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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1400년전 백제 사비(2019년 10월 6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충청·경상·전라

1400년전 백제 사비(2019년 10월 6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9. 10. 12. 11:47

부여는 부소산일대 뿐만이 아니라 부여 전체가 백제문화유적지다,

보이는 곳 모두가 2019년 기준으로 1359년 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 문화가

아직도 살아있는 곳이다,

 위 사진은 부여관아 유적이며

아래는 부여객사 건물로, 이 일대 전체가 관북리유적지로,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은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로 지정되여 있는 곳이다,

세계유산(世界遺産) World Heritage 은 세계유산협약에 따라 유네스코가 1972년부터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해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유산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Baekje Historic Areas)는 공주시, 부여군, 익산시에 있는

백제관련 역사유적지구로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하여 우리나라 12번째 세계유산이 되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총 8개의 유적을 포함한 연속유산으로 공주시에 2곳

(공산성, 송산리고분군 부여군 4곳(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능산리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익산시에 2곳(왕궁리유적, 미륵사지)을 포함한다.

부소산문에서 오른쪽으로 그리 멀지않은 곳 언덕에 하동 정씨 정려각이 보인다,

하동정씨 정려각은 조선초 학자이며 명신인 정인지(1396-1478) 선생의 5대 손으로 임진왜란때

사천 현감으로 있어면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득열(1565-1595)과 그의 아들인 택뢰(1587-1623), 손자 천세와

택뢰부인 동래 정씨 등 네분의 충, 효, 열, 을 기리기위해 조선 숙종때 건립한 정려각이다,

하동 정씨 정려각을 지나가면 삼충사(三忠祠) 유적지가 있다,

扶餘 三忠祠 는 백제시대의 충신이었던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으로.1984년 5월 17일 충남 문화재 자료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의열문(義烈門)과 충의문(忠義門)으로 들어가면 삼충사(三忠祠)다,

백제의 충신인 성충, 홍수, 계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57년에 세운 사당으로.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며.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황산벌에서 장렬히 죽은 장군이다,

삼충사 안에는 왼쪽부터

성충, 흥수, 계백, 세분의 영정이 모셔저 있다,

삼충사 중간문인 충의문과 의열문을 나가서

가든 길을 따라가는길 옆에는 안내가 붙어 있는데 안내에는 부소산의 부소는

백제어로 소나무를 뜻하는 말이 였어며 부소산에는 소나무림(순수 소나무와 리기다 소나무)과 활엽수종이

혼재되여 있다고 했다, 그 중 북미지역이 원산지인 리기다 소나무는 부소산 남사면을 중심으로 사비문과 삼충사 인근에

주로 분포하고 있는데 내건성이 강하고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 사방 및 연료림 조림 수종으로


70-80년대 조림사업으로 식재 된 것으로 부소산은 백제역사 유적지구 세계유산인

국가사적 5호로 부소산성이 함께하고 있는 곳으로 역사성과 경관적 의미에 부 적합한 외래 수종인 리기다 소나무를

연차적으로 제거하고 부소산에 걸맞는 고유 소나무로 대체 식재하여, 세계유산으로서의 진정성을 고취

시키고자 문화재청의 허가를받아 현재 그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삼충사에서 잠시 길을따라 가다보면 아주 멋스러운 누각이 보인다,

조선시대 지어진 영일루(迎日樓)다, 조선시대 홍산현(鴻山縣) 관아 입구에 있던것을

1964년 옛 영일대(迎日臺)가 있던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했다.


전설에 의하면 사비도성(泗沘都城)의 비원이던 부소산(扶蘇山) 동쪽 산정에는

임금이 매일 올라가서 동편 멀리 계룡산 위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영일대가

있었고, 서쪽 산정에는 임금이 달맞이를 즐기던 송월대(送月臺, 일명 迎月臺)가 있었다고 한다.

영일루에 오르면 동쪽으로 정동리 일대의 광활한 평야와 청산성이 한눈에 굽어보인다,

영일루에서 조금만 더 가면 사진에 보이는 것처름 잔디를 곱게키운 터가 보인다,

이곳이 군창지다, 부소산성 내 동남부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이 군창지(軍倉址)는 1915년

이곳 지하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됨으로써 백제시대 군량(軍糧)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로 알려지게 된다.

백제때 군수물자를 비축했던 곳으로 부여 부소산성(扶蘇山城 : 사적 5) 동쪽 정상부에 있다.


이곳은 영월대(迎月臺)라 하여 넓고 평평한 광장인데, 1915년 이곳 지하에서 쌀, 보리, 콩 등의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됨으로서 백제시대 군량미를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함으로써 건물터의 규모가 상세히 밝혀졌다.

부소산성은 백제시대 중심 산성으로 도성을 방어하는 핵심시설로 백제가 사비로

도성을 옮긴 백제 성왕 16년(538년) 이전에 이미 축조 되였다고한다, 부소산성은 군창지와 사자루의

산봉우리를 머리띠를 두르듯이 쌓은 테뫼식 산성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그러나 포곡식 산성만이 백제시대 것이고 나머지 두 테뫼식 산성은 통일신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된다,

대부분 흙으로 다진 토성으로 평상시에는 궁궐의 후원으로 이용되였어며 유사시에 도성의

방어거점으로 사용되였다,라고 안내되여있다,

영일루를 지나 보이는 도하나의 누각은 반월루(半月樓)다,

이름만으로는 반달을 구경하는 정자인가보다, 2층 누각 천정 벽면에 걸려있는 두 개의 현판에

반월성(半月城) 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그리고 1972년 2월 부여군수 정찬경이 쓴 반월루기를 보니 前 군수가

성루지에 정자를 세우고 그 이름을 반월루라 하였어니 이곳을 찾는 손님들이여 잠시 쉬였다

가시라고 썻다, 그럼 이 정자는 부여군에서 설치한 정자인것같다,

누가 지였건 반월루 정자 2층에서 보이는 부여 조망은 부여 시내가 한눈에 들어 온다,

이곳 조망 안내에서 나성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扶餘羅城(부여나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泗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약 84km의 외성(城)으로, 사방에 문지(門址)가 있오며 이 羅城(나성)축성 연대는 성왕대(523∼554)를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어며. 백제수도 사비의 외곽 방어시설이였다,

 나성 성벽은 부소산성(扶蘇山城) 동문 부근을 기점으로 동쪽 약 500m지점

청산성(靑山城)을 거쳐 남쪽으로 석목리 필서봉(筆書峰) 상봉을 지나 염창리 뒷산, 봉우리를

 거쳐 금강변까지 이어지는 토축이 있었다, 현재는 청산성 동쪽 약 200m와 석목리에서 동문다리까지,

필서봉에서 염창리까지 약간의 흔적만 남아 있다.

나가면서 뒤로 돌아다 본 반월루(半月樓)

우거진 숲 속에 홀로 서있는 정자의 아름다움이 멋스헙기만 하다,

半月樓를 나가면 성내(內)사거리다,

유네스코 백제역사유적지구 안내가 전시되여있다, 안내에 따르면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대힌민국 중, 서부에 있는 백제의 왕도와 밀접하게 연관된 유적으로

주변국들과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문화적 발전이 절정에 이른 백제후기(475-660)를 대표하는 유산으로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660년까지 700년간 이어진 한국의 고대 왕국 중 하나라고 기록되여 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웅진(공주) 왕도와 관련된 유적인 공산성, 송산리고분 /사비(부여)와 관련된 유적인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나성, 사비시기 수도인 부여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하여 금마저(익산)에

조성된 복도와 관련된 유적인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로 구성되여 있어며,


이 유적들은 백제가 중국으로 부터 도시계획, 건축 기술, 예술 종교,등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킨뒤 일본과 동아시아에 전해주었음을 증명하는 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된 웅진(공주)의

백제역사유적지구인 공산성은 웅진시기(475-538) 백제의 왕궁이 있었든 산성으로 금강이라는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지어젓어며, 발굴조사 결과 왕궁지, 왕궁부속시설지, 백제시대의 토성 등이 발굴되였다, 송산리고분군은 웅진시기의

백제 왕릉군으로 7기의 고분이 정비되여있다, 그중 무릉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발굴되여

왕릉의 주인공과 지어진 시기(525)가 확인되였는데 이는 매우 드문사례다,


부여의 백제역사유적지구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나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은 사비시기(538-660)백제의 왕궁과 관련된 유적으로 발굴조사결과 대형건물지등의

왕궁의 중요시설들과 정교하게 판축된 토성이 확인되였다, 나성은 백제후기 사비의 수도였든 서쪽과 남쪽은 금강이

둘려싸면서 자연적으로 해자 역활을 하였고 북쪽과 동쪽 부분에는 인공적인 방어시설로 나성을 설치했다,


나성은 동 아시아에서 새롭게 나타난 도시 외곽 성의 가장 이른 예중 하나로

도시를 방어할뿐 아니라 도시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상징적 경계로서의 역활도 했다고 안내되여

있는데 한번 읽어보는것 만으로는 금방 잊어버려서 여기에 옮긴다,

정림사지는 사비도성이 있든 곳의 도심에 남아있는 사찰터로, 정림사는 도심에 세워진 

사찰가운데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터중 하나다, 목탑의 한계를 극복한 석탑(높이 8,3m)이

남아 있어며 빌굴조사결과 금당지, 강당지, 승방지, 등이 확인되여 불교의 삼보인 불(佛) 법(法) 승(僧)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이를통해 정림사는 백제 고유의 사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 주었든

사찰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능산리고분은 나성밖에 위치한다, 이는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하여 도심에

왕릉을 조성했든 이전시기의 왕릉군과는 다른 입지선택을 보여준다, 능산리고분군은 발굴조사 이전에

대부분 도굴 되였어며 고분군의 서쪽 사찰터(능산리사지)에서는 위덕왕13년(567년)에 만들어진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과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기도 했다,


익산의 백제역사유적지구 왕궁리유젹, 미륵사지 왕궁리유적은 사비시기 수도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조성된 복도의 왕궁이다, 발굴조사결과 직사각형의 궁장 안에는 왕궁과 관련된

다양한 시설들이 있었음이 확인되였다, 남쪽에는 의례나 정치와 관련된 건물들이 북쪽에는 후원이 배치 되였음을

알수있다, 미륵사지는 고대 동아시아 최대의 사찰터중 하나다,


 미륵사는 미륵이 세상에 내려와 3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원하는 모습을

가람으로 구체화한 벡제문화의 탁월한 독창성을 보여준다, 탑과 금당을 4곳에 배치한 독특한 가람이다,

(가람이란?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곳을 말한다,)

부소산성내 사거리에서 긴 시간 백제역사유적을 알아보고 나서야

이제 태자골 숲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길로 들어가는 이유는 숲길을 즐기려고

가는게 아니고 이길 중간쯤에 궁녀사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나 그 시절이나 이 길은 같은 길인데

왜 이길은 왕자들만 다녔든 길일까? 왕자들이 다니든 길이였어니

지금 이길을 걷는 사람도 왕자처름 다니면 되는게 아닐까, 내려 가는길 왼쪽 숲 속에

작은 건물이 보인다, 궁녀사와 궁녀사 외삼문이다,

궁녀사 문이 닫혀있어니 안으로 들여다 볼수는 없었지만 내부에는

참배할수 있는 공간과 궁녀의 모습을 그린 영정이 있다, 삼천궁녀를 추모하는 궁녀사니

전쟁에 패한 백제의 마지막을 보는것 같아서 씁쓸하기도 하지만 궁녀도 그림 속에서나마 꽃다웠든

그녀들의 혼이 지금도 살아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래서 역사란 승자가 정의다, 궁녀사는 낙화암에서 꽃처름 떨어진 궁녀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지은 사당이라 적혀있어며, 궁녀사 현판은 김종필 전총리가 썻다,

부소산은 어디로 가건 울창한 숲이 이어지는 숲이다,

 그러나 유독 단풍나무가 많이 보인다, 이제 곧 단풍이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단풍드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즐거운 그런 길을 걷는다,

사자루로 올라간다, 사자루는 부소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에 있다,

부소산 정상으로 올라가는길이니 빡세게 올라가야 하는데 요즘 둘레길에서 많이 쓰는

용어인 무장애 둘레길을 걷는정도로 올라간다,

원래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送月臺)가 있던 자리로

조선 순종 24년(1824)에 세운 임천면(林川面)의 관아 정문이던 것을 1919년 부소산성(扶蘇山城)에서

가장 높은 곳인 송월대로 옮겨 짓고 이름을 개산루(皆山樓)에서 사자루로 바꾸었다, 2층 문루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2층에는 누각을 설치하였으며 건물 정면에 한말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이 쓴

泗(水+此)疵樓(사자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쪽으로는 해강 김규진(金圭鎭)이 쓴 白馬長江(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사자루를 지어면서 땅을 고를때 정지원(鄭智遠)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시대의 금동석가여래입상(金銅釋迦如來立像)이

(보물196호) 발견되었다. 사자루(泗泚樓)는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곳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시대 누각이다,

사자루는 사방이 트여있는 높은 곳에 있어 부여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누각이다. 내려다 보는 백마강, 보이는 강은 금강이다, 그러나 백마강이라 부른다, 왜? 일까?


부여읍(扶餘邑) 정동리 앞 범바위(虎岩)에서 부여읍 현북리 파진산 모퉁이까지

약 16㎞ 구간을 금강에서 띄여 백마강이라 부른다. 전북 장수군 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하는 금강은 서쪽으로 꺾여 흘러서 공주에 이르러 웅진(熊津) 또는 금강이 되고 유구천(維鳩川)을

합하여, 남쪽으로 곡류하면서 부여군에 이르러 고성진(古省津) 또는 백마강이 된다.

백마강은 백제 500년 무녕왕 시대의 기록에 이미 금강을 白江(백강)으로

표기했던 사실이 있고 역사적으로 말(馬)을 크다는 뜻으로 써온 것을 감안할 때 백마강은

곧 백제에서 가장 큰 강 이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제는 낙화암으로 간다, 사자루에서 내려가면서 보이는 삼거리 

오른쪽길이 낙화암으로 가는 길이다, 길도 편안하지만 부소산성 어디서든 누구나

잘 볼수있도록 붙여진 이정표가 있어니 찾아가기도 쉽다,

사비도성의 후원(後園)이었던 扶蘇山城은 지금도 한갓진 산책로다.

산문을 들어서서 적당히 땀이 날 정도로 걷다보면 백제 왕조의 최후를 증언해주는 낙화암

벼랑위에 닿는다. 벼량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 세워저 있고 그 아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서면

먼 옛날 궁녀들이 치마를 뒤집어쓰고 몸을 던지던 모습의 상상이 그려진다.


무려 그 숫자가 3천 명이다,과장이겠지만 과장이면 어떤가?

전설로 내려오는 역사지만 국가와 명운을 같이한 꽃다운 젊은 여인네들의 순수한

 나라사랑을 생각하면 후손들의 부끄러움은 차고넘친다,

어쨌든 아리따운 여인들이 그렇게나 많이 떨어져 죽었다는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사람이 떨어져 죽은바위, 그래서 옛 문헌 삼국유사에는

타사암 墮死岩 이라 기록되여 있다. 훗날 낙화암(落花岩)으로 미화시킨 것은 꽃잎처럼 떨어져 간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참혹한 역사의 상처도 세월의 이끼?는

지금 이시간 우리가 보고 있는 전경처름 아름다운 옷을 입고있다, 삼천궁녀의

원혼은 간곳이 없고 누구나 보고 즐기는 관광지라는 옷을 입었다,

사진에 보이는 백화정(百花亭)은 낙화암 위에 건립한 정자다, 서기 660년(의자왕 20)

백제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궁녀 3,000여 명이 백마강(白馬江)바위 위에서

투신하여 죽었는데. 낙화암 위에 1929년 부여군수 홍한표(洪漢杓)가 백화정(百花亭)을 지었고

절벽 아래 절벽에 새겨저있는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자는 우암송시열의 글씨다,

수많은 백제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라는 전설이 흘러온

1400년의 세월, 앞으로 또 천년이 지나면 그때는 어떤 전설이 될것인지? 이 전설로 낙화암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지만, 삼천궁녀가 꽃잎처럼 떨어져 죽었다는 곳. 타사암이라 불리던 이 바위절벽이

낙화암으로 바뀐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오늘도 절벽 아래로 흐르는 백마강은 여전히 무심히 흐른다.

낙화암에서 내려다보는 백마강은 수직 절벽이다.

백제 성왕이 국가 중흥의 원대한 꿈을 펼치려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으나, 위덕왕, 무왕, 의자왕에 이르는 동안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든 백제였다, 이에 신라는 단독으로 백제에 대항하기가 어려워서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와 대결하기에 이른다.


백제의 국운이 다했던지 의자왕도 정사를 소홀히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나라가 흔들리게 되였고 의자왕 20년(660년) 사비성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함락되자,

성내에 살던 궁녀와 도성에 남은 여인들은 부소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침략군이 부소산성까지 몰려들자,

백제 여인들은 적군에게 잡혀서 치욕스러운 삶을 사는것보다 강물에 몸을 던져 무너지는

국운과 함께 목숨을 버리는 길을 택했다.

이 처럼 여자의 정조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하고, 백제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했던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넋이 어린 곳이 바로 낙화암이다. 바위 절벽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岩)은 백제 여인네들의 숭고했든 지조를 꽃잎에 비유해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켯지만 백제가

사라진 역사는 벌서 1400년이다, 3,000 여인네들의 원혼이 아직도 서려있는 듯한 낙화암 전설은

앞으로도 세대를 뛰여넘어 끝없이 이어질 것 이다,

국가란 무었인가?, 사전적 의미로는 일정한 지역, 영토내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그 구성원들에 대해 최고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정치단체는 개인의 욕구와

목표를 효율적으로 실현시켜 줄 수 있는 가장 큰 제도적 사회조직으로서

포괄적인 강제단체다라고 되여있다,


그러니 정치단체가 무너지면 국가는 멸망한다, 나라가 없는 백성은

이세상 어디든 갈곳이 없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작금의 불안한 시국이 더욱 걱정이 되는 이유다,

낙화암 아래 백마강변에 있는 고란사(皐蘭寺)는 扶餘邑 부소산(扶蘇山)

북쪽에있는 절이다,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이 절은 원래 백제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기도 하고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고도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지만 백제가 멸망할때 낙화암(落花岩)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 현종 19 )에 지은 사찰이라고 한다.

고란사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보살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 및 菩薩坐像)이 있다,

법당에는 현재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이 중 본존과 향 왼쪽의 보살상은 동일한 양식의 古佛이지만

다른 보살상은 현대에 조성항것으로. 본존은 중품하생인을 결한 아미타불이며, 보살상은 삼존의 배치상 대세지보살상 이다,

오른손을 가슴까지 올리고 왼손은 무릎 위에 있는 점으로 보아 관음보살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안내되여 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렇다, 그래서 불교는 스스로 공부해서 깨달아야 하는가보다,

고란사 대웅전인 극락보전 뒤 바위 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는데 고란약수가 샘솟는 곳이다,

백제시대 임금님은 항상 고란사 뒤편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애용했는데,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 약수를

떠오게했다. 그리고 고란약수터 주변에서만 자라는 기이한 풀이있어 고란초라 불렀는데. 약수를 떠오는

 사람이 고란초 잎을 하나씩 물동이에 띄워서 고란약수라는 것을 알렷다.


임금님은 약수를 즐겨마셔서인지 위장병이나 감기도 안 걸렸다고 한다,

고란초와 고란약수에 대한 안내는 고란약수를 한잔 마시면 3년씩 젊어진다고 해서 옛날에 할아버지가

약수를 마시고 갓난아이가 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옛날 왕에게 약수를 올릴때 물 위에 띄웠다는

고란초는 그 자리에 있었다는 흔적만 있을뿐 찾아볼 길도없다.

어디 그것 뿐이겠는가, 삼천궁녀의 원혼을 달래던 고란사의 풍경 소리도

쉼없이 몰려드는 관광객들의 소음과 바로 앞 백마강에 자리잡고 영업을하는 유람선 엔진 소리에 묻혀 버린듯하다,

그래서 고란사는 고요한 산사가 아니라 중생과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하는 속세의 절이 되였다,

그러나 이 또한 나쁘지는 않으리라,

소부리(所夫里)라 불리던 부여는 1천4백 년 전 잃어버린 백제왕국을 대변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왕조사 7백년중 가장 화려했던 부여 123년의 유적은 철저히 소멸되였고

왕조에 대한 인식마저도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젓다. 7백년 백제의 화려했든 자취는 백마강 물결을 따라

어디로 흘러가버린 것일까? 굳이 남은 흔적을 찾는다면 정림사지오층석탑과 백마강변이나

낙화암에 모래처름 흩어진 패망의 전설뿐이다.

백마강을 오르내리는 유람선을 타면,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라는 슬픈 유행가 가락이 배에서 내릴때까지 구성지게 이어졋는데 지금은 다른 노래로 바뀌였는지는 알수없다, 

오늘은 유람선을 타지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여는 언제까지 잃어버린 옛날을 되새기는 노래만 할것인가?


한때는 13만 여호의 富邑(부읍)이였든 부여가 지금은 3만여 호에 불과하다고 한다,

어디 그 뿐인가? 백마강 물줄기도 예전 같지않아서 이제는 1,400백년 전 망국의 슬픔을 울어줄 물새조차

떠난지 오래니 지금이라도 부여인들은 무었을 해야하는지, 고민을 해야하지 않을까,

부여인들이 들어면 아프겠지만 부여의 대표 음식인 연밥 하나만 예를 들면

연잎을 싸서 밥을 지였어니 연밥은 맞다, 그러나 연밥말고는 먹을 국도 찬도 변변한게 없다,

그래도 연밥값은 15,000원이다, 부여연밥의 명성만큼 기대를했든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그런사정을

부여사람들은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모른척하는 것인가?,


어차피 관광객은 뜨내기니 그랫든 말았든 그만이겠지만 이런 사고로는 예전의 부여

영화를 재건한다는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일게다, 찬란한 역사문화유적을 가진 고장, 후손답게 무었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당국과 군민이 함께 깊은고민을 해야하는 시기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고란사를 나가면서 유람선을 타고 낙화암 절벽에 쓰여진 송시열 선생의 낙화암

휘호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백마강에 띄워진 배를보니 중국영화에서나 보든것 같은 정체불명의

배가 백마강을 휘젓고 다닌다, 찬란했든 백제시대의 고풍스러운 배도 아니고 어줍지 않은 한옥지붕에 앞 뒤로

달아맨 돗대, 보는것 만으로도 유람선을 타고갈 마음이 없어진다, 그래서 걸어서

부소산문으로 나간다,

부소산은 이렇게 여유롭고 충분히 아름다운데 유람선을타고 돌아갔어면 후회할뻔 했다,

부소산문으로 가다가 만난 서복사지, 절사(寺)에 터지(址)면 한마디로 절터다, 백제시대 왕실의 기원사찰이

있었다는 사찰터로 부소산 서남 기슭 평탄한 대지에있다.


1942년과 1980년의 발굴사업으로 중문, 탑, 금당, 회랑 등이 남북 자오선상으로

 배치되어 있었음이 알려졌다. 유물로는 금동, 풍탁, 벽화, 소조불상, 와당, 치미, 요대 등이 출토 되었다,

알려지는 절터다, 백제 왕실의 기원사찰이였어니 작지만 화려했든 절이였든 모양이다,

부소산문을 나와서 보는 너른터는 부여관북리유적지다, 

기와배수로, 석조배수로, 우물, 석곽창고, 목각창고, 대형건물터, 부와시설, 저습지성토구역,

등이 있었든 유적지다, 백제(500~600년대)시기 화려했든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제는 정림사지로 간다, 정림사가 아니라 정림사지라고 하는 것은

정림사 라는 사찰이 있었든 터라는 뜻이다,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동, 서, 남, 북, 중앙,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등을 건립할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

정림사와 왕궁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의

 관계와 흡사해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현재 정림사절터는 백제시대의 석탑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높이 5.62m의 석불인 부여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어,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계속해서 법통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놓이고 강당 좌우의

부속건물과 중문을 연결하는 회랑(廻廊)이 둘러싸고 있는 일탑식가람(一塔式伽藍) 배치다.

이는 정림사뿐만 아니라 부여에서 발견된 다른 사찰에도 확인되므로 백제 사비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단, 정림사지는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이다.

보이는 석탑의 이름은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이다,

또 다른 이름은 평제탑(平濟塔, 백제오층석탑, 정림사지오층석탑, 으로도 불린다, 잊혀진지

1,500년의 세월이니 어떤 이름으로 불린다고 하드라도 기록이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역사가 아니라 실물이 오롯이 그대로 남아있는 역사 유적이다,


석탑의 주변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가람배치의 전모가 밝혀졌고, 일찍이 석탑주변에서

태평8년무진정림사 (太平八年戊辰定林寺)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초기에 정림사라고

불렀던것이 확실히 밝혀졋고, 이 석탑의 명칭을 정림사지오층석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평 8년은 1028년(현종 19)으로 사찰을 크게 중수했던 해로 생각된다.

이 석탑은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과 함께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飜案)이라고 하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1962년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고, 1981년에는 이 사지에 대한 전면 발굴이 이루어져서 석탑 주변도 조사되었다.

이 석탑의 높이는 8.3m이며, 석탑의 구조는 일반적인 건축이나 석탑에서와 같이 지대석(地臺石)을 구축하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탑신부(塔身部)를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相輪部)를 형성했다,


현재 상륜부를 결실한 노반석까지의 석재가 149개나 되는

것에서도 이 탑이 목조가구의 번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부수법에 있어서는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품을 보이고 있다. - 정림사지 오층석탑 내용은 네이버사전을 참고했다,-

이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세련되고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며,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주고 있는 백제탑 형식 중 전형적인 석탑이자 석탑의 시조(始祖)라 할 수있다. 또한 이 석탑은

각부의 양식수법이 특이하고 본격적인 석탑으로 정착하고 있는 전이적인 규범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 석탑의 계보를 정립시키는 데 귀중한 존재가 되고 있다.

정림사지를 나가서 궁남지로간다, 궁남지는 정림사지에서

약 900m 정도 거리에있다, 궁남지로 가는길은 정림사지 앞 도로를 따라가면 된다, 궁남지는

우라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으로,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한 백제 30대 무왕의 서동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무왕 35년인 634년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어며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연못은 백제 30대 왕인 무왕이 만든 궁의 정원으로

연못 동쪽 언덕에서 초석과 기와조각, 그릇 조각등이 출토되여 못 근처에

이궁(離宮)이 있었을것으로 짐작되는 역사깊은 연못이다,

지금의 연못은 1965년 ~1967년까지

원래의 자연 늪지 1/3 정도 규모로 복원한 것이다, 연못 가운데로 가는길 수련이 곱게 피여있다,

꽃이 양귀비를 닮았고 물에 산다고 해서

물양귀비라 부르는 연꼿 밭도 지나간다, 노란색 물양귀비 꽃이 수도 없이 보인다,

궁남지 동쪽의 화지산(花枝山) 서쪽 기슭에는 궁남지 쪽으로 향한 완만한

경사지에 대리석으로 만든 8각형 우물이 남아 있고, 그 주변에는 많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다.

이곳은 사비정궁(泗沘正宮)의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이궁(離宮)터로 추정된다. 왕궁의 정원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든 것으로 백제, 산라, 고구려, 삼국중에서도 백제가 정원을 꾸미는

기술이 뛰여났다고 소개하고 있다,


궁남지 연못은 자연 지형의 곡선을 그대로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못 가운데와 물가에는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 있고, 연못 주변에서는 토기와 기와 등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연못 속의 섬이 바로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하였다는 섬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연못옆 연밭에 빅토리아연 잎이 피여있다, 빅토리아 연은 남미 아마존강 유역에서

자라는 열대성 수련과 식물이다. 1836년 영국의 식물학자 존 린들리가 빅토리아 여왕을 기념하기 위해

학명을 Victoria regia 로 명명한 연이다, 빅토리아연 꽃은 3일간 피는데 밤에 피고 아침에 진다. 첫날밤에는 흰색(유백색)

꽃이 피고, 다음날 일찍지고 난 후에는 서서히 핑크색으로 변하면서 2일째 밤에는 완전한 핑크색 꽃이된다.


그리고 셋째 날 아침에 화려한 왕관 모양을 한 후에 물속으로 사라진다.

특히 2일째 핀 꽃이 빅토리아 여왕의 왕관과 같다고 해 그 개화과정을 대관식 이라고 한다. 빅토리아연은

잎의 크기가 1∼3m로 매우 거대하며 50㎏의 무게까지 견딜만큼 강하다. 꽃의 크기는 지름이 25~40㎝ 정도며,가 수정을

방지하기 위해 꽃의 성별이 바뀐다. 첫날은 암꽃이었다가 둘째 날 수꽃으로 바뀌어 수정을 맞추기가 어렵고

밤에 피기때문에 매개 곤충도 흔하지 않아서 원산지가 아니면 수정을 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궁남지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연못으로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한 무왕(武王)의 서동요(薯童謠) 전설이 깃든 곳이다. 사비시대 왕궁 남쪽 연못가에는 궁궐에서 나와

혼자사는 여인이 궁남지의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백제 30대 왕인 무왕,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어니 서동의 아버지는 왕이 였거나 태자였을것이다,

그러나 궁궐밖의 생활이 궁핏하였으므로 생계를 위해 마(薯蕷)를 캐다 팔았다, 그래서 그의 아명이 서동이다,

서동의 어머니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그러든 어느날밤 왕의 노신이 찾아와 왕의 밀명을 전했는데 서라벌에 잠입하여 국정을

탐지하라고 했다, 서동은 마를 파는 상인으로 위장하여 신라에 잠입하여 탐지활동을 하든 어느날 신라 26대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와 만나게 되고 만남이 잦아지면서 사랑이 싹텃다,


그러나 서로 국적과 신분이 달라 맺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알았지만 헤여질수 없었든 두 사람은 

지혜를 짜내 서동요를 만들어 퍼트리기로 했다, 서동은 신라의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마를 나누어 주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서 서동도련님을 밤이면 몰래안고 간다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온 나라에 퍼저나갔다, 결국 대궐에까지 알려지게되여 선화공주는 귀양을 가게 되였다,

이를 미리알고 있든 서동이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랑 이야기다,

무왕 39년(638) 봄 3월에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했다.

무왕은 백제 마지막 시기에 꺼져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무왕 41년에 죽었다. 그런 탓에 백제의 왕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그러나 무왕의 아들이였든 의자왕 시기에 이르자 애써 지켜내던 백제는 끝내 멸망했다.

서동이었던 무왕이 신라에서 시집 온 선화공주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배를 띄우고 함께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궁남지 때문에 부여는 연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예로부터 부여 사람들은 궁남지에 지천으로 널린 연잎을 따다가

연잎밥을 해 먹었으며, 연꽃은 부여를 상징하는 꽃으로, 지금도 부여에서는 매년

연꽃축제가 열린다. 연잎밥은 대표적인 사찰 음식이기도 한데, 이는 연꽃이 극락세계를 상징하기도

 하거니와 연잎 밥을 만드는 과정 자체에도 오랜 수행을 강조하는 불교적 가르침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연잎밥은 잣, 호두, 대추, 밤 등의 재료를 넣고 밥을 지은 후,

다시 그 밥을 연잎으로 싸서 찌고 뜸을 들여야 완성된다.


밥을 짓고 뜸을 들이고, 다시 찌고, 뜸을 들이는 정성은 물론,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성급한 마음이 잦아든 후 라야 비로소 연잎 향이 깊이 스민 밥을

맛볼 수 있다. 밥을싸는 연잎은 어린잎, 보다는 늙은 연잎으로 해야 제 맛이 난다는 점도 의미가 깊다.

연륜 있는 노인처럼 이파리에 거뭇 거뭇한 검버섯이 피어난 연잎 일수록 연잎밥 재료로 적당하니, 세월을 감내한

후 라야 깊은 깨달음을 얻는 사람의 인생과도 닮았다. 잘 익은 연잎을 벗겨내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차진 밥을 한 입 베어물고 천천히 씹다보면 그윽한 향이 입안 가득히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