주춧돌 등이 뚜렷이 남아있어

당시 내전과 행각의 배치상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곳은 지금 공사가 거의 완성 단계인 중흥사 앞으로 중흥사로 들어가는 다리다,

북한산성에는 많은 사찰이 있다.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승군(스님군대)의 총 지휘소 역할을 했던 대표사찰이 중흥사다,



북한산성 산영루다, 북한산성 내에 위치했던 누각으로 조선후기에 설치된 중앙 군영인 총융청에서

 관리를 담당했던 중요한 건물이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나 추사 김정희(1786-1856) 등

당대 많은 지식인 등이 이곳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시문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1925년 대홍수로

유실되면서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으나, 2015년 고양시의 역사문화복원사업을 통해 복원했다.

↑ 다산 정약용의 산영루 시

험한 돌길 끊어지자 높은 난간 나타나니. 겨드랑이에 날개 돋쳐 날아갈 것 같구나
십여 곳 절간 종소리 가을빛 저물어가고, 온 산의 누런 잎에 물소리 차가워라

숲 속에 말 매어두고 얘기 꽃을 피우는데, 구름 속에 만난 스님 예절도 너그럽다
해 지자 흐릿한 구름 산빛을 가뒀는데, 행주에선 술상을 올린다고 알려오네



이길은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에서

북한산성계곡(북한천)으로 대남문으로 가는 주, 길로 산성입구에서 대남문까지는 5,2km 다,







1712년 5월에 착공하여 1714년 중성과 함께 완공했다,>

중성이란? 북한산성 중간(가운데)에 또 한곳의 성을 쌓았다는 중간성이라서

중성이라 했고 중성문이라고 이름을 지였다,

중성문(中城門)은 북한산성의 중성에 위치한 홍예문이다,

규모는 조선시대 단위로 높이가 11~13척, 너비가 13~14척이며 중성 옆 계곡에는 수문을 만들었고 중성 왼쪽

하단에는 시신이 성을 나갈때는 성문으로는 나갈수 없어니 은밀하게 시구문을 만들기도 했다,

중성문을 나가서 대서문으로 가는길 내리막이다,

이곳에도 페 타이어망으로 만든 미끄럼 방지용 데크길을 만들어 놓았다,

중성문에서 내려서서

국녕사로 들어가는 길림길 앞에 있는 쉼터도 지나간다,

북한산 계곡은

수도권에 있는 계곡이지만 깊고 거칠다,

한 겨울 눈길 미끄럼 방지용으로 만든 데크와

데크위에 깔아놓은 페 터이어망.

그리고 보리암 입구 삼거리,

오른쪽은 백운대로 가는길이고 왼쪽은 산성입구로 내려가는 길이다,

오늘 오전에 이곳으로 해서 백운대로 올랐다가 하산하는 길이니

당연히 산성입구로 간다,

다리를 건너 북한동역사관 앞으로 간다,

예전에 북한동 음식점 거리였든 이곳이 지금은 역사관과 화장실,

그리고 쉼터,등의 편의시설 공간으로 탈 바꿈을 했다,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465 무량사(無量寺)도 지나간다,

무량사는 고종의 후궁인 순빈 엄씨와의 인연으로 사찰의 역사가 시작된 절이다,

순빈은 지금의 무량사 자리에 산신각을 짓고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를 모신 뒤 백일기도를 올려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바로 이 아들이영친왕 이은이다, 이런 이유로 순빈의 원당이 되였어며 일반인에게는 백일기도를 올리면 소원을 들어주는 사찰로 알려졌다,

현재 약사불 좌상과 산신탱화는 약사전에 모셔져 있다, 북한산성의 방어를 위해 승병을 주둔시켰든 숭영 사찰은 아니지만

1900년 전 후에 제작된 약사불상과 산신탱화가 모셔져 있어 경기도 사찰 1호로 지정되였다,

북한산성내 주,도로? 인 길에 있는 무량사도 지나서 나가면 얼마되지 않는 곳에 대서문이 있다,

산성입구에서 탐방로를 들어 가면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문이 대서문이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나무를 실은

달구지가 지나다니던 길이었다. 대서문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도하지만 북한산성내로 우마가 다니든 유일한 문이기도 하다, 

대서문은 사람들의 출입이 가장 잦은 곳어로. 2010년까지만 해도 이곳 주위에는 사람들이 살았다. 특히 대서문 바로

옆에는 손수건 등의 기념품과 음료수를 파는 성문상회 라는 가게가 있었다. 그러나 성문상회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집들은 북한산성지구 정비 사업으로 모두 떠났고, 그 자리에는 현재 세월의 흔적만 남아 있다

대서문 길의 좌우에는 빗물을 빼내는 기구인 누혈이 설치되어 있다. 문루는 일제 말기에

파손된 이후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가 1958년 당시 경기도 지사인 최헌길이 698만 환을 들여 복원하고

오솔길도 확장했다. 대서문에 올라서면 예쁜 곡선처럼 보이는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에서 중성문 근처까지는 거의 포장도로다. 오르막이지만 가파르지 않아

 힘들지도 않다. 계곡을 따라 걷는 대남문 코스는 긴 편이지만 대체로 경사가 완만하고 난코스가 없기 때문에 거리에

비해 힘들지도 않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과 맑은 계곡물이 있고 가을에는 단풍이 곱게 물이든다, 이런 곳은 흔하지 않다.

천 년 넘는 사찰과 고적지, 문화재를 한곳에서 만날 수 있고. 여자 혼자가도 편한 분위기의 사찰과 지루해질 즈음이면

나타나는 문화재들은 더욱 즐겁게 만들어 준다. 마음이 답답할때는 산으로 가라, 그 답은 이곳을 찾어면 된다, 

북한산 산성탐방안내소다, 서울과 맞다아 있는 山城으로는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이 있다,

山으로는 북한산이 원낙 유명한 곳이지만 城으로는 남한산성이 북한산성보다 더 잘 알려저 있다,

그러나 성이든 산이든 서울의 북한산은 영원한 대한민국의 진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