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이야기 궁남지(2019년 10월 6일) 본문
정림사지를 나가서 궁남지로간다, 궁남지는 정림사지에서
약 900m 정도 거리에있다, 궁남지로 가는길은 정림사지 앞 도로를 따라가면 된다,
이곳은 궁남지 주차장이다,
궁남지는 우라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으로,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한 백제 30대 무왕의 서동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무왕 35년인 634년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어며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연못은 백제 30대 왕인 무왕이 만든 궁의 정원으로
연못 동쪽 언덕에서 초석과 기와조각, 그릇 조각등이 출토되여 못 근처에
이궁(離宮)이 있었을것으로 짐작되는 역사깊은 연못이다,
지금의 연못은 1965년 ~1967년까지
원래의 자연 늪지 1/3 정도 규모로 복원한 것이다,
연못 가운데로 가는길 수련이 곱게 피여있다,
꽃이 양귀비를 닮았고 물에 산다고 해서 물양귀비라 부르는
연꼿 밭도 지나간다,
노란색 물양귀비 꽃
궁남지 동쪽의 화지산(花枝山) 서쪽 기슭에는 궁남지 쪽으로 향한 완만한 경사지에
대리석으로 만든 8각형 우물이 남아 있고, 그 주변에는 많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다. 이곳은
사비정궁(泗沘正宮)의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이궁(離宮)터로 추정된다.
왕궁의 정원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든 것으로
백제, 산라, 고구려, 삼국중에서도 백제가 정원을 꾸미는 기술이 뛰여났다고 소개하고 있다,
궁남지 연못은 자연 지형의 곡선을 그대로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못 가운데와 물가에는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 있고, 연못 주변에서는 토기와 기와 등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연못 속의 섬이 바로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는 섬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것은 동해 한가운데에 신선이 사는 섬인 봉래(蓬萊), 방장, 영주(瀛州)의
삼신산(三神山)이 있다고 하여, 그 섬 가운데 방장선산을 본따서 신선정원(神仙庭苑)을
꾸며 불로장생을 바랐던 도교적 사상과 관념이 표현된 것으로 이해된다.
연못옆 연밭에 빅토리아연 잎이 피여있다, 빅토리아 연은 남미 아마존강 유역에서 자라는
열대성 수련과 식물이다. 1836년 영국의 식물학자 존 린들리가 빅토리아 여왕을 기념하기 위해 학명을
Victoria regia 로 명명한 연이다, 빅토리아연 꽃은 3일간 피는데 밤에 피고 아침에 진다. 첫날밤에는 흰색(유백색)
꽃이 피고, 다음날 일찍지고 난 후에는 서서히 핑크색으로 변하면서 2일째 밤에는 완전한 핑크색 꽃이된다.
그리고 셋째 날 아침에 화려한 왕관 모양을 한 후에 물속으로 사라진다.
특히 2일째 핀 꽃이 빅토리아 여왕의 왕관과 같다고 해 그 개화과정을 대관식 이라고 한다.
빅토리아연은 잎의 크기가 1∼3m로 매우 거대하며 50㎏의 무게까지 견딜만큼 강하다. 꽃의 크기는 지름이
25~40㎝ 정도며, 자가 수정을 방지하기 위해 꽃의 성별이 바뀐다. 첫날은 암꽃이었다가 둘째 날
수꽃으로 바뀌어 수정을 맞추기가 어렵고 밤에 피기때문에 매개 곤충도 흔하지 않아서
원산지가 아니면 수정을 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궁남지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연못으로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한 무왕(武王)의 서동요(薯童謠) 전설이 깃든 곳이다.
사비시대 왕궁 남쪽 연못가에는 궁궐에서 나와 혼자사는 여인이 궁남지의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백제 30대 왕인 무왕,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어니 서동의 아버지는
왕이 였거나 태자였을것이다, 그러나 궁궐밖의 생활이 궁핏하였으므로 생계를 위해
마(薯蕷)를 캐다 팔았다, 그래서 그의 아명이 서동이다,
서동의 어머니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그러든 어느날밤 왕의 노신이 찾아와 왕의 밀명을 전했는데 서라벌에 잠입하여 국정을
탐지하라고 했다, 서동은 기꺼아 받아들여 마를 파는 상인으로 위장하여 신라에 잠입하여 탐지활동울 충실히
하든 어느날 신라 26대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와 만나게 되고 만남이 잦아지면서 사랑이 싹텃다,
그러나 서로 국적과 신분이 달라 맺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알았지만 헤여질수 없었든
두사람은 지혜를 짜내 서동요를 만들어 퍼트리기로 했다, 서동은 신라의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가서 마를 나누어 주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서 서동도련님을 밤이면 몰래안고 간다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온 나라에 퍼저나갔다, 결국 대궐에까지 알려지게되여 오해를 받은
선화공주는 귀양을가게 되였다, 그러나 이를 미리알고 있든 서동이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랑 이야기다,
무왕 39년(638) 봄 3월에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했다.
무왕은 백제 마지막 시기에 꺼져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무왕 41년에 죽었다. 그런 탓에 백제의 왕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그러나 무왕의 아들이였든 의자왕 시기에 이르자 애써 지켜내던 백제는 끝내 멸망했다.
서동이었던 무왕이 신라에서 시집 온 선화공주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배를 띄우고 함께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궁남지 때문에
부여는 연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예로부터 부여 사람들은 궁남지에 지천으로 널린 연잎을 따다가 연잎밥을
해 먹었으며, 연꽃은 부여를 상징하는 꽃으로, 지금도 해마다 부여에서는 연꽃축제가 열린다.
연잎밥은 대표적인 사찰 음식이기도 한데, 이는 연꽃이 극락세계를 상징하기도 하거니와 연잎 밥을 만드는
과정 자체에도 오랜 수행을 강조하는 불교적 가르침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연잎밥은 잣, 호두, 대추, 밤 등의 재료를 넣고 밥을 지은 후, 다시 그 밥을 연잎으로 싸서
찌고 뜸을 들여야 완성된다. 밥을 짓고 뜸을 들이고, 다시 찌고, 뜸을 들이는 정성은 물론,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성급한 마음이 잦아든 후 라야 비로소 연잎 향이 깊이 스민 밥을 맛볼 수 있다.
밥을싸는 연잎은 어린잎, 보다는 늙은 연잎으로 해야 제 맛이 난다는 점도 의미가 깊다.
연륜 있는 노인처럼 이파리에 거뭇 거뭇한 검버섯이 피어난 연잎 일수록 연잎밥 재료로
적당하니, 세월을 감내한 후 라야 깊은 깨달음을 얻는 사람의 인생과도 닮았다. 잘 익은 연잎을 벗겨내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차진 밥을 한 입 베어물고 천천히 씹다보면 그윽한 향이 입안 가득히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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