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강화산성 북문에서 강화터미널(2019년 11월 17일) 본문
강화산성 북문이다, 북문에는 진송루 鎭松樓 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고려고종 19년 1232년 도읍을 옮기고 궁궐을 지을때 도성도 함께 쌓았는데 개성 성곽과 비슷하게
內城, 中城, 外城으로 축성했는데, 이중 內城에 해당하는 것이 현재 강화산성으로, 원래는 土城 이였어나 숙종 3년
1677년에 현재와 같은 石城으로 쌓았다, 강화산성을 이해하자면 먼저 강화산성을 왜 쌓았야 했는지?
역사적 이해가 필요할것 같다, 강화산성을 쌓아야 했든 역사를 돌아보면
고려와 몽고의전쟁 시기인 1218년(고려 고종 5)에 몽고군이 거란의 유민들을 추격하여 고려로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된다, 몽고가 거란을 공격하자 거란의 유민들이 1216년(고종 3)고려를 침범했다. 이후에도
몽고는 고려를 무려 9차례나 침략했는데. 1231년부터 30여 년 간에 걸쳐 몽고의 침략이 자주있어 고려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며 항쟁했다.
원의 고려 침략기는 무신정권시대였다. 그것도 최씨 독제시대였다. 이의민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몽고의 본격적인
침략을 겪지않고 죽었다. 몽고의 1차 침입때는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정권을 잡고 있었든 시기다,
몽고의 1차 침략은 고려를 방문하고 돌아가든 몽고사신 저고여, 일행이 압록강 주변에서
고려 軍服으로 무장한 병사들에게 살해 당하는 사건이 났는데, 이에 고려는 금나라가 고려군복을 입고 벌인짓
이라고 했고. 또한 침략의 명분을 만들기위해 몽고의 자작극이라는 설도 있었다. 당시 상황에서 고려가 몽고 사신을 죽인다는
것은 보복이 두려워서라도 할 수 없었겠지만 몽고는 이 사건을 핑계로 고려에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하다가 고려가
말을 안듣자, 살리타라는 장수와 군대를 보내 대대적으로 고려를 침략해 온 것이 몽고의 1차 침략이다.
그러나 무신독재 정권은 몽고 침략때 각 성에서 싸우고 있는 장수들에게 중앙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신들을 전장에 보내면 언제 역으로 자기들을 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마지못해 지원군을 보낼때도 젋고 유능한 군인들은 자기들 곁에 놔두고 늙고 힘없는 군인들만 보냈다. 몽고 1차 침입 때
무신정권 집권자인 최우는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각 장수들에게
몽고에 항복하라고 명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애국 정신이 투철한 고려장수들은(귀주성, 자주성 )끝까지 항전을했다.
그러자 몽고는 이 城들을 우회해서 개경까지 처들어온다, 이에 고려조정은 항복을 했다, 몽고는
고려조정에서 엄청난 배상금과 조공을 약속받고 다루가치(원나라 총독(總督)외 72명의 감시인원을 남겨두고 철수한다.
몽고의 1차 침략은 이렇게 끝이낫다, 이후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항복하라는 명을 받고도 끝까지 몽고군과
싸운 장수들을 잡아다가 처형하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본 몽고 다루가치가 최우에게 몽고에게는
역적이였지만 고려에는 최고의 충신인데 왜 죽이느냐며 말려서 처형은 면했다,
나라를 위해 끝까지 항전한 장수를 잡아다 처형시키려 했던 고려 무신정권 집권자인
최우는 몽고와의 화친약속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몽고가 다시 침입해 올 것을 예상히고
그 대책으로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할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문신 관료들은 강화도로 천도하면 백성들의 피해가 클거라며
반대한다. 그러나 최우는 천도에 반대하는 자들을 처형하고 강화도 천도를 강행한다. 이때부터 38년간 무신정권은
강화도에서 호의호식하며 지냈고 고려백성들은 이후에도 8차례의 몽고 침입으로 수없이 죽어나갔다.
최우는 녹전차 100여 대를 동원해 자기집 재산을 모두 강화도로 운반시켰다.
궁궐의 모든 기관들도 강제로 강화도로 옮기게했다. 당시 최우는 강화로 떠나지 않는 관리는 군법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동시에 군사를 동원하여 강화도에 새 궁궐을 짓게 했다. 결국 그해 6월 고종과
백관들은 최우의 강압에 못이겨 강화도 새 궁궐로 옮겨왔다. 고려 도읍이 강화도로 옮겨갔다는 소리를 들은 몽고는 대병력을 보내
다시 고려를 침략했다. 하지만 수전(水戰)에 약했든 몽고군은 강화도로 쳐들어 가지 못하고 염하강변 육지에서
섬으로 도읍을 옮긴 것을 강하게 트집 잡아 국왕이 육지로 나올 것을 요구하며 대치한다.
강화도로 천도한 최우와 개경 귀족들이 호사를 누리는 동안 백성들은
궁궐을 짓는데 동원되었다. 강화도에 지어진 궁궐은 그 규모나 배치가 개경 궁궐을 그대로
본 뜬 것이었다. 최우는 강화도에 궁궐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도 지었다. 그는 자신의 집 정원을 꾸미기 위해
군사를 동원해 개경의 나무를 가지고 오도록 했는데. 많은 군사들이 나무를 운반하다가 픙량을 만나
바다에 수장되기도 했다. 개경과 강화도는 해협을 마주하고 있는 거리다,
고려 무신정권은 100년간을 이어갔다. 그 중 60년이 최씨 정권이었다.
그들은 외침보다는 내부 반란을 더 무서워했다. 나라의 존망이나 백성들의 안위보다는
자기들의 정권유지가 더 우선이였든 최충헌이나 최우는 몽고군 침입때 결사항전을 하는 아군에게
지원군도 보내지 않았다. 강화도 천도만 해도 무신정권의 실권자인 최우가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만 살려고 천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제 지루한 역사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고 븍장대터로 올라간다,
북장대로 올라가는 성곽길은 이 정목에서 알려주는 나들길 15코스(고려궁 성곽길)와
같은 길이다, 오늘따라 늦은 가을비가 내린다,
북문에서 동문으로 가는길
멀리보이는 산들은 김포 일대인 육지다,
북장대가 있었다는 북장대 터에서 염하강이 보인다, 강화와 김포사이를 흐르는
이 강은 강처름 보이지만 소금 염(鹽)자와 물 하(河)자를 쓰는 해협으로, 김포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
이라고 한다, 강폭은 좁은곳이 200~300 m 넓은 곳은 1 km 정도며 길이는 20km나 된다,
옛날에 한강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거처서 가야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어며
1950년 한국전쟁부터 2007년까지는 철저히 출입이 금지되고 통제되든 곳이였다, 염하강 주변은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일제 수탈에 맞서 싸웠든 진(津) 보(堡) 돈대(墩臺)가 곳곳에 있다,
북장대터다, 남장대는 복원이 되였지만 북장대는 터만 남아있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성곽 바깥으로 내려가면 강화나들길 1코스로 강화 10경으로 불리는
아름다운 연미정이 있는 곳으로 갈수있다, 연미정이 있는 월곶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서해와 인천으로
흐르는 물길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고 해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燕尾亭)이라 했다는 곳이다, 고려 고종 31년 1244년에는
구재학당의 학생들을 이곳에모아 공부를 시켯다는 기록도 전해지며, 정묘호란 때는 인조가 후금과 굴욕적인
형제관계의 강화조약을 맺은 곳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연미정으로는 가지 않는다,
북장대에 있는 1코스와 15코스 이정표가 보인다,
15코스는 강화궁성곽길로 버스터미널에서 보이든 남문으로해서
강화궁성곽을 따라오면 이곳으로 연결이 된다,
계속해서 강화성곽 을 따라간다,
아직 성곽이 복원되지는 않았지만 북문구간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왔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개풍군 지역
임진강과 한강, 그리고 염하강이 합류되여 서해 바다로 흘러드는 조강이 보인다,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 왔어니 이제 내려 간다,
가을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어디 잠시 쉴곳도 없었는데
비를 막아주는 작은 정자가 보인다, 저곳에서 성곽을 따라 직진을 하면
북문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내려가면 동문으로 연결된다,
강화산성에서 동문으로 내려 간다,
작은 정자가 있는 곳에서 마을은 그리 멀지않다,
멀리서 보기에도 저 정도의 나무는 흔하지 않을 것 같은 큰 나무가 보인다,
나무 앞에 있는 안내는 나무 둘레 7m, 높이 19m의 느티나무로
장장 600년을 살아온 나무라 알려준다,
7m의 둘레를 가진 나무니
보는 것 만으로도 거대한 밑 둥이다,
600년 느티나무가 있는 옆에는 강화산성 동문이 있다,
오늘 처음 산성으로 들어왔을때 지나간 동문으로 다시 돌아온 셈이다,
동문을 나가서
산성이 연결된 오른쪽 산 능선으로 올라간다,
이곳에는 강화나들길 1코스 이정목이 있다,
강화산성을 따라가는 코스는 15코스라고 했는데 여기도 강화나들길 1코스 심도역사문화길이다,
무슨넘의 길 이름을 이렇게 헷갈리게 붙였는지? 강화군에서 만든 이정표를 따라 강화나들길을 찾아 가자면
대동여지도를 만드신 김정호선생께서도 헷갈리실 것 같다, 강화도 일부 사람들이나
길 이름을 붙인 사람만 다니는 길이 강화나들길인 모양이다,
동문 옆 산으로 산성을 따라 올라가면서 돌아보니
오늘 두번이나 지나온 동문이 보인다,
이 구간도 강화산성 성곽은 아직 복구되지 않은 곳이다,
복구는 두번째고
우선은 성길을 내느라 큰 나무들과 숲은 제거한게 보인다,
이길에서 제일 높은곳은 견자산 정상이였다,
누군가가 정상에 있는 이정목에 견자산(見子山)이라는 이름을
송곳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파서 써 놓은게 보인다,
성 돌이 군데 군데 흩어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예전에는 성곽이 있었든 것 같은데 지금은 모두 허물어 지고 형체만 남아 있다,
이곳 견자산은 해발 60m의 산이다, 높이로는 산이 아니라 언덕이겟지만 그래도 이름은 견자산(見子山)이다,
그러면 어느 정도의 높이라야 산이라 부를까? 우리가 산이라 부르는 산의 기준은 무었일까?
산림청이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국에 존재하는 산의 수는 2006년 10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국토지리정보원의 자연지명 자료를 기초로 현장 숲길 조사, 수치지형도 분석, 지방자치단체,
지리, 지형학계, 산악단체 전문가의 검토를 거쳐 최종 집계한 수가 4,440개라 했다.
산의 기준은 나라마다 달라서 영국에서는 표고 1,000피트(305m)가 넘어야 산이라 부르고,
미국은 2,000피트(610m)가 넘어야 산으로 간주한다고 한다, 英 美 기준으로 보면 높이가 629m인 관악산 정도는 돼야
마운틴(mountain)이고, 서울의 남산은 262m밖에 안 되니까 마운틴이 아니라 힐(hill) 즉 언덕인 셈이다,
그러나 현재 국토지리정보원이 추진하고 있는 전국 산 높이 정비사업에 따르면
1/5,000 및 1/25,000 수치지형도와 1/50,000 지형도 등 우리나라 기본도에 표현된 산의 개수를
11,859개로 집계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표고 200m 이하의 산이 4,714개나 된다. 산의 숫자가 4,440개라고
발표한 산림청 등산지원팀 관계자는 산림 정책의 대상이 되는 산을 파악한 것이라고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보면 산은 평지보다 높이 솟아 있는 땅의 부분이라 했고
백과사전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주위의 낮고 평평한 지형 면에서 높게 돌출하여 가파른
경사면을 이루고 있는 지형이라 정의하고 있다,
지형학에서는 주위로부터 적어도 수백 미터의 비고(比高)를 가진 것을 산이라 하고,
그보다 낮은 것을 언덕 또는 구릉이라고 일컫으면서도 그러나 높이에 따라 구별되는 절대적인 기준은
있을 수 없으며, 이는 지역이나 국가 또는 학자에 따라 개념을 달리한다고 나와 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을것 같은 산의 기준까지 곰곰생각을 하면서
견자산 내림길인 강화산성 토성을 따라 내려간다, 토성 구간인 견자산 일대는 무었을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토성에 자라고 있었든 많은 그루의 나무들을 모두 잘라서
믿둥만 남겨 놓은게 보인다,
그렇게 내려 가다가 보니
아침에 들어왔든 15코스 남문 입구 도로로 내려왔다
도로로 내려 왔어니 불과 100여m 남짓한 거리에 있는 강화풍물시장으로 간다,
풍물시장은 강화민속장 명소화사업으로 2007년에 신축한 시장이다, 풍물시장입구 공터와
도로변에도 300여개의 좌판 시장이 열리며 인근에는 강화 인삼센터와 토산품 센터도 있어 함꼐 돌아 볼수도있다.
노점에는 각종 나물류와 견과류, 각종 야채등이 있는 고유의 재래시장이다. 시장 1층에는 풍물장,
회센터가 있고, 2층에는 풍물장과 식당등이 있는 곳이였다,
사람사는 문화는 어느 곳이든 재래시장이 얼굴이다,
그러나 무슨 큰 뜻이 있어 이곳을 찾은것은 아니고 그저 구경을 하러 왔다,
풍물시장 뒷편으로 들어 왔더니 출입구가 이렇게 생겻다,
정문과 후문으로 연결되는 통로에,
점포는 많은데 사람은 적다,
풍물시장 2층으로 올라가 본다,
재래시장에서는 볼거리도 많은 것 만큼 먹거리도 많았다,
그러나 무었을 사려고 온 것은 아니였고 그저 구경하러 온 것이니 시장을 한바퀴 돌아보고
강화버스 터미널 옆에 있는 정육식당에서 등심 1인분과 삼겹살 3인분
궈워서 1차로 소주 한잔하고 90번 버스로 김포골드선 구래역 - 김포공항역 - 목동역으로 이동후
홍익병원 사거리 양촌리 한우식당에서 또 자리를 잡았다, 어둠이 가득내린 시간인데도
비는 그치지 않고 내내 내린다,
오늘 강화도 구경은 딱히 무슨 목적이 있었든 것은 아니고
그저 발길 닫는대로 산성길도 따라걷고, 역사속으로도 빠저보면서 유유자적한 날이다,
더욱이 낮부터 내리는 가랑비로 마지막 가을을 즐긴 하루였다, 마지막 도착지점이 동네라 그런지
넘치는 술잔이 오갔지만 그러면 어떤가,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즐거운 시간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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