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삼천궁녀의 원혼을 달래던 고란사(2019년 10월 6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충청·경상·전라

삼천궁녀의 원혼을 달래던 고란사(2019년 10월 6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9. 10. 7. 14:22


낙화암에서 고란사로 가는 길은 왼쪽 내림길로 백마강까지 내려가야 한다,

백마강가에는 고란사와 함께 유람선 선착장도 있다,

내려가는 길은 오래된 길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닌 길이라 계단 받침돌까지 반들 반들 윤이 난다,

내려다 보이는

저곳은 백마강 유람선 선착장이다,

고란사 안내문

고란사(皐蘭寺)는 扶餘邑 부소산(扶蘇山) 북쪽 백마강변에 있는 절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다.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고란사로 들어가는 내리막길, 왼쪽 낙화암 아래 백마강가 절벽에 자리하고 있는 고란사

皐蘭寺에서 백마강을 바라보는 주위경관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디. 이 절은 원래 백제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기도 하고 궁중의 내불전(殿)이었다고도 전해지는 곳이다,

거란사는 백제가 멸망할때 낙화암(落花岩)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 현종 19)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고란사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보살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 및 菩薩坐像)이 있다,

법당에는 현재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이 중 본존과 향 왼쪽의 보살상은

동일한 양식의 古佛이지만 다른 보살상은 현대에 조성항것으로. 본존은 중품하생인을 결한 아미타불이며, 

보살상은 삼존의 배치상 대세지보살상 이다, 오른손을 가슴까지 올리고 왼손은 무릎 위에 있는

점으로 보아 관음보살상일 가능성이 높다.

고란사 종각이다,

고란사에서는 누구나 종을 울릴수 있도록 개방했다,

단,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조용히 종을 처 달라는 당부와 함께다,

고란사 터는 그리 넓지않다,

 절벽 아래 겨우 자릴 잡아서 산신각이 있는게 보인다,

이 산신각 앞에 서 오늘을 인증했다,

 그리고 고란사 대웅전인 극락보전 뒤 바위 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는데

이곳이 그 유명한 고란약수가 있는 곳이다, 백제시대에 임금님은 항상 고란사 뒤편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애용하여,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 약수를 떠오게 하였다. 마침 고란약수터 주변에서만 자라는 기이한 풀이 있어

고란초라 불렀는데. 약수를 떠오는 사람이 고란초의 잎을 하나씩 물동이에 띄워 옴으로써 그것이 고란약수라는

 것을 알렷다. 임금님은 약수를 즐겨마셔서 언제나 위장병이나 감기도 안 걸렸다고 한다,

고란초와 고란약수 공식적인 안내에는 ↓

고란약수를 한잔 마시면 3년씩 젊어진다고 해서 약수를 마시고

갓난아이가 되였다는 할아버지 이야기도 적혀있다,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약수 물한모금에 3년 젊어진다는

전설이 터무니 없는 말이 아닐 정도로 신비하다, 약수정 바위틈에서는 물이 넘처 흐른다,

그리고 약수터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피여난다는 바위틈이다, 그런데도 앞쪽으로

둘러처진 보호망 때문에 고란초를 볼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면 옛날 왕에게 약수를 올릴때

물 위에 띄웠다는 고란초는 그 자리에 있었다는 흔적만 있을뿐

 이제는 찾아볼 길이 없다.

어디 그것 뿐이겠는가, 삼천궁녀의 원혼을 달래던 고란사의 풍경 소리도

쉼없이 몰려드는 관광객들의 소음과 바로 앞 백마강에 자리잡고 영업을하는 유람선 엔진

소리에 묻혀 버린듯하다, 그래서 고란사는 고요한 산사가 아니라 중생과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하는

속세의 절이 되였다, 그러나 이 또한 나쁘지는 않으리라,

고란사 앞에 보이는 백마강, 이 강은 금강줄기다,

그러나 금강은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부여를 지나는 구간만 따로 떼어

백마강(白馬江)이라 부른다.

소부리(所夫里)라 불리던 부여는 1천4백 년 전 잃어버린 백제왕국을 대변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왕조사 7백년중 가장 화려했던 부여 123년의 유적은 철저히 소멸되였고

왕조에 대한 인식마저도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젓다. 7백년 백제의 화려했든 자취는 백마강 물결을따라

어디로 흘러가버린 것일까? 굳이 남은 흔적을 찾는다면 정림사지오층석탑과 백마강변이나

낙화암에 모래처름 흩어진 패망의 전설뿐이다.

강을 오르내리는 백마강 유람선에 몸을 실으면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라는 슬픈 유행가 가락이

배에서 내릴때까지 구성지게 이어졋는데 지금은 다른 노래로 바뀌였는지는 알수없다, 오늘은 유람선을

 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여는 언제까지 잃어버린 옛날을 되새기기만 할것인가?

한때는 13만 여호의 富邑(부읍)이 였든 부여가 지금은 3만여 호에 불과하다고 한다,

어디 그 뿐인가? 백마강 물줄기도 예전 같지않아서 이제는 1,400백년 전 망국의 슬픔을 울어줄 물새조차

떠난지 오래니 지금이라도 부여인들은 무었을 해야하는지, 고민을 해야하지 않을까,

부여인들은 아프겠지만 부여의 대표 음식인 연밥을 예를들면

연잎을 싸서 밥을 지였어니 연밥은 맞다, 그러나 연밥말고는 먹을 국도 찬도 변변한게 없다,

그런데도 값은 15,000원이다, 부여의 명성만큼 기대를했든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그런사정을 부여사람들은 모르는가,

아니면 모른척하는 것인가?, 어차피 관광객은 뜨내기니 그랫든 말았든 그만이겠지만 이런 사고로는 예전 부여영화를

재건한다는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일게다, 찬란한 역사문화유적을 가진 고장, 후손답게 무었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당국과 군민이 함께 깊은 고민을 해야하는 시기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제 고란사를 나간다, 오지랍이 그리 넓지도 않은사람인데도

내가 해야할 걱정도 아닌 정말 쓰잘데기 없는 걱정을 하다보니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다음 이야기는 백제의 숨결이 그나마 고스란히 남아있는 정림사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