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낙산사 원통보전과 7층석탑(2017년 1월 1일) 본문
낙산사 사천왕문으로 올라간다,
낙산사 사천왕문으로 들어간다, 사천왕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수미산(須 彌 山) 중턱에 있는 사왕천(四 王 天)의 주신(主 神)인 네 명의 외호신이다. 수미산의 동서남북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는 사천왕 또는 사대천왕(四 大 天 王), 호세사천왕(護 世 四 天 王)이라고도 한다.
욕계육천(欲 界 六 天)의 최하위를 차지한다.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帝 釋 天)을 섬기며, 불법(佛 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동쪽의 지국천왕(持 國 天 王), 서쪽의 광목천왕(廣 目 天 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毘沙門天王)을 말한다.
낙산사 사천왕문은 사천왕이 지킨 탓인지 한국전쟁때와 2005년 대형산불이 발생했을 때도 화마를 피했다,
낙산사 동종은 강원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 보물 제479호로 조선 초기에 제작되였다,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었으나, 2005년 4월 5일 화재로 소실되어 그 해 7월 7일 지정 해제되었다.
동종의 종신(鐘 身)에는 중앙에 세 가닥의 굵은 선으로 띠를 돌려 상하로 구분하고, 상부에는 4구의 보살상이
양각(陽 刻)되었으며, 그 보살 사이에 범자(梵 字)가 4자씩, 또 보살상의 어깨 근처에는 16자가 각각 새겨져 있다. 이 보살상은 따로따로
마련한 연화대(蓮 花 臺)위에 선 입상(立 像)으로, 법의(法 衣)는 매우 두꺼워 지체(肢 體)의 존재마저 무시되어 있다. 옷자락은 연화대 밑까지
넓게 퍼져 드리웠다. 중앙의 가로띠 밑의 물결무늬 사이에 장문의 명(銘)이 양각되었다. 또한 세조때 중수하였다는 사실이
몸체에 기록되어 있다. 동종은, 2005년 산불로 사라젓다가 2006년 10월에 다시 태여났다,
사천왕문을 지나 빈일루, 응향각, 7층 석탑 그리고 원통보전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으로 앉은 전각은
전형적인 사찰의 가람배치 양식이다. 응향각 문으로 통해 보는 7층 석탑과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의 정취가 뛰어나다.
낙산사 응향각 문으로 본 칠층석탑과 원통보전. 사천왕문에서부터 전각이 일직선으로 배치돼 있다,
우리나라 불교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고승은 단연 원효와 의상이다, 신라 문무왕 원년(661년), 두 스님은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한 스님은 잠을 자다 갈증을 풀기위해 해골 바가지에 고인 물을 마시고 깨달음에 얻었고 한 스님은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의상대사는 관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소문을 듣고 낙산의 관음굴로 찾아간다.
천룡팔부 시종이 굴 속으로 인도하고 7일 만에 진용(眞容)을 뵈고 굴에서 나오니, 계시한 대로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나자 금당을 짓고는 소상을 봉안한다, 이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낙산사 창건 설화다,
원통보전과 7층석탑(보물 제499호)이다, 강원도 양양군 오봉산에 있는 낙산사는
사적 제495호로 지정된 양양 낙산사 일원에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말사로, 671년(신라 문무왕 11년)에
의상이 창건했다. 문화재로, 보물 제499호(낙산사 칠층석탑), 제1362호(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 제1723호(해수관음공중
사리탑 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가 있으며, 명승 제27호인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이 있다.
원통보전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봉안한 낙산사 중심법당으로 낙산사가 관음성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쟁직후인 1953년 복구되였다가 지난 2005년 대형산불로 소실된후 다시 복원되였다,
양주지밀기 낙산사 사적(襄州地密記 洛山寺 事跡)에 따르면, 의상이 관음굴에서 관음대성을 친견하고 수정(水精)을
건네받은후 관음의 계시로 흙으로 빚은 관음상을 관음전에 봉안하면서 낙산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관음전은 곧 원통보전의 다른 이름으로 낙산사 창건부터 원통보전이 주 금당이였음을 알수 있다,
원통보전 내에는 건칠 관세음보살상을 독존으로 봉안하였는데 2003년 2월 보물 제1362호로 지정되였다,
2005년 화마때 원통보전은 완전 소실되였어나 건칠 관세음보살상은 안전한 곳으로 봉안되였다,
빈일루 후면이다,
원통보전으로 들어가면서사천왕문 다음에 있는 빈일루다, 빈일루는 동해 일출을 맞이하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2005년산불로 소실된 것을 유구와 김홍도의 낙산사도 를 바탕으로 복원하였다, 누각의 일부 기둥은 산불을 견딘 느티나무를 손질하여
사용했다, 앞에있는 고목은 산불로 타 버리린 믿둥만 남아있는 것을 보존한 것인데 이 나무들이 지금은 살아나기 시작했다,
해수관음상이 보인다,
원통보전에서 나와, 낙산사가 관음도량으로 상징되는 해수관음상으로 가는 길은 꿈이 이루어지는 길이라고 불린다,
페허가되다 싶이 한 낙산사, 지금은 새로운 생명력을 잉태하고 다시 태여났다,
벌서 10년이나 되였지만 낙산사는 대형 산불로 당우 대부분이 소실되는 큰 피해를 겪었다.
천년고찰 낙산사는 돌이킬수 없을만큼 사라저 버렸다, 전 국민의 안타까움은 하늘에 다 다랐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아픔의 늪에서 헤여나지 못할수는 없었다, 범 국민들의 관심과 불사로 흔적없이 사라졌던 그 터에 새 생명의 씨를 뿌렸다.
자연이든 인간이든 아픔은 반드시 치유된다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우리는 낙산사 복원을 통해 알았다.
낙산사 입구에 하늘 높이 솟구쳐 선 큰 소나무. 밑동에는, 화염에 새까맣게 탄 뼈아픈 상처는 아직도 남아있지만.
이제 완연히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낙산사를 떠나면서 2017년 정월 초하루인 오늘은 간절한 염원과 성심을 다한
정성의 결과가 얼마나 소중하고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배우고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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