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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서울성곽길(한양도성,6) - 장충체육관 ~ 청계천 오간수교(2015년 4월 18일) 본문

Trail(둘레길)/한양 도성길

서울성곽길(한양도성,6) - 장충체육관 ~ 청계천 오간수교(2015년 4월 18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5. 4. 20. 11:29

서울 성곽길 표시다, 여하튼 이리 가고 저리 가라는 표시인데 이정표와는 거리가 멀다,

장충동 다얀트리 호텔에서 장충체육관 뒤 까지의 성곽은 비교적 온전한채로 보존되여 있다,

위 성곽이 끈어진 맞은편 

주택지로 들어가는 도로를 따라 직진으로 끝까지 가면

T자길이 나오는데 앞에 보이는 카센타 건물에서 오른쪽으로 나가야한다,

시내 주택지 구간은 성곽길 안내표시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봐도 소용이 없다,

지나온 성곽길과 앞으로 이어질 길을 예상하고 그냥 가보는수 밖에는 없다,

카센타건물 에서 오른쪽으로 보면 바로 앞에 도로가 나오는데

그길 좌측으로 나가면 광희문이다,

 

복원된 광희문 일대,

거리는 얼마 되지않지만 이나마 남아 있는게 다행,

광희문은 서울의 방어와 시민 출입을 위해 세운 한양도성의 4소문 중의 남소문이다.

광명(光明)의 문, 이라는 뜻의 광희문(光熙門)은 흥인지문과 숭례문 사이에

위치(중구 광희동 2가 105번지)하여 시민들의 출입용 구조물이자, 유사시에는 군사 지휘소였다.   


이 문은 오칸수문(五間水門)과, 이칸수문(二間水門), 이 가까운

속칭 수구문(水口門)으로 태조 5년(1396) 9월에 한양도성을 쌓을 때 남소문(南小門)의 역할로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한양도성과 궁궐이 파괴될 때 광희문도 파괴된 뒤 120년이 지나 숙종 37년(1711)에 고쳐 쌓고,

숙종 45년(1719)에 석축 위에 문루(門樓)를 짓고 광희문 현판을 걸었다.

소의문(서소문)과 함께 상여가 나가는 시구문(屍口門)이었다.

조선왕조 500년간 한양도성 안의 시신(屍身)은 금령(禁令) 때문에 반드시 광희문과 소의문 문을 거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조선 시대에 신당동, 왕십리, 금호동 방면에 묘지를 잡게 되면 광희문을

거쳐 운구하였으므로 시구문(屍口門), 즉  저승문,  황천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수구문 밖은 조선말까지 공동묘지였다.

이 때문에 망자(亡者)를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굿을 하는 경우가 많아 무당들이 광희문 밖에 많이 모여 살았다.

갑오개혁 후에 한성부는 서울의 인구통계를 작성하기 위해서 경무청(警務廳)에 광희문을 통과한 시신수를 보고 하기도 했다.

광희문의 성곽을 쌓은 공사실명제인 ‘각자 성돌’ 2개 흔적

광희문의 성돌 각자는 광희문 안과 광희문 밖 두 군데 있는데 우선 광희문 안쪽은 문루 바로 옆 여장에

2개의 돌에 글자가 있다. 첫째 각석에는 'O소 감관 김덕경 서원 이종엽 고직 김광복' (O所監官金德京書員李琮燁庫直金光福)과

둘째 각석에는 '감관 김수함 군 김영득 석수 김성복 신미 팔월 일' (監官金壽涵軍金英得石手金成福辛未八月日)이란 각자로 쓰여 있다. 


그 내용은 숙종 17년(1691) 성곽 개축공사 때의 담당처와 감독관, 문서 담당자, 창고 관리인 등이 적혀있다.

광희문 도성 바깥쪽은 하단부 성돌에 새겨져 있다. 一牌將 등의 각자가 있다.

한양도성 18㎞ 성돌[城石]에는 붕괴할 경우에 그 책임을 묻도록 하기 위한 공사실명제이다.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430년간 남소문의 역할 담당 

 세조 2년(1456)에 도성 안에서 한강으로 바로 통할 수 있도록 현 반얀트리 호텔

(장충동 2가)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남소문을 새로 내고, 광희문이라고 하였다.

 

13년 후인 예종 1년(1469)에 지경연사 임원준 등이 수레가 다닐 수 없으므로

실용성이 없다고 주장하고 음양가들은 세조의 장남 의경 세자(덕종)가 20세에 세상을 떠났고,

남소문을 열어 놓으면 도성 여자들 음행이 많아진다는 설을 주장하자 예종이 그 건의를 받아들여

남소문을 폐쇄하고, 수구문(광희동 2가)에 광희문, 현판을 떼어다가 달았다.

현재는 남소문의 주초(柱礎)마저 없어졌다.

인조 2년(1624)에 이괄 이 난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였다가 광희문을 통하여

이천으로 도망갔고, 병자호란(1636) 때에도 임금이 역시 이 문을 통과하여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문이다,

 

육 축 체성의 높이는 6m, 폭은 7.98m이며, 바깥쪽 홍예의 높이는 4.18m, 폭은 4.58m,

내측 홍예의 높이는 4.68m, 폭은 5.18m 다. 홍예 내부 통로의 폭은 5.16m이고, 홍예 대석(臺石)의 높이는 2m이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初翼工)계 단층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사각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내림 마루에는 양성마루를 하고 잡상을 설치하였으며, 바닥은

중앙 칸에만 장마루를 설치하였다. 문루 바깥 사방에는 총안(銃眼)이 없는 전돌 여장(女墻)을 둘렀으며,

좌우 안쪽에 등성계단과 협문을 마련하였다. 여장의 높이는 1.02m, 폭은 62㎝이다.

 

 광희문앞에서 한양공고 앞 건널목을 건너서 ~

 디자인프라자 뒤 길로 서울동대문 운동장 공원으로 가면

여기가 서울운동장 자리였음을 알수있도록 철거하지않고 그대로 보존해둔 

서울운동장 야간 조명탑이 있는 곳이 나온다,

 동대문 운동장이였던 이곳은 원래 조선시대 군사 훈련장인 훈련도감이 있었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은 훈련도감과 성벽을 없애고, 1925년 경성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운동장을 세웠다. 

아래 사진은 일제가 성곽을 허물고 경성운동장을 만들었든 자리에 복원한 이칸수문,(二間水門), 

 한양도성은 이렇게 배수지(排水地)로

 2칸수문(二間水門), 5칸 수문(五間水門), 등을 만들어 성내의 물길을 관리했다,  

광희문에서 이어진 성곽은 이렇게 흥인지문(동대문)으로 연결되였다, 

보이는 건물들은 디자인 프라자 맞은편에 있는 빌딩 숲,

만일 여기서 광희문을 안으로 들어왔다면 성곽이 어디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안내표식이 없기때문에

광희문 앞 건널목을 건너서 동대문 야구장이 있었든 도로를 따라가도 동대문으로 연결은 된다,

좌측에있는 서울동대문역사공원역 4번 출구를 끼고 우측으로 돌아 나가면 된다,

원래 성곽은 광희문 앞에서 길을건너 동대문 역사관과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으로 해서 오간수문터로 가야한다,

 

대한민국 패션 일번지

 동대문일대의 의류 쇼핑몰과 ~

일제때 경성운동장은 해방과 함께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였다가,

1984년 잠실에 잠실종합운동장이 개장하면서 동대문 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꾸어 사용하게 되였고.

잠실에 서울종합운동장이 생기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다양한 스포츠 시설을 갖춘 공간이였다

지금은 모두 철거하고 초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디자인프라자 건물이 들어 섯다,

디자인 프라자 앞에 있는 서울시내 중요관광지를 순환 운행하는 시티투어버스

정류장도 있고 버스표도 판다, 그러나 이길로 따라 왔다면 이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서울운동장 터에 새로 복원한 성벽과 이칸수문은 꼭 찾아 보아야 한다,

 

도로 한가운데 흥인지문(동대문)이 보인다,

무척이나 커 보였든 평화시장 건물이 왜 이렇게 작아 졋을까?

청계천을 따라 하류로 1,4km 정도를 가면 서울의 명물인 서울풍물시장이다,

갔다가 이자리로 다시 돌아오면 약 3km 니 오늘은 패스 ~

콘크리트 덩어리로 우람한 괴물처름 자리했든 청계천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복원한 청계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든 공과 중 하나였지만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건 나만일까,

청계천 위 이 다리가 오간수교다,

오간수교는 동대문과 수구문 사이에 뚫린 5개의 구멍으로 흘러내려가든 물 위 다리라는 뜻이다,

조금전에 예전 동대문 운동장터에 복원한 이간수문에서 흘러내렸든 물도 이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 왔다,

 

다리 건너 동대문 주변

동대문 호텔(예전 이스턴호텔)뒤에 있는 재래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