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부소산 사자루와 낙화암(2019년 10월 6일) 본문
궁녀사를 나와서 다시 부소산성내 사거리로 돌아왔다,
이곳에는 상가가 있다, 간단한 먹거리를 판다,
이제 사자루로 간다,
사자루로 가는길에도 울창한 숲이 이어진다,
할아버지가 약수를 너무 많이 마셔서 간난 아이가 되고
이 간난 아이가 나라에 큰공을 세워 백제 최고의 벼슬인 좌평에 올랐다는 전설을 지닌
고란약수 이야기가 이곳 길 옆에 붙어 있다, 이는 고란사에 꼭 찾아 오라는 광고일 것도 같다,
광고였든 아니든 지금 고란사로 가는 길이니 소박하게 고란약수 10잔은 마셔야 겠다,
부소산은 어디로 가건 울창한 숲이 이어진다,
숲은 숲인데 단풍나무가 많이 보인다, 이제 곧 단풍이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단풍드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즐거운
그런 길을 걷는다는 것 만으로로도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자루는 부소산에서는 제일 높은 봉우리다, 사자루로 가는길이니
길은 완만하지만 서서히 올라간다, 그렇다고 힘들게 올라가야 하는 길이 아니라
요즘 둘레길에서 많이 쓰는 무장애둘레길 정도다,
낙화암과 사자루로 가는 갈림길
오늘쪽 사자루로 간다,
이 갈림길에서 사자루는 지근 거리다,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送月臺)가 있던 자리다.
조선순종 24년(1824)에 세운 임천면(林川面)의 관아 정문이던 것을 1919년 부소산성(扶蘇山城)에서
가장 높은 곳인 송월대로 옮겨짓고 이름을 개산루(皆山樓)에서 사자루로 바꾸었다
2층 문루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2층에는 누각을 설치하였으며
건물 정면에 한말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이 쓴 泗(水+此)疵樓(사자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쪽으로는 해강 김규진(金圭鎭)이 쓴 白馬長江(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땅을 고를 때 정지원(鄭智遠)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시대의
금동석가여래입상(金銅釋迦如來立像 보물196)이 발견되었다. 사자루 사자루(泗泚樓)는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곳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시대 누각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 99호로 지정되엿어며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누각이다,
사자루는 사방이 트여있는 높은 곳에 있어 부여의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누각이다. 건물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를 때 정지원 이라는 이름을 새긴 백제시대
금동석가여래 입상이 발견되어 더욱 주목받는 장소다.
사자성에서 보이는 백마강 건너편
좌측에 부산, 금강(백마강), 왕흥사지, 백제문화단지 등이 사진으로 안내되여 있다,
내려다 보는 백마강, 보이는 강은 금강이다, 그러나 백마강이라 부른다,
왜? 일까? 부여읍(扶餘邑) 정동리 앞 범바위(虎岩)에서 부여읍 현북리 파진산 모퉁이까지 약 16㎞
구간을 백마강이라 한다. 전북 장수군 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하는 금강은 서쪽으로 꺾여 흘러서 공주에
이르러 웅진(熊津) 또는 금강이 되고 유구천(維鳩川)을 합하여, 남쪽으로 곡류하면서 부여군에 이르러
고성진(古省津) 또는 백마강이 된다.
백마강은 백제 500년 무녕왕 시대의 기록에 이미 금강을 白江(백강)으로
표기했던 사실이 있고 역사적으로 말(馬)을 크다는 뜻으로 써온 것을 감안할 때 백마강은 곧
백제에서 가장 큰 강 이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제는 낙화암으로 간다,
사자루에서 내려가면서 보이는 삼거리 오른쪽이 낙화암으로 가는 길이다,
길도 편안하지만 부소산성 어디서든
이렇게 잘 붙여진 이정표가 있어니 찾아가기도 쉽다,
부소산에서 제일 높은 곳(사자루 해발 약 106m)으로 올라 갔었어니
이제는 내려가야(낙화암 해발 약 60m)한다,
내려가는 길도
별 어려움 없는 산책길이다,
잠시후 갈림길과 만나게 되는데 가든길로 바로 들어가면
낙화암이고, 오른쪽으로 다시 내려가는 길은 고란사와 백마강 선착장이다,
사비도성의 후원(後園)이었던 扶蘇山城은 지금도 한갓진 산책로다.
산문을 들어서서 적당히 땀이 날 정도로 걷다보면 백제 왕조의 최후를 증언해주는
낙화암 벼랑 위에 닿는다. 여기가 백화정이다,
백화정(百花亭) 아래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서면
그 옛날 궁녀들이 치마를 뒤집어쓰고 몸을 던지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러나 그 숫자가 3천 명이라는 전설은 아무래도 과장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과장이면 어떤가,
지금은 전설로 내려오는 역사지만 국가와 명운을 같이한 꽃다운 젊은 여인네들의
순수한 나라사랑에 살아남은 후손들의 부끄러움은 차고 넘치는데.
어쨌든 아리따운 여인들이 그렇게나 많이 떨어져 죽었다는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 그래서 옛 문헌 삼국유사에는
타사암 墮死岩 이라 기록되여 있다. 훗날 낙화암(落花岩)으로 미화시킨 것은 꽃잎처럼 떨어져 간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참혹한 역사의 상처도 세월의 이끼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전경처름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나보다,
삼천궁녀의 원혼은 간곳이 없고 누구나 보고 즐기는
관광지라는 옷을 입었어니
사진에 보이는 백화정(百花亭)은 낙화암 위에 건립한 정자로 서기 660년(의자왕 20)
백제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궁녀 3,000여 명이 백마강(白馬江)바위 위에서
투신하여 죽었는데. 그 바위를 사람들은 낙화암이라고 불렀다, 낙화암 위에 1929년 부여군수
홍한표(洪漢杓)가 백화정(百花亭)을 지었고 절벽 아래에는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
전설이 흘러온 1400년의 세월, 앞으로 또 천년이 지나면 그때는 어떤 전설이 될것인지?
이 전설로 낙화암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지만,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岩-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천궁녀가 꽃잎처럼 떨어져 죽었다는 곳. 타사암이라 불리던 이 바위절벽이 낙화암으로 바뀐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오늘도 절벽 밑으로 흐르는 백마강은 여전히 무심하게 흐른다.
낙화암에서 내려다본 백마강,
낙화암과 백마강은 수직 절벽이다.
백제 성왕이 국가 중흥의 원대한 꿈을 펼치려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으나, 위덕왕, 무왕, 의자왕에
이르는 동안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기도 했든 백제
이에 신라는 단독으로 백제에 대항하기가 어려워서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와 대결하기에 이른다. 이때 백제는 국운을 다했던지 의자왕도 정사를 소홀히 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나라가 흔들리게 되였고 의자왕 20년(660) 사비성은 신라, 당나라 연합군에게
함락되자, 성내에 살던 궁녀와 도성에 남은 여인들은 부소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침략군이 부소산성까지 몰려들자, 백제 여인들은
적군에게 잡혀서 치욕스러운 삶을 사는것보다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무너지는 국운과 함께 목숨을 버리는 길을 택했다.
이 처럼 여자의 정조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하고, 백제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했던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넋이 어린 곳이 바로 낙화암이다.
바위 절벽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글씨이다.
백제가 사리진 역사는 1400년을 지나갔지만
3,000 여인네들의 원혼이 아직도 서려있는 듯한 낙화암 전설은
앞으로도 세대를 뛰여넘어 끝없이 이어질 것 같다,
국가란 무었인가?, 사전적 의미로는 일정한 지역, 영토내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그 구성원들에 대해 최고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정치단체는 개인의
욕구와 목표를 효율적으로 실현시켜 줄 수 있는 가장 큰 제도적 사회조직으로서 포괄적인 강제단체다.
그러니 정치단체가 무너지면 국가는 멸망한다, 나라가없는 백성은 이세상 어디든 갈곳이 없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작금의 불안한 시국이
심히 걱정이 되는 이유다,
낙화암을 나가는 길 한켠에 있는 낙화암 안내
이제 낙화암을 나가서 고란사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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