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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부소산성 반월정과 궁녀사,(2019년 10월 6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충청·경상·전라

부소산성 반월정과 궁녀사,(2019년 10월 6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9. 10. 7. 14:06


부소산을 둘러보는 길은 보도블럭을 쌓아 만들었다,

그 흔한 콘크리트나 아스팔트가 아닌 어쩜 자연배수까지를 고려한 선택인것 같았다,

상수리나무 안내는 왜란때 임금의 수라상에 올랐다고 해서 상수라 부른다고 적혀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설마 상수리 나무를 먹었다는 말은 아닐테고 상수리 나무가 표고 재배 원목으로 사용되는 나무니

상수리나무로 재배한 표고를 임금님 수라상에 올렷다, 그런뜻인가, 분명히 참나무과라 쓰여 있는데?

그래도 그런 안내라도 붙어 있어니

그 나무에 기대여 기념찰영까지 하기도 하는데

부소산성은 백제시대 중심 산성으로 도성을 방어하는 핵심시설로

백제가 사비로 도성을 옮긴 백제 성왕 16년(538년) 이전에 이미 축조 되였다, 부소산성은

군창지와 사자루의 산봉우리를 머리띠를 두르듯이 쌓은 테뫼식 산성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그러나 포곡식 산성만이 백제시대 것이고 나머지 두 테뫼식 산성은 통일신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된다, 대부분 흙으로 다진 토성으로 평상시에는 궁궐의 후원으로

이용되였어며 유사시에 도성의 방어거점으로 사용되였다, 라고 안내↓ 되여있다,

산문 오른쪽으로 가다가 처음보는 누각은 반월루(半月樓)다,

이름만으로는 반달을 구경하는 정자인가보다,

2층 누각에 붙어 있는

두 개의 현판에는 반월성(半月城) 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그러나 1972년 2월 부여군수 정찬경이 쓴 반월루기를

(현판-아래사진)를 보니 전 군수가 성루지에 정자를 세우고 그 이름을

반월루라 하였어니 이곳을 찾는 손님들이여 잠시 쉬였다 가시라고 썻다, 그럼 이 정자는

백제와 통일신라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와는 무관한 것인가,

정자 2층에서 보이는 부여 조망은

부여 시내가 한눈에 들어 온다, 부여시내와 백마강 전경이다,

조금 더 넓게 파노라마 로 본 부여시내 일대.

2층 누각을 내려 와서 보니

반월루 옆 한켠에 부여일대 안내 사진이 전시되여 있는게 보인다,

나성과 정림사지, 궁남지, 관북리유적, 금강(백마강)등이 표시되여 있다, 오늘 우리는

관북리유적지는 부소산으로 들어오면서 이미 보았고 앞에 보이는

정림사지와 궁남지는 잠시후에 찾아 볼 생각이다,

여기서 나성이라는 단어가 눈에 띠인다, 扶餘羅城(부여나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泗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약 84km의 성(城)으로, 사방에 문지(門址)가 있오며 이 羅城(나성)은

백제수도 사비 외곽 방어시설이였다, 축성 연대는 성왕대(523∼554)를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어며. 성벽은 부소산성(扶蘇山城)

동문 부근을 기점으로 동쪽 약 500m지점 청산성(靑山城)을 거쳐 남쪽으로 석목리 필서봉(筆書峰) 상봉을 지나

염창리 뒷산, 봉우리를 거쳐 금강변까지 이어지는 토축이 있었다, 현재는 청산성 동쪽 약 200m와

석목리에서 동문다리까지 그리고 필서봉에서 염창리까지 약간의 흔적만 남아 있다.

이제 이곳도 나가면서 뒤 돌아다 본 반월루(半月樓)

우거진 숲 속에 홀로 서있는 정자의 아름다움이 멋스헙기만 하다,

半月樓 를 나가면 성내사거리다, 이곳에는 유네스코 백제역사유적지구 안내가 되여 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대힌민국 중, 서부에 있는 백제의 왕도와 밀접하게 연관된 유적으로 주변국들과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문화적 발전이 절정에 이른 백제후기(475-660)를 대표하는 유산으로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660년까지 700년간 이어진 한국의 고대 왕국 중 하나다,

안내판 내용을 옮겨 적는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웅진(공주) 왕도와 관련된 유적인 공산성,

 송산리고분 /사비(부여)와 관련된 유적인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나성, 사비

시기 수도인 부여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하여 금마저(익산)에 조성된 복도와 관련된 유적인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로

구성되여 있다, 이 유적들은 백제가 중국으로 부터 도시계획, 건축 기술, 예술 종교,등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킨뒤 일본과 동아시아에 전해주었음을 증명하는 유산이다,

 * 유네스코에 등록된 웅진(공주)와 사비(부여) 금마저(익산)의 유적지 지도,

공주의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공산성과 송산리고분에 대한 안내를 읽어보면

공산성은 웅진시기(475-538) 백제의 왕궁이 있었든 산성으로 금강이라는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지어젓다, 발굴조사 결과 왕궁지, 왕궁부속시설지, 백제시대의 토성 등이 발굴되였다, 송산리고분군은 웅진시기의

백제 왕릉군으로 7기의 고분이 정비되여 있다, 그중 무릉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발굴되여

왕릉의 주인공과 지어진 시기(525)가 확인되였는데 이는 매우 드문사례이다,

부여의 백제역사유적지구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나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은 사비시기(538-660)백제의 왕궁과 관련된 유적으로 발굴조사결과 대형건물지등의

왕궁의 중요시설들과 정교하게 판축된 토성이 확인되였다,


나성은 백제후기 사비의 수도였든 서쪽과 남쪽은 금강이 둘려싸면서 자연적으로 해자 역활을 하였고

북쪽과 동쪽 부분에는 인공적인 방어시설로 나성을 설치했다, 나성은 동 아시아에서 새롭게 나타난 도시 외곽 성의

가장 이른 예중 하나로 도시를 방어할뿐 아니라 도시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상징적 경계로서의 역활도 했다,

정림사지는 사비도성이 있든 곳의 도심에 남아있는 사찰터다, 정림사는 도심에 세워진 사찰가운데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터중 하나다, 목탑의 한계를 극복한 석탑(높이 8,3m)이 남아 있어며 빌굴조사결과

금당지, 강당지, 승방지, 등이 확인되여 불교의 삼보인 불(佛) 법(法) 승(僧)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이를통해 정림사는 백제 고유의 사찰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 주었든 사찰이였을것으로 추정된다,


능산리고분은 나성밖에 위치한다, 이는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하여 도시 한복판에

왕릉을 조성하였든 이전시기의 왕릉군과는 다른 입지선택을 보여준다, 능산리고분군은 발굴조사 이전에

대부분 도굴 되였어며 고분군의 서쪽 사찰터(능산리사지)에서는 위덕왕13년(567년)에 만들어진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과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였다,

익산의 백제역사유적지구 왕궁리유젹, 미륵사지

왕궁리유적은 사비시기 수도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하여 조성된 복도의 왕궁이다,

발굴조사결과 직사각형의 궁장 안에는 왕궁과 관련된 다양한 시설들이 있었음이 확인되였다,

남쪽에는 의례나 정치와 관련된 건물들이 북쪽에는 후원이 배치 되였음을 알수 있다,


미륵사지는 고대 동아시아 최대의 사찰터중 하나다,

미륵사는 미륵이 세상에 내려와 3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원하는 모습을 가람으로 구체화한

벡제문화의 탁월한 독창성을 보여준다, 탑과 금당을 4곳에 배치한 독특한 가람이다,

(가람이란?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곳을 말한다,)

부소산성내 사거리에서 긴 시간

백제역사유적을 알아보고 나서야 이제 태자골 숲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길로 들어가는 이유는 숲길을 즐기려고 가는게 아니고

이길 중간쯤에 궁녀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은

백제왕자들의 산책로라 했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이 길은 같은길일텐데

왜 이길은 왕자들만 다녔든 길일까? 왕자들이 다니든 길이였어니

지금 이길을 걷는 사람도 왕자처름 다니면 되는게 아닐까,

사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 궁녀사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 지명은과 설치물들은 고유명사다 그래서 영어로 표기한것도

모두 소리나는대로 적혀있다,

오솔길처름 생긴길로 잠시 따라가면

숲 속에 작은 건물이 보인다,

궁녀사 외삼문이다,

궁녀사는 낙화암에서 꽃처름 떨어진

궁녀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세운 사당이라 적혀있다,

궁녀사 외삼문으로

들어가니 전면 3칸의 작은 궁녀사가 있다,

문이 닫혀있어니 안으로 들여다 볼수는 없었지만 내부에는 참배할수 있는 공간과

궁녀의 모습을 그린 영정이 있다, 삼천궁녀를 추모하는 궁녀사이니 전쟁에 패한 백제의 마지막을

보는것 같아서 씁쓸하기도 하지만 궁녀도 그림 속에서나마 꽃다웠든 그녀들의 혼이 지금도 살아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래서 역사란 승자만이 정의가 아닐까? 궁녀사 현판은 김종필 전총리가 썻다,

반월루와 궁녀사에 대한 일기는 여기까지다,

다음은 사자루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