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이순신장군 생가터 와 의금부 터(2022년 8월 21일) 본문

경기옛길(조선시대 7大路)/삼남길 서울 구간

이순신장군 생가터 와 의금부 터(2022년 8월 21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2. 9. 23. 00:58

을지로 4가역 10번 출구를 나가면

대림상가와 삼풍상가가 연결되여 있는 을지로 4가 

을지로 삼풍상가는 이렇게 퇴계로 로 이어진다,

삼풍상가를 지나 을지로4가 우체국 옆, 을지로 인쇄골목으로 들어간다,

을지로 인쇄골목 끝, 2차선 도로가 지나가는 마른내로다,

마른내로 오른쪽이 명보사거리다,

명보사거리에 자리한 명보극장, 지금은 명보아트홀이 있다,

명보아트홀 벽에는

신영균선생의 초상화 동판도 붙어있다,

조선시대 이 지역은 건천동이 였다, 남산에서 작은 물 줄기가 이곳으로 흘러내려 작은 개천이 생겼는데 수량이 많지 않아 대체로 마른 개천이라서 건천이라 했다, 지금도 이곳 도로 이름은 "마른내로" 다,

 

이곳 건천동에서 1545년 3월 8일(음력) 덕수이씨 의 4남1녀중 셋째 아들로 태여났다, 할아버지께서 중종때 조광조일파 숙청 기묘사화에 얽혀 큰 고초를 격자 이순신 아버지는 벼슬에 뜻을 두지않고 평민으로 지내다가 생활이 어려워 부인의 친정이 있는 아산 백암리로 이주 해서 살게 되였다, 이순신에게는 외가집이 제2의 고향이 된다,

 

아산에서 이순신은 21세때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과 결혼을 했다, 장인은 무장 출신으로 이순신의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순신이 무예에 뜻을 품고 무술연마와 병법 연구에 정진한 것이 결혼 이후였기 때문이다, 결혼 7년후1572년(선조5년) 8월 28세의 나이로 훈련원 별과 과거에 응시 했어나 불합격 하고, 4년뒤 인

 

1576년(선조9년)2월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간신히 합격한다, 합격 성적은 합격자 28명 중 중간 정도인 병과 4등이 였는데 이 정도의 성적은 관직을 제수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시험 점수 와 능력은 별개인 모양이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 였던 유승룡 선생과 경상 우수사였던 원균 장군과 앞 뒤 집에 살았다고(태여난 장소는 다름)하는데 유승룡 선생은 이순신장군 보다 3살위로 이순신장군의 둘째 형 이요신과 친구로 어렸을적 부터 이순신을 잘 알고 있어서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전 육군이던 이순신을 6계급 특진을 시켜 전라 좌수사로 선조에게 천거 했다, 반면 원균 장군은 이순신 장군보다 5살 위 대 고참 군인으로 북쪽의 오랑캐들을 무찌르며 전과를 올릴때 이순신은 미관 말직의 이름없는 군인이였다,

 

건천동 이순신장군 생가 터 는 477년이 지난 지금(2022)은 명보아트홀이 있는 장소다, 물론 이자리가 이순신장군 생가 터 인지? 아니면 이 일대 어디 일지는 알 길이 없지만 해군에서 고증을 거처 선택한 장소가 여기다,

여하튼 이순신장군은 이 일대 어디에서인가? 태여 나셧어며

이곳은 명보사거리로 서울의 중심가지만 1545년에는 어떤 모습이 였을까?

명보아트홀 오른쪽으로 돌아 나가면

지하철 3호선 8번 출구로 명보아트홀에서는 가장 가까운 역이다,

8번 출구를 지나서는 을지로 3가 교차로 을지로 3가역이다,

이순신장군 생가 터 에서 이곳까지 200m 거리다,

을지로 3가 교차로를 지나서 직진으로

다시 200m정도를 가면

청계천 관수교 다,

관수교

청계천 12번 출입 계단으로

청계천으로 내려간다,

여기서는 청계천이 시작되는

상류(동아일보가 있는 곳)로 올라가야 한다,

관수교를 지나 올라가는 길

사람들은 별로 안보이지만 흐르는 물소리는 요란하다,

관수교 지나

첫번째로 보이는 징금다리를 

건너 가면서 본 청계천 물길

반대편으로 건너와

관수교 다음으로 보이는 수표교를 지나서

계속 올라가면

이번에는 삼일교가 있다,

삼일교 아래 청계천 변은

한화가 함께 조성했다는 불, 꽃길 이라고 한다,

양쪽 벽면에 그림을 그려놓은 것이 전부인 것 같은데 벽화 말고 무엇을 조성했다는 것인지?

삼일교를 나가면 신한은행에서 조선시대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 벽화를

타일로 붙여 만든게 있다, 1897년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 이였든 한성은행이

이곳에 있었어며 한성은행은 신한은행 전신이라고 한다,

삼일교가 끝나는 지점에서 부터 시작되는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는 끝이 안 보일 만큼 길게 이어진다,

반차도 설명에는 능행 반차도는, 중사의 파종, 초관, 초병들이 앞장서고,

그 뒤에 내시, 열쇠를 담당하는 서략, 병을 차료하는 내의원 제조와 외관, 도승지, 를 비롯한

승정원의 승지와 주서, 예문관의 한림, 규장각 신하, 장용영 제조, 경연관 등이 따르고

 

그 뒤로 50명의 금군과 표기를 앞세운 별무사, 병조판서 심환지, 그리고 동반과 서반의

신하들이 칼을 차고 따르고 있다, 행열의 맨 마지막에는 가마의 뒤를 지키는 25명의 난후금군이

앞장서고 좌사의 초관, 초군, 파총들이 활이나 총을 메고 간다, 이렇게 적혀 있다,

이렇게 적힌 반차도 설명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요란한 물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인공폭포가 있다,

계속 올라가면서 보이는 반차도 위, 장통교도 지나간다,

장통교를 지나서 보이는 이 행열의 하이라이트인 정조의 사진과

혜경궁 홍씨가 탄 자긍기교와 정조가 탄 좌마가 등장한다, 자긍기교는 두마리 말이 앞 뒤에서 끌고간다, 

회초리를 든 근장군사(궁궐안에서 출입자들을 감시하는 군인들)들이

당당한 태도로 가마를 선도 하고 총을 맨 무예청의 총수와 협련군들이 가마와

좌미를 삼엄하게 에워싸고 있다,

정조는 양산을 떠 받치고 있는 좌미에 앉아 혜궁경 가마를 뒤 따르고 있어나

임금의 모습은 그리지 않았다, 좌마 앞 뒤에는 무장하지 않은 무예청 별감과 위내사령이

에워싸고 있다, 뒤 따르는 어용 복마는 임금의 용품을 싣고 간다,

여행의 목적지가 경기도 임으로 경기감사이자 정리사인 서유방이

행지를 선도하는 가운데 이 행사를 총괄하는 우의정 채제공이 임시로 총리대신의

직함을 띠고 장교와 서리, 늑사들의 호위를 받어며 말을 타고 가고있다, 

그 뒤에 84명의 별기대와 활을 맨 마병, 총을 멘 보군들이 북소리에 발을

맞추며 따라가고 있다, 행열의 좌우에 곤장을 멘 군뢰(죄인을 다루는 군인들)와

깃발을 든 군인들이 고관들을 호위하고 있다,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가 끝나는 뱍화 앞 수선전도가 그려저 있다,

조선후기 1826년 김정호가 직접 작성한 목판본 서울시가지도다, 서울 북쪽 도봉산에서

남쪽 한강에 이르는 지역을 종로거리가 동, 서로  가로지르는 것으로 그렷어며 서울의

주요 도로와 교량, 성곽 등 460여개의 중요 지명을 표기한 지도다,

수선전도는 조선시대의 목판 본 서울 지도중 정확성 및 규모감에서

가장 뛰여난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보물 제 853호, 가로 67,5cm, 세로 82,5cm /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이다,)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

조선왕조 22대 임금 정조대왕은 1795년 윤 2월에 사도세자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모친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수원)과 현릉원(사도세자 무덤)을 다녀와서 그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 를 편찬했다,

 

이 책에는 왕의 행차가 창덕궁을 떠나 광통교를 건너 화성으로 가는

모습이 판각화로 그려저 있는데 1779명의 인원과 779필의 말이 따르고 있다,

김홍도등 당대의 일류 화가들이 그린 이 반차도는 왕조의 위엄과 질서를 장엄하게

표현하면서도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인물 묘사가 돋보인다,

 

왕실 기록화이자 한폭의 커다란 풍속화를 연상시키는 이 반차도는

당시 행차의 격식과 복식, 의상, 악대, 구성들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곳에 설치된 작품은 역사학자의 고증을 거처 미술전문가의 노력으로 재현되였다,

장통교를 지나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간다,

이 계단은 장통교 5번 출입구다,

청계천 장통교 5번

출입구를 나가 광교 방향으로 간다,

보이는 이 다리가 광교다,

광교에서는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

오른쪽으로 가는 건너편 대각선상에 영풍문고 가 있다,

이어서 보이는 SC제일은행 본점,

저기가 충무공백의종군길 출발 지점이다,

그리고 제일은행 본점 맞은편 종로타워도 보인다,

보신각으로 왔다,

보신각(普信閣)은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있는 전통 2층 한옥 누각이다,

보신각은 종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든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구조다

보신각 앞 인도에는 척화비가 있었던 곳이라는 표석도 있다,

19세기 후반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양인들의 조선 침투를 방어 격퇴 시켯다는

의미로 전국 주요 지역에 세운 비로 그 중 한곳이다,

보신각에서 제일은행 본점,

지하철 종각역 1번 출구로 건너간다,

보신갹 잎에서 건너 가면서 보이는 종로타워

두번째 건널목을 건너가면서 보이는 제일은행 본점이다,

제일은행 본점 앞 이다,

여기서는 지도에 표기되여 있는 대로

의금부 터 를 찾아, 인도로 조계사 방향으로 간다,

지도에 표기되여 있는 의금부 터, 지금은 제일은행 본점 옥외 주차장이다,

의금부는 오늘날의 제도로 보면 대법원, 검찰청, 국가정보원을 합친 최고의 사법기관

쯤 되는 것 같다, 포도청은 경찰청, 내금위는 대통령 경호실 쯤이다,

다시 제일은행 본점 앞으로 나왔다,

제일은행 본점앞 화단에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출발지 안내 표지판이 있다,

이곳은 1597년 4월 1일 충무공 이순신이 선조의 명을 받고 출옥하여

백의 종군길을 떠난 출발지다, 백의종군로는 충무공 이순신이 한양(서울)을 출발하여

초계(합천 율곡)까지 간 행적로와 동년 8월 3일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재 임명되기 전 까지의 행적로다,

라고 안내되여 있다,

그리고 이 안내판 뒷 면에

이순신백의종군로 출발 스템프 함이 있다,

스템프 함에 비치되여 있는 스템프를 찍어면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START,

라는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다,

그리고 이 안내판 옆에는 시전행랑 안내도 있다,

1901년 종로 일대 사진이다, 대형빌딩들이 솟아 있는 이곳은 대로(大路)와 골목이

광화문사거리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대로(大路)는 시전행랑 이라는 관설시장이 있었던 거리고

이 대로(大路) 우측 뒷골목은 피맛골이라 했다, 

피맛골이란? 조선시대 시민들이 종로를 지나는 고관대작들의 말을 피해

애용하던 뒷골목으로 당시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말을 탄 고관 대작을 만나면

행차가 끝날때 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기 때문에 갈길 급한 서민들이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이용했다, 피마(避馬)에서 유래한 이름이 붙었다,

시전행랑은 국가에서 점포를 건설하여 상인들에게 임대하고 세금을 받는

관설시장을 시전이라고 했다, 조선 태종대(태종, 재위 1400~1418년)에 종로와 남대문로를

따라 양쪽에 건물이 길게 늘어선 행랑을 조성했고 이곳에서 상업 활동을 하게 했다,

아래는 종로 시전 행랑 실측 도면이다,

그리고 의금부 터, 표지석은 제일은행앞 조경지에 있다,

의금부터 표지석이 있는 곳 옆에는 의금부 터 안내도 있다,

의금부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금부, 금오, 왕부라 부르기도 했다,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의 좌, 우 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 및 군, 현에서 문초를 받았다,는 안내가 있다,

을지로 4가역 10번 출구에서 이순신 장군 생가 터 와

종각앞 제일은행 본점까지 약 2km 정도로 30분 정도 걸린다,

이어지는 기록은 이순신 백의종군로 출발지인 종로 제일은행 본점

"의금부 터" 에서 삼각지역 까지의 이야기다,

충무공이순신백의종군길 출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