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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남한산성의 가을을 따라 걷는 성길(2010년 10월 23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인천·경기·강원

남한산성의 가을을 따라 걷는 성길(2010년 10월 23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0. 10. 3. 23:26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된다

결국 인조14년(1636) 청나라 태종이 10만 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우리민족

역사에 가장 치욕적이고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된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조선 인조 17년(1639년) 지금의 송파구 잠실동 47번지에

삼전도비(제목, 대청황제공덕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

(大淸皇帝功德碑) 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땅바닥에 머리를 아홉번이나 찧어 피를 흘리며

항복의식을 치룬 인조, 우리민족사에 잋지못할 뼈아픈 역사를 간직한 남한산성이지만

지금은 그때의 치욕과는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2010 가을 단풍을 맞이하고 있었다

1624년 인조 2년 城 을 개축하여 1626년 공사를 마친다,

4門과 16暗門 1,897개의 성가퀴, 옹성, 성랑, 우물, 샘, 등을 갖추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휴식처인 공원으로 변해 있는 남한산성은

 城이란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든 곳이다, 남한산성의 역사 또한 우리 민족사에서

결코 잊을수 없는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여진족인 청은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나라였다,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로 직접 조선으로 쳐들어와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청태종이 이끌고 온 10만 대군에 대항할 힘이 없었든 인조는

군사을 이끌고 지금의 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들어와 청나라 군사와 대치한다,

그러든 이듬해 1월 하순 왕자와 왕족들이 피난을 갔든 강화도가

함락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남한산성에 비축한 식량이 바닥나자 45일 간의

대치를 끝으로 1월 30일 청나라 군영이 있는 한강가의 나루터인 삼전도 (三田渡)로 나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군신간의 강화협정을 맺어면서 인조는 청태종의 요청에 따라

무릅을 꿇고 세번 절하고 이마를 아홉번이나 땅에찍는 수모를 당한다,

인조가 머리를 9번이나 땅에 찍어면서,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흘리며

항복의례를 하는 동안 청태종은 신하들과 희희낙낙 거리며 기녀들을 희롱했다,

말로는 다 할수없는 치욕을 당한 인조는 이런 수모를 격어면서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치욕적이고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는다,

이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자와 수많은 부녀자가 청에

불모로 잡혀갔다, 청에 볼모로 잡혀간 부녀자들을 그 가족이 엄청난

속전을 물고 찾아 왔는데, 그후 이렇게 돌아온 부녀자들을 환향녀라 부르게 된다,

그 환향녀가 오늘날 화냥년의 어원이기도 하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그것도 모자란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조선 인조 17년(1639년) 지금의 송파구 잠실동 47번지에

삼전도비(大淸皇帝功德碑 )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 글자, 오른쪽에는 만주 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비록 치욕의 역사라고 할지라도 역사를 부끄러워 해서는 안된다,

역사를 바로 알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만이 후손의 도리다

남한산은 산의 사방이 평지로 둘러 쌓여 밤보다

낮이 길다고 하여 일장산(日長山) 혹은 주장산(晝長山)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남한산성의 외성은 천혜의 요새답게 산세가 험해 병자호란 때도

청태종과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전투는 하지않고 인조와 조선군이

남한산성에서 항복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남한산성 4대문인 동문은 좌익문, 서문은 우익문, 남문은 지화문,

북문은 전승문 이라고 불렀다, 이는 남한산성 수호에 대한 염원이 어려있는 이름이다

우리민족사의 아픔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남한산성, 한번쯤은 외침의 침략전쟁 한가운데 자리했든 역사를 기억하고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남한산은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서울 송파구 마천동 일부에 걸쳐있는 산이다,

주장산 일장산 이라고도 하는 이 남한산은 일견 평범한 산 처름 보이지만, 산속은 광대한

분지로 되여 있고 밖으로는 험한경사를 이뤄 천혜의 요새지로 평가되고 있는 곳이다,

남한산성 장경사다, 장경사는 남한산성을 지을 당시 전국 8도의

승려들을 모집하여 산성을 짖는것을 도왔는데 이때 승군 僧軍 들이 훈련을 받어며

머무르든 9개의 절중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되여 있는 유일한 절이다,

역사는 흐른다, 그리고 되풀이 된다,

우리는 지금 이 치욕의 역사마저 까마득히 잋고 살아간다,

그러나 결코 잋을수도 없고 잋어서는 안되는게 치욕의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