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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1500년 세월을 이어가는 정림사지오층석탑(2019년 10월 6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충청·경상·전라

1500년 세월을 이어가는 정림사지오층석탑(2019년 10월 6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9. 10. 7. 14:27


고란사를 나가면서 유람선을 타고 낙화암 절벽에 쓰여진 송시열 선생의

낙화암 휘호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백마강에 띄워진 배를보니 중국영화에서나 보든것 같은

정체불명의 배가 백마강을 휘젓고 다닌다,

찬란했든 백제시대의 고풍스러운 배도 아니고 신라와 연합햇든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그 배인지? 알수 없지만 어줍지 않은 한옥지붕에 앞 뒤로 달아맨 듯한 돗대, 보이는것

만으로도 유람선을 타고갈 마음이 없어진다, 그래서 걸어서 부소산문으로 나간다,

부소산 부소산성은 이렇게 여유롭고

충분히 아름다운데 궂이 유람선을타고 돌아 나갔어면 후회할뻔 했다,

부소산문으로 가다가 만난 서복사지, 절사(寺)에 터지(址)면 한마디로 절터다,

백제시대 왕실의 기원사찰이 있었다는 사찰터로 부소산 서남 기슭 평탄한 대지에있다. 1942년과

1980년의 발굴사업으로 중문, 탑, 금당, 회랑 등이 남북 자오선상으로 배치되어 있었음이 알려졌다. 유물로는

금동, 풍탁, 벽화, 소조불상, 와당, 치미, 요대 등이 출토되었다, 알려지는 절터다,

금당터는 평평한 직사각 모양이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상층, 하층

기단을 쌓고 각 사면에 계단을 설치했어며. 목탑이 있던 터는 8m 길이의 정사각 모양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의 백제 왕실의 기원사찰이였어니 작지만 화려했든

 절이였든 모양이다,

서복사지를 지나 부소산문으로 나간다,

눈 앞에 펼처지는 너른터는 이곳도 부여관북리유적지다, 

기와배수로, 석조배수로, 우물, 석곽창고, 목각창고, 대형건물터, 부와시설, 저습지성토구역,

등이 있었든 유적지다, 백제(500~600년대)시기 화려했든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제는 정림사지로 간다, 정림사가 아니라

정림사지라고 하는 것은 정림사 라는 사찰이 있었든 터라는 뜻이다,

대로변을 따라 정림사지로 가는길 옆 민속시장은

백제담은부여중앙시장 이라는 간판이 있는게 보인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지방 소도시 재래시장이 한산하다 못해 썰렁하기 까지한

모습은 이곳만은 아닐테니 2019년 경제실정의 현주소 인듯하다,

가는길 인도에는 백제 고도답게 무었인가를 보여주려는 노력은 한게보인다,

그러나 국민 대부분이 읽지는 하겠지만, 이해할수도 없을것 같은 한자를 써 놓았다, 우리국민 모두가

한학자가 아니다,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하는 행정이라면 안하는게 낫다, 기왕지사 예산들여서 설치한 것이라면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여를 찾은 사람들에게 무었이든 부여를 알려줄수있는 내용 하나라도

제대로 만들어 놓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은 나 뿐일까,

정림사지가 보인다,

 정림사지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여있다,

정림사지 간판이 보이는 곳에서

정림사지 입구까지는 약 350여m 정도 거리다,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동, 서, 남, 북, 중앙,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등을 건립할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 정림사와 왕궁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의 관계와 흡사해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백제 사비시기의 대표적인 사찰 터인 정림사지는

백제시대의 가람배치와 건물기단, 기초, 석탑 조영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현재 정림사절터는 백제시대의 석탑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높이 5.62m의 석불인 부여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어,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계속해서 법통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놓이고

강당 좌우의 부속건물과 중문을 연결하는 회랑(廻廊)이 둘러싸고 있는 일탑식가람(一塔式伽藍) 배치다.

이는 정림사뿐만 아니라 부여에서 발견된 다른 사찰에도 확인되므로 백제 사비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단, 정림사지는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이다.

정림사지가

세계유산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이곳에도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과

정림사 건물도 사진으로 보여준다,

보이는 석탑의 이름은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이다,

또 다른 이름은 평제탑(平濟塔, 백제오층석탑, 정림사지오층석탑, 으로도 불린다,

잊혀진지 1,500년의 세월이니 어떤 이름으로 불린다고 하드라도 기록이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역사가 아니라 실물이 오롯이 그대로 남아있는 역사 유적이다,

이 석탑은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과 함께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飜案)이라고 하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1962년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고, 1981년에는 이 사지에

 대한 전면 발굴이 이루어져서 석탑 주변도 조사되었다.

석탑의 주변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가람배치의 전모가 밝혀졌고,

일찍이 석탑 주변에서 태평8년무진정림사 (太平八年戊辰定林寺)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초기에 정림사라고 불렀던것이 확실히 밝혀졋고, 이 석탑의 명칭을 정림사지오층석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평 8년은 1028년(현종 19)으로 사찰을 크게 중수하였던 해로 생각된다.

이 석탑의 높이는 8.33m이며, 석탑의 구조는 일반적인 건축이나

석탑에서와 같이 지대석(地臺石)을 구축하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탑신부(塔身部)를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相輪部)를 형성했다

이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세련되고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며,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주고 있는 백제탑 형식 중 전형적인 석탑이자 석탑의 시조(始祖)라 할 수있다. 또한 이 석탑은

각부의 양식수법이 특이하고 본격적인 석탑으로 정착하고 있는 전이적인 규범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 석탑의 계보를 정립시키는 데 귀중한 존재가 되고 있다.

현재 상륜부를 결실한 노반석까지의 석재가 149개나 되는 것에서도 이 탑이

목조가구의 번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부수법에 있어서는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품을 보이고 있다. - 정림사지 오층석탑 내용은 네이버사전을 참고했다,-

정림사지 정문과 왼쪽 옆 작은 건물은 매표소다,

들어오면서 찍은 사진이 아니라 나가면서 찍은 사진으로 이곳은 정림사지 내 구역이다,

그리고 정림사지 담장 내로 보이는 옆으로 가는 길은

정림사지 박물관과 중앙광장, 야외공연장, 야외전시장으로 가는 내부 길이다,

정림사지만 천천히 둘러보려고 해도 한 두 시간은 족히 걸려야 하는 규모다,

그러나 아직도 오늘 일정이 남아 있어니 이 쯤에서 돌아 나간다,

정림사지 앞에있는 부여중학교 와 백제초등학교 가 보인다,

학교 건물 벽면에 크게 새겨진 교훈은 우리나라 학교에서 가장 많이 쓰는 성실 이였다,

이제 정림사지를 나가서 궁남지로 간다,

다음 일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 궁남지(서동공원)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